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4화
(154)
내 계획에는 성자 마테오스나 홍의주교급 고위 성직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와이번을 타고 가는 만큼, 이미 경험이 있는 마테오스를 대동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았다.
물론 그는 이번에도 그 멋진 목소리가 쉬도록 비명을 내지르겠지만, 내가 비명을 내지르는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렇고말고.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나는 지난번 알첸베르사 수도원 사건 이후로 광명교에 완전히 ‘찍힌’ 상태였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아르고스 홍의주교와 말을 맞췄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 성자를 한 달도 넘게 납치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교회에서 좋지 않게 보는 와이번을 타고 담 안까지 날아온 뒤, 성자를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는 무례한 퍼포먼스까지 보였다.
그 후폭풍으로 작은 폭동이 일어나 황궁 앞까지 사람들이 몰려왔을 정도다.
이미 내가 파문당한 줄 아는 사람도 여럿일 거다.
따라서 나는 지금 대성당에 당당히 들어가서 성자를 만난 뒤, 함께 그레모리우스 후작령에 가자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근처만 가도 성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와 ‘형식적이라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주아주 고통스러운 고행’ 따위로 내 죄를 씻자고 게 뻔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성자가 나오게 해야 했다.
어제 황실 시종들을 시켜 편지를 보내 상황과 계획을 설명하고 나름의 언질을 주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마테오스가 순순히 나와 줄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광명교의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성자 마테오스는 무척이나 바쁜 몸이었다.
그는 본래라면 정화해도 죽을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고, 그 대가로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본의 아니게 침식된 사람들을 정화하고 있었다.
그는 한 달간 그레모리우스 후작령에 가는 건 고사하고, 그렇게 하자는 설득을 들어줄 시간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다소 파격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
뎅. 뎅. 뎅. 뎅…….
그가 수도 궁정 귀족들을 상대로 주관하는 특별 모금 미사가 끝나는 순간에 맞췄다.
귀족가의 시녀와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가며 제 주인과 아가씨, 도련님들을 모시려 했다.
루디는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섞였고, 잠시 바람을 쐬려 옆문으로 나간 마테오스 뒤로 따라 붙었다.
성자의 감각은 소드 마스터에 준했지만, 향초 향기, 귀족과 시녀들의 부산한 발소리, 오후의 종소리가 그의 후각과 청각을 과포화시킨 가운데 어디에나 있는 시녀 한 명을 주의 깊게 경계하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그 시녀가 훈련 받은 마나 유저고, 은마력 반지까지 끼고 있다면 더더욱.
“성자님! 죄송합니다!”
루디는 성자를 벌떡 들어올린 뒤 ‘바람 축복’ 반지와 ‘생조 전림’ 반지에 동시에 마나를 밀어 넣고 길모퉁이에서 기다리던 내게 나는 듯 달려왔다.
“발렌 대공! 또 나를 납치한 겁니까? 대공은 성직자를 납치하는 게 취미입니까?”
마테오스는 버둥거렸지만, 나름의 언질을 들은 바 있어 진심으로 반항하지는 않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홍의주교님을 납치감금추방하자는 의견은 아주 온난했습니다! 성자를 무슨 고양이 새끼 빼돌리듯 도둑질해 가는데,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단지 나를 보고 그 그윽하고도 강직한 얼굴을 마구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나는 실실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
“제가 밀수 연초 넉넉하게 넘겨 드렸잖습니까? 그 돈이면 몇 달간 이 일대에 굶은 자가 없을 텐데, 왜 이리 모금 행사에 집착하십니까?”
마테오스가 짙은 눈썹을 치켜 세우고, 깊은 눈에 의로운 분노를 번뜩이며 일갈했다.
“대공이 중부 곡식을 죄다 사들인 탓에 곡식값이 왕창 올랐습니다! 고아들과 과부들이 죄다 굶어 죽을 위기입니다. 자기 신민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는 황실이 어디 있습니까!”
“예?”
내가 곡식을 사들였다고?
그러고 보니 제이릴리스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다.
돌아와서 알아봐야겠네.
난 아무것도 모르니 어깨만 으쓱했다.
마테오스는 그걸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입을 쩍 벌리며 분노에 찬 주기도문을 외우려 했고, 나는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은 뒤 왼손 두 손가락을 마테오스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아각?!”
마테오스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본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강직하고 선 짙은 미남의 눈동자가 풀리는 모습은 그것대로 볼 만 했지만, 저 뒤에서 성기사들과 분노한 시민들이 달려오고 있었음으로, 나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으흐하하!”
