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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52화 (16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2화

(152)

가로수들이 연두색 잎을 녹색으로 바꾸는 싱그러운 늦봄, 대제국의 수도 솔레타라온에서는 그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소문이 맴돌았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막 들어온 햇보리를 경매할 준비를 하는 시장에서도, 술과 과제로 젊음을 불태우는 젊은이들이 가득한 배움의 거리에서도.

“알다마다. 밀과 보리와 함께 전해져 온 이야기 아닌가?”

주머니가 텅 비어버린 자들과 두둑해진 자들이 똑같이 ‘내일 다시 와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는 홍등가에서도, 오래된 오명을 허물처럼 벗고 다시 태어나려 하는 빈민가에서도.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최근 중부 전체를 순회했다더군. 와이번도 타지 않고 매일같이 그곳의 기사들과 말을 몰아 가면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 위태롭고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사내의 행보를 입에 담았다.

“그런데…… 순회한 거 가지고 왜들 그렇게 떠드는 건가?”

“이 사람아. 지금 순회가 문제가 아니잖은가!”

그런 와중에, 한 상가에서 일하는 짐꾼은 고된 일과를 마치고 술집에서 맥주를 들이켜며 다소 눈치 없는 질문을 던졌고, 동료 짐꾼들은 별 멍청한 소리 다 하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짐꾼을 쏘아보았다.

짐꾼은 다소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동료들에게 항변했다.

“자네들도 황제 폐하가 곧 지방 영주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하실 건 알잖나?”

“그걸 누가 모르나.”

“아무리 우리가 못 배워먹은 놈들이라도 상단에서 일하고, 눈과 귀가 있는 법인데.”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짐꾼은 자문자답하듯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때 중부의 봉신들도 부르지 않겠나? 그걸 한두 달 앞두고 제 혈육을 보내 한껏 기를 세워주는 일 정도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거 없잖은가?”

동료들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며 기겁했다.

“이런 무식한 자를 보았나?”

“……자네는 귀머거리에 소경인가 보군.”

짐꾼은 또다시 내심 당황했고, 그가 방금 한 말을 떠올리며 오해의 소지가 있을 만한 부분을 수정했다.

“물론 그 발렌시아누스를 만나는 게 기가 살 만한 일은 아니지. 되려 채찍질을 가했다고 해야 마땅할 거야.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에 지주 기사들과 함께 술과 고기와 시골 처녀들로 가득한 연회를 벌였음도 분명히 비난받아야 할 일이지.”

그러나 그의 발언은 더더욱 싸늘한 시선을 불러모을 뿐이었다.

“……이 친구 정말 모르나 보군.”

“그가 중부를 돌며 향사, 지주 기사, 남작들과 무슨 거래를 했는지 모르나?”

“거래라고……?”

중부의 특산물은 막대한 양의 곡식이었다.

당장 그와 동료들이 온종일 옮긴 밀과 보리도 중부에서 모여든 것이었다.

짐꾼이라고는 하나, 상단에서 일하는 사내는 거래라는 말을 듣자마자 발렌시아누스가 중부의 지주들과 곡식을 거래했음을 쉽게 연상할 수 있었다.

“황가에서 곡식을 사들인 건가? 얼마나 사들였기에 그런가?”

짐꾼이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음을 알아챈 동료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온갖 잡지식에 능통한 한 동료는 연초 파이프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입을 열었다.

“당장 사들인 물량만 해도 4할에 달하고, 가을분은 7할을 사들였다네.”

“!”

짐꾼은 한 모금 들이켰던 맥주를 입에서 주르륵 흘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대체 그 물량을 어떻게 운송, 아니. 왜?”

그들이 일하는 상단도 궁정 귀족이 소유한 거대 상단이었지만, 그들이 다루는 물량은 전체 물량의 3%대였다.

황실에서 소유한 거대 상단들도 제각각 다루는 물량이 8~10%를 넘지 못하는 판에, 40%, 70%를 사들였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물레방앗간 길드 등을 이용해 곡식 시장을 통제하고 있는 황실이 ‘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황실이라도 그 막대한 대금을 ‘어떻게’ 치렀다는 말인가?

……그리고 개망나니 발렌시아누스가 대체 무슨 악랄한 방법으로 그 대금을 회수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온갖 뒷말이 나오는 거라네.”

“으음.”

짐꾼은 동료의 파이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동료는 쓰게 웃으며 단조로이 말했다.

“춘궁기에 고리대금을 할 수도 있겠고, 중간 상인들에게 납품가를 올려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게 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장사를 하려 산 게 아니라 죄다 북부에 내다 바치려 하는 걸 수도 있겠지. 황제 폐하는 북부만 있으면 제국이 안전할 줄 아시니까.”

