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6화
(156)
나는 마음씨 고약한 성자에게서 일단 눈을 떼고, 그레모리우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촉수와 뿔과 기괴한 팔다리가 돋아나기 시작한 그녀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봐도 7, 8명에 1명은 침식자였던 거 같았다.
그 역시 옷자락 안으로 감추고는 있지만, 손이 이상하게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아마 그의 복수심을 자극한 침식자들이, 그의 부하들도 ‘동료’가 되었음을 충분히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제정신인 거 같지?
지금쯤이면 변이하거나 녹아내려야 할 텐데.
“발렌?”
내가 말이 없자, 세레라지에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그레모리우스 후작이 침식된 세월을 되짚었다.
“세상!”
절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계산에 사소한 오류가 있었다.
그가 침식자와 거래를 한 건 맞지만, 아직은 제정신일 때였다.
완전 침식은 고사하고, 손 하나도 변이되지 않을 때였다.
마테오스라면 쉽게 그의 정신과 육체를 정화할 게 뻔했다.
그럼 죽일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도시에서 암약하는 침식자들을 몰아내고 도시를 구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
베네치온을 죽이고 제이릴리스를 지지해줄 새 후작을 앉히려고 온 거였다.
만약 내가 여기서 침식자들을 제압하는 걸 도와주고, 은혜를 입혔음을 강조하며 충성 맹세를 요구하면, 베네치온이 복수심을 굽혀 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있을 리가 없다.
그는 두 황비의 육친이자 황태자파의 최고 후원자였고, 계승서열이 20위 안에 드는 조카들이 넷이나 있었다.
그의 절절한 가족애가 기억 속에 선했다.
참담하게도, 내가 아주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텐티아 경과 세레라지에에게 말했다.
“베네치온 후작의 힘이 변별의 장막으로도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할 만큼 강력한 거 같아. 엄호해 줘. 용언의 불꽃으로 태워야겠어.”
참으로, 유감이었다.
“텐티아 경. 내 뒤로 바싹 붙어 주게. 후작이 침식자인 줄 모르는 병사와 기사들을 해치고 나아가야 해.”
그녀가 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전하.”
“세레라지에 누나. 성자님을 챙겨서 침식자들과 싸우는 걸 도와줘. 우리가 후작가 전체와 싸우려고 온 게 아니라, 베네치온 개인의 침식을 저지하려고 왔다는 걸 강조해야 해.”
세레라지에가 남색과 노란색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지금 나보고, 자기가 가진 힘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힘을 쓰기 위해 무릎 꿇고 구걸하기만 하는 데다가, 마법사들의 원수인 마녀 사냥꾼과 이단 심문관들의 충성을 받는 눈먼 자들의 우두머리를 도우라는 거니?”
나는 검을 뽑으며 상기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정확하게 이해했네. 역시 누나는 똑똑해.”
세레라지에가 새침한 눈을 흘기더니, 성자를 지팡이 끝으로 툭툭 쳐 일어나게 했다.
텐티아 경이 그 무례한 태도를 보고 ‘오- 주여.’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회랑에 가득한 침식자와 그와 엉켜 싸우는 기사,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난리 났네. 아주 발광을 하는구나.”
텐티아 경이 나를 돌아보았다.
“전하. 천박한 욕설은 기사의 도리도 대공의 도리도 아닙니다.”
“아니. 저기 봐. 진짜로 발광(發光)하고 있잖아.”
한 침식자 기사가 뚱뚱한 개구리처럼 부풀어 오른 뱃가죽을 환하게 빛내고 있었다.
텐티아 경이 그 빛이 움직이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저건 빛이 아닙니다.”
“그렇군.”
화아아아악!
그 발광체가 배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목으로, 목에서 볼로 올라오더니, 전방을 향해 부채꼴로 방사되었다.
“아아아악!”
흑철색 갑옷을 입고 침식자들과 맞서고 있던 중장보병 수십 명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빛은 마치 신성력이나 끓는 기름처럼 중장보병의 갑옷 틈을 파고들었고, 정예로운 병사들은 몇 초도 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옆에서는 바위 같은 갑각을 두른 침식자가 마차만 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회색 안개를 뿜어냈다.
마법사들이 바람을 일으켜 안개를 흩어내려 했지만, 바닥에 깔린 안개는 마치 슬라임처럼 스멀스멀 기어와 병사들의 몸을 굳혀버렸다.
끼이이이이이이!
한 침식자가 정신 파동을 터트렸다.
불길한 검보라색 파동이 회랑을 뒤흔들었다.
물론 이곳의 가장 발단 병사도 마나 유저인 만큼, 파동 한 방에 침식당하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진을 짜 버티던 병사들은 대거 비틀거렸고, 침식자들은 그 틈을 타 날뛰었다.