복면을 뒤집어쓴 루디가 내 뒤에서 말을 몰며 참회 기도를 외우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광명이시여. 제가 당신의 아들께 씻을 수 없는 무례를 범했음을…….”
마테오스 역시 연민이라는 게 있는 인간이었다.
성자는 죄책감에 찬 시녀의 고운 목소리에, 다정하면서도 위엄 있게 답했다.
“어린 양이여. 사람을 죽이는 건 검이 아니라 사람이니, 휘둘러졌을 뿐인 그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광명이신 아버지를 대신해, 나 그대를 용서하니, 그대는 고개를 드십시……?”
그것도 잠시, 내가 말머리를 틀자 마테오스의 말이 일순 멎었다.
“……발렌 대공.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길 같은데.”
나는 유쾌하니 웃으며 답했다.
“그야 당연히 와이번핏 아니겠습니까?”
검은 성자의 입이 다시 열리고, 분노와 경악에 찬 문장이 쏟아져 나왔다.
“너! 이 뱀과 악마의 아들딸아! 옛것 같은 혼돈과 혼돈에 침식된 여식아! 광명의 주를 아버지를 둔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느냐? 그 끔찍한 날개와 흉악한 아가리, 8죄종의 산물로 가득한 짐승에 어찌 이 몸을 의탁할 수 있으랴!”
“성자님! 1분도 되지 않아 어린 양이 혼돈의 여식이 되는 겁니까?”
루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나는 거리가 떠나가라 웃어 재꼈다.
* * *
그레모리우스 가문이 수백 년 전 버려진 요새와 광산과 궁전들을 점령하기 전, 그 땅에는 왕성한 드워프 왕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하의 악마와 거대한 그린스킨 호드(Horde)가 드워프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광산 도시 중 하나였다.
첫 번째 그레모리우스는 그 광산 도시를 멸망시킨 그린스킨의 후예들을 물리쳤고, 지하의 악마를 죽였고, 선조들의 땅을 되찾으려 온 드워프들을 억류해 야금술(冶金術)과 축조술(築造術)을 배웠다.
그레모리우스들은 그 뒤로도 많은 침공을 받았지만, 드워프의 방법대로 쌓은 요새는 저 북부의 요새들에 버금가는 위용을 자랑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마르지 않는 샘을 등껍질 속에 가진 거북이처럼 살았다.
요새는 굳건하고, 광산은 깊었다.
이미 부유했기에 더 많은 걸 탐내지 않았고, 이미 안전했기에 상대를 위협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 대의 그레모리우스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베네치온 키멜리온 그레모리우스.
그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고 할아버지가 그랬듯, 아름다운 흑발 위로 검게 빛나는 흑철관을 쓴 대영주였다.
광산의 채산성과 요새 외벽의 두께만 신경 쓰며 우물 안 왕으로 살던 역대 영주들과 다르게, 그는 영지민들의 행복, 문화와 역사, 마법에 관심이 깊었다.
“무리하지 마라. 이번 달 목표는 전달의 80%다.”
“하오나 수익이……!”
“수익보다 중요한 건 내 영지민들의 건강이다.”
“……받들겠습니다.”
“드워프들이 쓰던 통로를 아직도 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안전을 고려하면 중측은 무리입니다. 그들의 기술력은 아직 저희로서는…….”
“버팀목을 대고 통로를 넓혀라. 아무리 진귀한 보석 광산이라 해도,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그 안을 기어다니는 걸 볼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이번 봄에는 우리도 축제를 열어 보자꾸나. 영지민들도 그날만큼은 돌가루를 씻고 멋들어진 정장과 화사한 드레스를 입을 수 있도록.”
“예! 해보지요!”
긴가민가하던 가신들과 봉신들도 오래지 않아 새 영주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새 영주는, 요새 안에서 그득한 황금에 둘러싸여 살다 그득한 황금에 둘러싸여 죽었던 역대 그레모리우스들보다, 훨씬 ‘따를 맛’이 나는 영주였다.
“우리 영주님은 고귀하고 현명한 분이시네.”
“덕분에 얼마나 살기 좋아졌는지 모르겠어.”
“취미도 고상하시지. 마법과 고어 해독이 어찌 보통 분이 가질 취미이신가?”