짐꾼은 동료의 쓴웃음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눈치도 없는 소리를 했군. 하여간 그 망나니 놈은 정말 온종일 우리 괴롭히는 생각만 하고 산다니까.”

* * *

“잘했느니라!”

황제의 옥음이 넓은 집무실에 낭랑하게 울렸다.

제이릴리스는 그 석류처럼 붉은 입술을 유쾌하게 끌어 올리며 나를 맞아주었다.

노란 눈에 솔직한 기쁨이 황금 물처럼 차올랐다.

한 달 만에 본 그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 흐르듯 말했다.

“폐하의 봉신들은 모두 황족의 권위를 존중할 줄 알았고, 한 지방의 영주로서 책임감이 강했으며, 문무를 겸비한 초인들이었사옵니다. 또한 세 번의 그린스킨 토벌은 제가 아니라 헬레나 대공의 공이옵니다.”

마지막 말은 약속대로 헬레나를 띄워주기 위한 말인 동시에, 내가 너무 유능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말이었다.

“헬레나 대공의?”

“그녀의 전술과 전략은 가히 천재적이었사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끝난 다음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사옵니다. 소신이 한 일이라고는 연기 뿜는 막대처럼 가만히 서 있던 게 전부이옵니다.”

물론 제이릴리스가 이걸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내가 군권에 욕심이 없음은 확실히 드러낼 수 있을 거다.

“그런가. 황동기사단장에게 그녀가 매일 같이 밤늦게까지 남아 전술 전략을 공부하고, 워게임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 노력이 배신하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예상대로 제이릴리스는 나를 향하던 황금빛 눈동자를 옆으로 돌려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나를 보며 머리 쓰는 게 귀엽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던 건 분명히 환각일 거다.

……그렇고말고.

제이릴리스가 나른하고도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헬레나. 짐이 묻겠다. 그대는 짐의 첨병이 되어 적을 파고들고 유린할 수 있는가?”

“예. 폐하!”

“그대는 하늘에서, 바다에서, 대지에서, 산에서, 늪에서, 성벽 위와 아래에서 싸울 수 있는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슬쩍 옆을 보니 헬레나의 얼굴색은 긴장과 흥분으로 흰색과 붉은색을 오가고 있었다.

풍성하고 화사한 금발은 황제 앞이라며 질끈 묶었고, 황갈색 바탕에 적색 무늬가 들어간 황동기사단의 제복에는 주름 하나 없었으며, 장교들이 평시에 애용하는 긴 검은 가죽 구두는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만큼 반질반질한 윤기가 났다.

그녀의 붉은 눈에는 마치 표면에 흰 재가 끼기 시작한 숯 같은 열기가 일렁였다.

……대체 이 누나는 그 진창 같은 전장이 뭐가 좋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그대가 그대의 점령지를 안정시키고, 그대가 정복한 도시의 사람들에게서 충성을 받아낼 힘이 있다면, 짐이 그대를 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헬레나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 잠시 균열이 어렸다.

그녀는 회귀 전에도 적과 적의 도시를 초토화한 뒤 다음 적을 향해 내달리는 맹장이었지, 점령지를 안정시키는 숙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이릴리스는 그걸 예견하고 있던 듯, 낭랑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하긴, 안목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면 저 가학적인 눈매와 야심 넘치는 붉은 눈동자를 보고 점령지 안정에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다.

“아, 하하.”

헬레나는 자신이 놀림당했다는 걸 알아챘지만, 황제가 자신을 놀렸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는 모르는 거 같았다.

그녀가 전쟁의 여신 같은 얼굴을 하고 어색하게 웃고 있자니,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난 전투의 기억을 잊지 말아라.”

네 손가락을 덮은 관절반지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 배운 것들이 다시 필요하게 될 것이다.”

“!”

헬레나의 눈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눈앞에서 세 번째 황족이 출세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고로 첫 번째는 나고, 두 번째는 세레라지에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곧 명령서가 내려갈 것이다.”

제이릴리스는 달콤한 축객령을 선물했고, 헬레나는 절도 있는 경례를 올리고 뒷걸음질로 집무실을 나섰다.

제이릴리스가 피식하고 웃었고, 다시 한번 헬레나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다음에 만나면 기사단 소속은 저렇게 물러날 필요가 없다고 알려줘야겠다.

신하가 황제에게 무엄하게 뒤통수와 엉덩이를 보일 수 없어서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건데, 기사단 소속은 형식적으로나마 봉신 관계라서 훨씬 자유롭거든.

* * *

제이릴리스는 잠시 헬레나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큼지막한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약이다.”

“예?”

“용찬 의식의 부작용을 억누르느라 몸이 계속 망가지고 있구나. 생조술사들이 만든 귀한 단이니 매일 하나씩 챙겨 먹도록 해라.”

