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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51화 (16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1화

(151)

솔직히 나는 이게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나나 텐티아 경은 병사 2백 명 정도를 위해 목숨을 걸어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호위 기사인 텐티아가 나를 두고 싸우러 가겠다는 건 직무유기였다.

그래도 나는 그때 후퇴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도, 텐티아 경도 감정적으로 살짝 들떠 있었다고 생각한다.

텐티아 경이야 언제나 그랬고, 나 역시 전장의 환호성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기사들은 평화로운 시대가 왔을 때도 그 환호성을 잊지 못해 마상창시합을 만들었고, 부르주아들은 그 마상창시합을 다시 간소화해서 ‘스포츠’라는 걸 만들었다.

발로 공을 차는 축구, 손으로 던지는 농구, 베트로 치는 크리켓 같은 거.

스포츠에서 큰 활약을 보이고, 팀을 승리로 이끌어서 팬들의 환호성을 받을 때, 사람은 벅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고 찬란한 게 기사가 되어 전장을 지배하는 거였다.

스포츠의 환호성은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지만, 전장의 환호성은 신분과 훈장, 검과 봉토, 노래가 되어 영원히 남는다.

나도 텐티아 경이 받던 그 환호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경했고, 감정에 젖어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었다.

텐티아 경이 이성을 잃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지는 걸 보고도 이성을 유지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너희가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란다. 영혼까지 불태워 주겠다. 눈알이 끓어오르는 기분은 어떠냐? 날개가 불타는 꼴이 마치 불나방 같구나. 너희가 감히 하늘로 날아오르려 하느냐?”

나는 숲 한가운데에서 미친 듯 웃고 욕설을 퍼부으며 용언의 불길을 일으켰다.

비늘 돋은 왼팔로 침식자들이 날리는 검은 깃털을 막아내고, 내 검 ‘흑루’로 침식자들의 머리를 쪼갰다.

침식된 오크들이 텐티아 경 앞을 막아섰다.

나는 ‘화염 파도’를 일으켜 앞으로 쏘아 보냈다.

높이가 5m도 넘는 불의 벽이 쏘아져 나가고, 휩쓸린 나무들이 불타며 쓰러지고, 침식자들이 춤추듯 비틀거리며 불타올랐다.

까아아악-!

까아아악-!

텐티아 경의 갑옷과 망토는 그 불길 속에서도 무사했다.

찬란한 백금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사악한 오크 주술사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설 속 용사 같았다.

오크 주술사가 주문을 외우고, 죽은 고블린과 오크들이 하나둘 일어나 무기를 들었다.

텐티아 경이 참수했던 오크 대전사도 목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시 글레이브를 들었다.

“이미 죽은 것들이 산 자의 세상을 탐내느냐? 이 세상에 너희가 설 자리가 남아 있을 거 같으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거라.”

나는 미친 용처럼 불길을 일으키고 ‘불의 창’을 쏘아냈다.

오크 대전사가 폭사하고 일대의 침식자들이 까마귀 구이가 되었다.

심장이 너무 뜨거워서,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뜨거운 감자를 삼킨 듯 몸속이 지글거렸다.

목에 둘렀던 물수건은 재도 남지 않았고, 발밑 땅도 끓고 있었다.

“텐티아 경!”

검은 날개를 탄 오크 주술사의 주변에는 수십 마리의 침식자들이 몰려 있었다.

텐티아 경은 ‘화한’을 휘둘러 침식자의 목을 쳤지만, 침식자들은 합창이라도 하는 듯 동시에 정신 파동을 쏘아냈다.

까아아아아아아악-!

까아아아아아아악-!

까아아아아아아악-!

이 거리에 있는 나도 머리가 울릴 정도였다.

텐티아 경이 일순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그녀의 면갑 아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순식간에 타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불의 창’을 만들어 던졌지만, 오크 주술사는 허공에 검은 깃털을 방패처럼 소용돌이치게 해 막아냈다.

그리고 놈이 텐티아 경을 향해서 ‘충격 파도’ 주문을 사용했다.

파괴술과 영체술의 경계에 선 그 주문은 갑옷을 뚫고 안에 있는 사람을 공격한다는 기괴한 능력을 자랑했다.

반투명한 검은 기운과 깃털이 소용돌이치고, 텐티아 경이 붕 떠올라 10m도 넘게 날아서 바닥을 굴렀다.

* * *

발렌시아누스는 뒤쪽에서 덤벼 오는 침식자들은 생각지도 않고 달려가 텐티아를 부축했다.

미래의 소드 마스터는 손가락 하나도 조심해야 했다.

“경! 괜찮은가?”

“전하. 예.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후퇴하는 게 어떤가?”

“예. 전하. 시간은 충분히 번 거 같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남은 건 자존심의 문제뿐입니다.”