“역대 영주들은 광산과 황금에 틀어박혀서 더 깊게 파라고 채찍질을 하셨지. 역시 윗분은 일과 취미가 같으면 안 된다니까. 하하하하.”
그는 영지민들을 굴리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가졌고, 이종족 혼혈답게 나름의 성취를 거두었다.
“악마를 소환한 건 드워프들이었네. 더 깊이 파고들려는 욕심이 모든 걸 망친 거야.”
독학만으로 천여 년 전에 있던 기록을 해석해낼 정도였다.
그렇게 숫자로 셀 수 없는 행복이 늘어나던 영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 * *
“황제 폐하의 비라…….”
“부담스러우시다면 방계 친척분을 보내셔도.”
“후 자리는 안 비어있나?”
‘이참에 황실과 깊은 연을 맺고 밖으로 나가겠다. 언제까지 이 요새 안에서 버틸 수는 없어.’
그레이스의 혜안과 오랜 기록들은 그에게 머지않은 미래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근 100년 사이에 연중 마경 출몰 횟수가 거의 3배로 늘었다. 300년 전과 비교하면 10배가 넘어.’
시간이 흐르면 침식자와 마경은 점점 늘어날 것이고, 언젠가는 저 요새의 벽도 무너질 것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무수한 선조들은 자기 대에 그날이 오지만 않기를 바라며 버텼지만, 그는 달랐다.
‘나가야 한다. 안정적인 거점을 기반으로 공격적인 정책을 펼쳐야 해. 우리 혼자 이 안에서 살아남는 게 다가 아니야.’
그는 여동생과 누나를 보내 황실과 혈연을 맺었다.
“누나. 그레이아. 내 말 잘 들어. 반드시 둘이 사교계를 이끌어야 해. 주류 파벌에 들어가서 진취적인 바람을 일으켜. 황실, 대영주, 교회가 함께 나서야 침식자들과 맞설 수 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어.”
걱정과 달리 그의 두 육친은 잘 지냈다.
“세상에! 이렇게 알이 큰 다이아몬드가 있나요?”
“원하신다면 베센 영애께 선물드릴게요. 에이. 사양하지 마세요. 이 티아라도 어울리는 분과 함께하고 싶을 거예요.”
“저도 답례를 하고 싶은데, 바라시는 게 있을까요?”
“그럼. 이번에 제국 의회에서…….”
둘은 베네치온의 막대한 지원으로 사교계의 신성이, 신성에서 거물이 되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총명한 아들딸을 여럿 낳았고, 그들은 황태자의 최측근이 되었다.
“황태자 전하.”
“우리끼리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
“너희 남매들만큼은 언제나 믿을 수 있다.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말해 보아라. 내가 황제가 되면, 우리가 함께 제국을 이끌어 나가는 거다.”
“저는 외무를 맡고 싶습니다. 대귀족들과 협상하며 황실에 이익을 가져오고 싶습니다.”
“저는 궁정백이 되고 싶습니다! 수도의 휘어잡고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바치고 싶습니다.”
남매들은 제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 두 어머니는 베네치온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황태자와 남매들은 장성했고, 그들의 부친뻘 되는 연배의 베네치온 역시 품격 있는 미중년이 되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날, 누나와 동생에서 편지가 왔다.
[1황자파에 신성이 들어왔어.
14살. 궁정 마도 공방 지하실에서 살아 나온 애라고 해. 아직 상세한 정보는 없지만, 폐하를 빼닮았단다.
검도 마법에도 능해서 장례가 우려돼.]
어중간한 독이나 암살자로는 안 돼.
이미 한 명의 훌륭한 마검사야.
몇 번이나 보냈지만 다 실패했어.]
이에 베네치온은 답했다.
[그럼. 철가면의 검귀들을 보낼게.
혹시 다음 편지로는 이름을 알려줄 수 있어?
다시는 안 듣게 되겠지만, 그래도 둘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궁금해지네.]
그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제이릴리스.]
그 이름이 모든 걸 바꿨다.
몇 달 후, 베네치온은 제이릴리스의 손에 누나와 여동생과 조카들의 목이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 제이릴리스의 오빠가…… 내 영지에 온다고?”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 위로 흑철관을 쓰고 있었다.
눈빛만은 차갑게 가라앉은 채로.
“그래. 오라고 해라. 이 요새 가장 깊은 곳으로 놈을 안내해라. 기꺼이 맞아줄 것이다. 드워프들의 고문법이 얼마나 잔혹한지 알게 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