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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53화 (169/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3화

(153)

나는 별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영생’ 한 알을 까 먹었다.

영생은 사람 눈알만 한 크기에 약간의 탄력이 있는 붉은 구슬이었는데, 너무 단단하고 질겨 입 안에서 씹을 수는 없었지만,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르륵 녹아내렸다.

“으흐으…….”

불덩이 같은 게 몸 안으로 들어온 열기가 느껴졌다.

‘화정’을 먹었을 때와는 달리, 몸 자체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루디는 내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는 걸 보고 기겁했다.

“발렌 님. 괜찮으세요? 이거 한 번에 하나 먹어도 되는 게 맞나요?”

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쾌한데?”

화정 때는 몸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기분이었지만, 이번에는 몸 전체가 불로 벼려지는 기분이었다.

땀을 흘릴 정도로 몸을 푼 듯 팔다리가 가벼웠다.

용찬 의식을 한 뒤로 어딘가 불량스러웠던 몸이 다시 단단히 조여진 거 같았다.

이런 단을 27개나 받았으니 한동안 몸을 사릴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이러다 이번 생에도 경지에 못 오르는 건 아니겠지?

“일찍 자자. 내일은 오랜만에 쇼핑이나 하러 가고 싶네.”

루디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색 앞머리 아래 드리워진 녹색 눈에는 물오른 초목처럼 생기가 넘쳤다.

“네. 발렌 님. 저는 발렌 님과 함께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요.”

그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그런데 오늘 또 장기 임무 받아오셨다면서요. 한 달 만에 돌아와 놓고 바로 또 나가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골병드세요. 며칠이라도 쉬시는 게 어떠세요?”

나 역시 조금 늘어질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한 달 내내 말 위에서 살다시피 했더니 골반이 아파서 앉기도 서기도 힘들었다.

텐티아 경도 오늘은 훈련을 하지 않고 바로 관사로 늘어갔을 정도다.

하지만 이건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임무였다.

올해 안에 대영주들에게 충성맹세를 받으려면, 빠르게 반대파를 척결하고 칙령을 내려 그들을 수도로 불러야 했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약을 27개나 받았으니 이 정도 일은 해야지.”

“……다시 성실해진 것 같기도 하시네요. 보기 좋으세요.”

“……얼마 전에 뇌물을 마차로 받은 걸 또 보신 모양이야.”

“…….”

할 말을 잃은 루디가 입을 쩍 벌렸다.

나는 굿나잇 인사를 하고 재빨리 내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 * *

회귀 전에 상아탑은 멸망했다.

내가 제정신을 차리고 오래지 않아 상아탑 원로들이 죄다 침식자가 되어버렸고, 상아탑 자치구는 마경이 몇 개나 열린 마굴이 되었다.

제이릴리스는 구조나 수색, 마도서 회수를 죄다 포기하고 전투마법사를 불러 바깥에서부터 주문과 마도구, 스크롤을 미친 듯 쏟아부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이물들과 침식자들을 상당수 해치운 다음에 들어갔는데도 기사가 쉰 명이 넘게 죽었다.

제이릴리스가 온갖 마법과 검술을 뽐내며 선두에 섰다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인명 피해였다.

물론 이번 삶에서는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울그림의 펜촉’은 여전히 황실에 머물렀고, 고대 엘프어 마도서도 황실로 옮겨 온 뒤 엄중히 봉인되거나 죄다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즉, 이번 생에서는 돈만 있으면 준수한 품질의 마도구를 원하는 만큼 구할 수 있었다.

회귀 전에 상아탑이 증발해서 대륙 전체의 마법 수준이 5백 년쯤 후퇴했고, 기사들의 마법 무구를 만들기 위해서 제이릴리스가 직접 회로도를 그린 적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무척 다행이었다.

“신속의 팔찌는 금화 300닢이고, 은마력(隱魔力)의 반지는 금화 350닢이에요.”

제값만 주면 마도구를 살 수 있다는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않게 된 40년을 기억하고 있다.

“아. 역장 반지요? 걔는 조금 더 비싸요. 금화 700닢?”

그러니까 저 액수를 듣고 벌벌 떨 필요도, 이를 부딪칠 필요도, 식은땀을 흘릴 필요도 없었다.