텐티아는 면갑을 올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붉은 눈이 그를 꿰뚫어 보고, 발렌시아누스는 일순 서늘한 해방감을 느꼈다.

“전하. 이번에 돌진하면 그때는 뚫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텐티아는 늠름하게 웃으며 다시 일어나 검을 쳐들었다.

“전하께 그 영광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녀는 덤벼드는 침식자 둘을 베어 죽였고, 발렌시아누스는 당황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하. 한 번만 더 묻겠습니다. 기사다운 일을 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는 텐티아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후퇴할 때 홀로 적을 향해 달려가 위험을 무릅쓰고 적장의 목을 베는 영광이 탐나지 않으십니까?”

그 말은 이미 내려놓은 걸 되돌아보게 했으니까.

“그 배 위에서 말씀드렸지요. 전하는 기사답지는 않으셨지만 대공다우셨다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전하가 뼛속까지 악인은 아니라는 걸요. 저처럼 일신의 영달과 영광만을 위해 삶을 불태울 수 없는 신분이라는 걸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고 뜨겁게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한 번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거 같아서.

“전하. 이곳에 있는 건 저와 전하뿐입니다. 부디 전하께서 하고 싶으신 데로 결정하십시오.”

그게 얼마나 즐거운지 알아서.

그는 가장 충성스럽고 기사다운 기사에게, 유혹당하고 만 것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어울리지 않게 늠름하게 외쳤다.

“저 괴물의 목을 베고 개선하도록 하지.”

대공과 기사가 적진으로 돌격했다.

발렌시아누스는 ‘불의 창’과 ‘화염 파도’를 쏘아내며 침식자들의 정신 파동을 방해했고, 텐티아는 난전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뚫었다.

“지금입니다! 전하!”

그 용맹에 일순 오크 주술사가 당황하며 침식자 군대를 더더욱 일으키려 긴 캐스팅을 시작한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외쳤다.

“아니마!”

신발 아래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오고, 그 몸이 15m 거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쏘아져 나갔다.

탁, 타앗!

그는 침식자 오크의 머리통 위를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달려 나갔고, 오크 주술사의 목을 향해 마나 블레이드 타오르는 검을 내리쳤다.

카앙!

주술사가 해골과 사슴뿔로 장식한 지팡이를 들어 발렌시아누스의 검을 막았다.

녹색 안개와 검은 깃털이 소용돌이치며 마나 블레이드와 불길을 밀어냈다.

오크 주술사가 수천 개의 입에서 동시에 말하는 듯 외쳤다.

“너! 솔레타라스의 후예야! 네가 이번에도 우리를 방해하는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오크 주술사의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오크 주술사의 붉은 눈 너머에서 이 세상을 호시탐탐 주시하는 거대한 존재들과 그 존재들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침식자들의 기척을 읽었다.

그 거대한 존재감에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몇 번이고 방해해주마.”

늠름한 목소리가 그를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수백의 적을 뚫고 온 텐티아가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 타오르는 검을 들었다.

그녀는 백금 갑옷에 남은 무수한 생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푸욱!

‘화한’이 오크 주술사의 배를 찌르고, 주술사의 굵은 팔에서 힘이 빠졌다.

발렌시아누스는 허리를 비틀며 제국 검술을 펼쳤다.

제국 검술 1단계, 일체개고.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뜻이 담긴 증폭기였다.

일순 그의 몸 안에서 마나가 부풀어 오르며 근섬유 한 올 한 올을 보조하고, ‘흑루’가 맹렬히 휘둘러졌다.

츠카아아악!

오크 주술사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만세!”

텐티아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그 머리를 집어 들어 바쳤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와 광분하는 침식자들을 바라보며 그 머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적의 비명이 곧 환호성이니, 저 까마귀 울음소리가 감미롭게 들리는 건 그가 망나니여서는 아니었다.

“경. 이제 진짜 나가야 하네.”

텐티아는 몰려드는 침식자들을 보며 말했다.

“제가 뚫겠습니다. 바싹 붙으십시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저으며 텐티아 옆에 섰다.

“아니. 같이 뚫도록 하지.”

* * *

비가 내렸다.

마나를 머금은 불길은 물로 꺼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타오르는 건 아니었다.

“전하를 모셔라!”

“두 분이 나오셨다!”

“텐티아 경! 괜찮은가?”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는 어떻게 뚫고 나왔는지 모를 침식자들의 파도를 떠올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달궈진 갑옷과 몸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흐흐.”

“전하.”

사제의 축복을 받은 기사와 종자들이 침식자 잔당을 해치우기 위해 숲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헬레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포위망을 구축하고, 사제들을 보호하고,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무척 즐거워 보였다.

텐티아는 투구를 벗고 비를 맞았다.

갑옷 안에 갇혀 있던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늠름한 얼굴에 유쾌한 피로감이 어려 있었다.