상자에는 붉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멋들어진 글씨체로 ‘영생’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친.

이 단은 상아탑 생조술사들만 만들 수 있는 단인데, 서쪽 어느 왕국의 왕이 제 왕국 절반과 열 개의 단을 바꾼 적이 있을 정도의 효능을 자랑했다.

아무리 제이릴리스라고 해도 이 정도 양을 쉽게 얻어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깊게 고개 숙이는 동시에 그 미묘한 어감을 분석했다.

‘망가지고 있다고 들었다.’가 아니라, ‘망가지고 있구나.’였다.

방금 보며 알아챘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은화와 금화는…… 굳이 짐이 나서서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을 거 같구나.”

최근에 또 마차 한 대가 들어왔을 거다.

나는 얼굴에 백 장 철판을 깔고 그 말을 받았다.

“예. 폐하. 소신의 앞가림은 소신이 알아서 하겠사옵니다.”

황제가 잠시 이걸 듣고 있어도 되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넘어가자꾸나. 짐이 부정부패를 죄악으로 아는 사람도 아니니.”

“감사하옵니다.”

“올 사람을 챙겼으니, 이제 안 올 사람을 내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나는 작년에 플라니티에스와 프로이하이트라는 두 후작 가문과 다소 거친 만남을 거쳤고, 그들과 깊숙이 엮였다.

플라니티에스 후작이 사생아를 통해 부린 수작을 간파했고, 용을 이용해 제이릴리스를 죽이려 했던 전 프로이하이트 후작을 죽이고 그의 막내딸을 새 후작으로 만든 것이다.

당연히 그 둘은 제이릴리스에게 충성 맹세를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올해 초에는 북부 대공인 세베릭에게 곡식을 지원해 주며 우정을 다졌고, 근 한 달간은 중부의 남작가와 기사령들을 순회하며 크고 작은 분쟁과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즉, 충성 맹세를 요구했을 때 분위기를 잡아 줄 지지 기반을 모을 만큼 모았다는 뜻이었다.

“실로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우리 편이 되지 않을 자라면 살려둘 필요가 없사옵니다.”

제이릴리스는 내 잔혹한 아부에 흡족하니 웃었다.

“역시 그대는 짐의 마음을 이해하는구나. 실로 속이 트이는 기분이다. 짐은 대영주들에게 충성맹세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전에, 거절할 게 뻔한 놈들을 몇 베어 불순한 자들의 기강을 잡으려 한다. 이 명단을 보고 누가 좋을지 말해 보아라.”

그녀가 책상 위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곳에는 백작가와 후작가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백상아리’ 아세노르타, ‘붉은 황소’ 자카리가이스, ‘기는 용’ 헬라임.

나는 회귀 전 귀족 연합에서 한가락 날리던 가문들을 보며 침음성을 흘리다, 한 가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레모리우스. 어떠시옵니까?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장 달려가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제이릴리스가 황금색 눈을 가늘게 떴다.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내려오는 모습이 꼭 석양 같았다.

“검은 벽. 그레모리우스라. 그래. 절대 짐에게 충성하지 않을 자로다. 짐이 이 자의 여동생과 누나와 조카들을 모두 베었지. 짐의 즉위 전에도 황태자파를 지지하며 몇 번이나 암살자를 보내왔는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하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대가 혼자 하겠다는 듯 들리는데? 가능하겠는가? 놈의 기사들은 강력하고, 놈의 성은 천혜의 요새다. 조심성이 많은 자라 끌어내기도 힘들 것이다.”

나는 회귀 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앉아만 계신다면 소신이 그레모리우스의 목을 가져오겠사옵니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바로 저세상으로 보내버릴 방법이 있었다.

물론 그 방법을 쓰면 정치적 후폭풍은 따라오겠지만, 그건 언제나 그랬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실력을 의심하고 나를 걱정했다.

“정말인가? 차라리 짐과 함께-.”

물론 그 찡그린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찡그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단호한 어조로 그녀에게 확신을 주었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께서 납시신다면 놈은 필시 병환을 빌미 삼아 거북이처럼 숨어 버릴 것이옵니다.”

그제야 제이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책상 위의 ‘영생’을 내 쪽으로 한 번 더 밀었다.

“……챙겨 먹도록 하라. 방법은 묻지 않겠다. 이제 궁금하지도 않구나. 그러나 그대가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소신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폐하를 따르는 것이옵니다.”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돈은 이제 많으니, 장비부터 맞출 생각이었다.

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잠시 붙들었다.

“수도에 기이한 소문이 도는 듯한데, 그대가 의도한 것인가?”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폐하.”

“그런가? 재무대신을 불러 물어봐야겠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또 악명이 하나 늘었나 보다.

별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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