“왜 그러세요?”

……나는 세레라지에의 형식적인 소개장을 받았고, 루디, 텐티아 경과 함께 상아탑에 처음으로 손님으로서 왔다.

어느 대귀족 손님을 그렇게 대하듯 상아탑은 안내와 설명을 맡기기 위한 마법사 하나를 붙여 주었고, 나는 안면이 있던 니아르의 안내를 받아 마도구 쇼핑을 시작했다.

상아탑 마도구는 그 품질만큼 비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부정부패로 끌어모은 재물을 탕진할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래도.

“니아르. 무슨 주술 회로를 새겼으면 반지 하나가 성채 하나 지을 값이 나오지?”

끝단이 붉은 크림색 긴 머리와 붉은색과 크림색이 섞인 눈동자를 가진 마법사.

게스타르테의 제자이자 세레라지에의 후배.

그녀는 무심한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 올리며 단조롭고도 오만하게 웃었다.

엿이나 먹으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성채 하나에 들어가는 주술 회로를 반지 하나에 새겼으니까요? 이거 진짜 귀한 기술이에요. 언령만으로 인첸트하는 건 상아탑 마법사들만 가능하다니까요?”

“은마력이 꽤 고위 주문인 건 알고 있고, 역장이 아주아주 더러운 주문인 것도 알고 있는데, 금화를 700개나 받아먹을 만큼 대단한가?”

니아르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역장 반지를 들고 뭐라 길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복잡한 선과 도형, 주문이 새겨진 회로도가 허공에 환영처럼 떠올랐다.

반지 안팎을 둘러싸고 있는 회로도가 얼마나 빡빡한지, 환영은 반지 모양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니아르가 거기 쓰인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만큼 환영을 확대하자, 환영은 어지간한 방도 가득 채울 만큼 커졌다.

‘역장’ 주술 회로는 그렇게 키워 놔야 거기 쓰인 엘프어와 수식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복잡하고 섬세했다.

니아르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렇게 더러운 주문인 줄도 알고 계셨어요?”

평소였으면 말을 삼가라, 이 무슨 무례냐! 라고 말했을 텐티아 경이나 루디도 입만 쩍 벌리고 탄성만 흘렸다.

니아르가 환영을 흩으며 말했다.

어린 소녀의 얼굴에 지독한 피로감이 깃들어 있었다.

10년 동안 만든 조각상을 보고, 이거 석고 틀로 찍어내거나 대지 마법으로 만든 것과 뭐가 다르냐는 질문을 들은 장인 같았다.

“역장은 진짜 진짜 만들기 힘든 마도구예요. 마법 거리에서 파는 건 완성된 주문을 담아두는 식이라 10번쯤 쓰면 끝이라는 걸 아시잖아요. 얘는 자체적으로 대기 중 마나를 흡수해서 발동을 보조하기 때문에 사용자의 마나가 많을 필요도 없어요.”

대공의 위엄이 있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내가 지금껏 상아탑에서 강탈한 마총과 마도서 값만 해도 금화 수천 닢은 나갈 거다.

나는 텐티아 경에게 손을 내밀어 가죽 자루를 받았다.

“역장 반지, 은마력 반지, 신속의 팔찌 하나씩만 줘.”

니아르가 물었다.

“신속의 팔찌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뭐가 있는데?”

“바람 마법 기반으로 하는 게 기본이고요, 생조 전림, 그러니까 혈조술과 전기 마법을 이용해서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있어요. 시간 가속 계열도 있기는 있는데, 그건 비매품이예요.”

그럼 대체 왜 이야기한 거냐? 하는 의문을 삼키며, 나는 텐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경이 듣기에는 어떤 게 제일인 거 같은가?”

* * *

텐티아 경은 그 붉은 눈동자로 루디를 흘깃하고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루디의 마도구 사용에 반대했던 이유는, 마도구에 의존해서 힘을 끌어내는 버릇이 들면 수련을 등한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나 제어라는 부분에서는 더더욱요.”

평범했던 그녀가 성인이 된 다음에 수련을 시작했음에도 마나 유저가 될 수 있던 건, 텐티아 경의 가혹한 단련법도 한몫했다.

“그렇지.”

돈이 있었는데도 지금까지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마도구를 사주지 못했던 게 그래서였다.