기사 중의 기사, 목숨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기사, 텐티아다웠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속내를 알 수 없던 소년 대공이 유쾌하게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지은 미소에는 조금의 비릿함이나 씁쓸함도 없었고, 치열한 순간을 떠올리는 듯한 눈빛 역시 생기가 넘쳤다.

텐티아는 갑옷을 철거덕 거리며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에게 오크 주술사의 머리를 쥐여 주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전하.”

“경. 이제 단둘이 아니지 않은가?”

“마무리까지 해 주셔야 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황금빛 눈동자가 보기 좋게 휘었다.

“인정하지. 기사다움이란 참으로 즐겁더군. 아무런 생각도 할 거 없이, 눈앞의 적을 베고 또 베고……. 나도 그렇게 단순하고 뜨겁게 살고 싶었네.”

그럴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는 비에 젖은 머리가 앞으로 내려오지 않게 쓸어 넘겼다.

유쾌하고도 무심해 보이도록.

“경이 내게 겪게 해 준 기사다움. 절대로 잊지 않겠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의 손에 오크 주술사의 머리를 넘겨주고, 그녀의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텐티아 경이 오크 주술사를 잡았다!”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의 비인간적인 눈을, 핼쑥한 뺨과 하얀 제복을 바라보았다.

이게 그의 선택이라면, 이제는 기사로서 따라야 했다.

그의 주군은 스스로 영광되기보다는, 영광된 기사를 거느리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지금 무엇보다도 텐티아를 기쁘고 또 서글프게 만드는 건, 발렌시아누스가 기사다움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텐티아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와아아아아아!”

“텐티아 경 만세!”

“텐티아 경이 침식자를 토벌하셨다.”

자신이 받을 수 있던 함성을 남에게 돌린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어떤 감정과 어떤 충성과 어떤 기억이, 사람을 저렇게 초연하고 아릿하게 만드는가.

그게 못내 궁금하면서도, 알면 안 될 거 같아 두려웠다.

그저 그의 곁을 지키며, 한 조각의 영광이라도 더 가져갈 수 있게 돕고 싶을 뿐이었다.

* * *

붉은 성의 테라스에서 발렌시아누스와 제스터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대의 딸이 내 목숨과 2백 명의 병사를 구했네.”

“이리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 정도는 할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가?”

제스터는 흐뭇하니 웃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도 이제 다섯 합 이상은 못 상대하리라고요. 게다가 대공 전하의 목숨을 구하고 침식자까지 베었다니, 그야말로 기사다웠습니다. 정신 파동 맞고 쓰러진 저보다 훨씬 더 낫군요.”

발렌시아누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허전하고 서운하지 않은가?”

“자식이 제 손안을 떠났다는 게 시원섭섭하지 않은 부모는 없지요. 하지만 자신보다 나은 자식을 길러냈다는 것만큼 보람찬 일도 없습니다. 전하도 언젠가는 아시게 될 겁니다.”

제스터가 감정을 갈무리하며 담담히 말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떠나보냈군.”

제스터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 시골에서는 제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이상은 배우기 힘들지요. 수도 검술 아카데미에는 약해빠진 모지리들만 가득하지만, 그래도 4대 기사단은 다르니까요. 게다가 거기 들어가면 황제 폐하를 섬길 수 있잖습니까? 봉신 기사로서 아래를 보며 영민들을 챙기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가신 기사로서 위를 보며 폐하를 섬기는 건 더더욱 보람찬 일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군.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나? 너는 더 거물이 되라고.”

제스터가 피식 웃었다.

“제가 들어도 핑계로 들릴 겁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가능성이 어쩌고 해 봐야 결국 하는 짓은 열다섯 살짜리 애를 혼자서 수도로 보내는 거였습니다.”

“원망받으리라는 생각은 안 했나?”

발렌시아누스의 물음에 제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모든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는 법입니다. 자유를 주면 외로워하고, 싸고돌면 답답해하지요. 그리고 한 마흔쯤 되어서 자기도 애 하나쯤 키워 보고 나면, 그냥 자연스럽게 아는 겁니다. 원망을 받아주는 것도 내 일이었구나, 하고요.”

“위험한 말이지만, 맞는 말이로군.”

발렌시아누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담쟁이가 가득 뒤덮은 발코니 아래쪽을 향해 말했다.

“경. 그렇다는군.”

일순 제스터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텐티아를 꼭 닮은 경련이었다.

“……전하.”

“우연일세.”

“왜 수도 사람들이 전하를 망나니라 부르는지 알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방으로 올려 주게나. 둘이나 셋이서 이야기 좀 하고.”

제스터가 한 방 먹었다는 듯 웃고, 발렌시아누스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다시 영지를 물려주겠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할 생각도 말게. 그녀는 내 기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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