몰래 사주려 했는데, 텐티아 경이 거의 나를 때려눕힐 기세로 말리더라고.

“이제 마나 유저가 되었으니 조금 더 여유 있는 시선으로 바라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생조 전림을 이용한 가속을 권유합니다. 그건 마법적인 작용이 직접 몸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마법으로 일으킨 전류가 근육을 적절히 자극해 가속하는 원리니까요.”

“으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니아르에게 물었다.

“같은 유형의 마도구를 두 개 끼는 건 위험하다고 알고 있는데, ‘생조 전림’과 ‘바람 축복’은 같은 유형인가?”

니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유형 분류는 현상이 아니라 과정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둘은 똑같이 육체를 가속시키지만, 다른 원리로 육체를 가속 시키니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럼 둘 다 주도록. 생조 전림은 돌격할 때 쓰고, 바람 축복은 후퇴할 때 쓰라고 하지.”

니아르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루디가 과분하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목소리를 내려깔며 말했다.

“루디. 와서 원하는 모양으로 골라. 어느 손가락에 낄지도 정하고. 역장이랑 은마력 하나씩. 가속 팔찌는 두 개 껴야 하니까 잘 정해.”

이번에는 제게 이런 돈을 쓰실 필요는~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저의를 알아차렸는지, 루디는 천사처럼 환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발렌 님. 감사히 쓰겠습니다.”

역장 반지는 두툼한 백금 몸통에 푸른 다이아몬드를 박아 만들었고, 은마력 반지는 제대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실반지였다.

생조 전림 가속 팔찌는 드레이크의 뼈와 은을 이용해 만들었고, 바람 축복 가속 팔찌는 영구보존 처리한 엔트의 싹으로 만들었다.

바람 축복 가속 팔찌와 은마력 반지는 들꽃 같은 인상의 루디와 잘 어울렸고, 생조 전림 가속 팔찌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역장 반지는 20대 시녀가 아니라 50대 기사에게 어울릴 듯 투박했고, 최대한 줄였는데도 너무 커서 왼손 엄지에 끼워야 했다.

루디의 하얀 손에 건틀릿 위에나 끼는 굵은 반지가 끼워진 걸 보며 텐티아 경은 결국 웃음을 흘렸고, 루디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다음에는 더 얇은 반지로 사 줘야겠다.

그런 물건이 나온다면.

상아탑을 나오던 와중 루디가 물었다.

“발렌 님. 다해서 얼마였어요?”

나는 머뭇거리다 답했다.

“금화 1750닢?”

루디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녹색 눈동자가 수축하며 파르르 떨렸다.

“제 145년 치 연봉이네요.”

“하하.”

“여전히 과분하지만…… 그렇게 느끼지 않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텐티아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태도다. 시녀. 우리 기사들 역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녀의 전신 갑옷은, 굳이 값을 매기자면, 어지간한 남작령을 통째로 팔아도 못 사는 물건이었다.

수십 명의 마법사와 장인들이 자기 전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새긴 주술 회로가 가득 붙어있었으니까.

텐티아 경은 루디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가벼워진 몸에 적응하는 걸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발렌 전하. 이제 곧 ‘검은 벽’ 그레모리우스 후작령에 가실 텐데, 어째서 지금 그녀에게 저런 마도구를 사주신 겁니까?”

그 늠름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번 출궁에 동행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저와 세레라지에 전하, 그 외 행정관 몇만 대동하신다고요. 물론 저는 전하와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게 그녀에게 일종의 유품이나 상속을 남기신 거라면, 확실히 마음을 전하시는 게…….”

전하와 함께 죽을, 이라는 문장을 내뱉는 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버지의 진심도 알았으니, 이제 주군의 뜻을 받드는 데에 있어 한 인간으로서의 어떠한 아쉬움도 없다는 거 같았다.

나는 그 충심에 몸을 떨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부탁할 게 있어서야. 경도, 나도, 세레라지에 누님도 못할 일이지. 마차를 타고 와이번핏으로 가 있게. 루디와 함께 금방 합류하겠네.”

텐티아 경이 더더욱 불안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어디를 들리고 오실 생각이십니까?”

“함께 가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네.”

* * *

“개망나니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성자님을 다시 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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