“아아아악!”
“끄아아악!”
거대한 손과 발이 휘둘러질 때마다 병사들은 즙을 짜고 남은 과일처럼 변했다.
나는 단조로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 우리는 저 틈을 해치고 돌격해야 하는군.”
높이가 12m에 폭이 15m에 달하는 넓은 회랑도 거대한 침식자들이 날뛰고 있다니 너무 좁아 보였다.
텐티아 경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안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검에 노란색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다.
“저 너머에 황제 폐하의 뜻과 불멸의 영광이 있으랴.”
나와 텐티아 경은 침식자들과 후작가 기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틈으로 뛰어들었다.
* * *
“세레라지에 대공.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십니까?”
“……입 다물지 않겠니? 신성력 냄새가 난단다.”
세레라지에는 잠시 고민하다 그렇게 답했다.
평소였으면 아무리 성직자가 거북해도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곳에 보이는 자들은 모두 적 아니면 잠재적인 적이었으며,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법관과 행정관은 기절한 지 오래였다.
마테오스는 그날 빈민가 근처에서 요란한 설전을 나누었던 마법사를 기억하며 옅게 웃었다.
“여전하시군요.”
그윽하고도 강직한 얼굴에 잠시 옛 추억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들고, 성자는 회랑에 가득한 침식자들과 후작을 챙겨 도망치기에 바쁜 고위 성직자들을 쏘아보았다.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몇몇이 보이지 않는구나. 이미 후작을 도주시키고 있겠지.”
“부끄럽군요. 교회의 법도가 세속에 저리도 지독하게 물들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의외로 상황은 순조로웠다.
초반에 잠시 혼란에 차 고전했다지만, 후작가의 정예로운 가병들은 빠르게 전열을 다듬었고, 침식자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 역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변이했고, 옛 동료들은 그것을 배신으로 여기며 분노를 불태웠다.
“죽어! 죽어! 죽어!”
예리함, 견고함 마법이 걸린 도끼창이 포물선을 그리며 침식자들의 발목을 노린다.
남은 성직자들이 걸어준 ‘신성한 무기’ 축복이 더해져 신성력으로 은은히 빛나는 도끼창은, 이신의 손길을 받아들인 괴물들의 발목을 부수고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럼 마나 블레이드를 두른 기사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부우웅-!
수십 년간 무예를 갈고 닦은 그들은 쓰러진 침식자가 발악하며 휘두른 손발과 촉수를 손쉽게 피했다.
푹, 푹, 사아아악!
그리고 눈에 장검을 찔러넣거나, 목을 벤 뒤 머리를 다져버리는 것이다.
침식자 하나가 하늘이 떠나가라 외치려 했다.
끼-!
!!
!
그러나 놈은 입만 벙긋거리며 당황할 뿐이었다.
후작가의 마법사들은 고위급 흡음 결계를 침식자의 주변에 펼쳐 정신 파동을 봉인해버렸다.
그들이 전격, 불덩이, 바람 칼날을 퍼부어 사지를 잘라놓으면, 어김없이 기사들이 달려갔다.
“그럭저럭 봐줄 만하구나.”
세레라지에는 상아탑 밖 출신 마법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평가를 해 주고, 후작가 마법사들에게 달려가는 다리 열여섯 달린 사족보행 사냥개를 흘겨보았다.
그들이 불꽃 화살을 날리고,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지만, 일순 침식자의 몸이 흐릿해지며 반쯤 허공에 녹아들었다.
“!”
마법사가 입을 쩍 벌리고, 불꽃 화살과 검이 허공을 갈랐다.
“충격 전격.”
침식자의 입이 넷으로 갈라지며 벌어지는 걸 본 세레라지에는 작게 중얼거렸다.
번쩍!
푸른 전류가 지팡이에서 탄환처럼 쏘아져 나가고, 직격당한 반투명 사냥개가 황소에 들이받힌 똥개처럼 날아가 회랑 바닥을 굴렀다.
“카르르륵!”
침식자 사냥개가 수십 개의 발로 바닥을 긁으며 다시 일어서고, 세레라지에는 지팡이로 바닥을 툭 내리쳤다.
“돌가시.”
퍽, 퍽, 퍽!
회랑 바닥에서 3m 길이로 암석과 금속이 섞인 가시가 솟구치고, 침식자의 몸이 꿰뚫렸다.
침식자가 다시 한번 몸을 반투명하게 바꾸려 했지만.
“충격 전격.”
번쩍!
그대로 가시 가득 돋은 바닥에 제차 구를 뿐이었다.
“……고맙소.”
후작가 마법사들이 세레라지에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의외로구나.”
세레라지에는 새침하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 * *
성자 마테오스는 그 모습을 보고 회랑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거니?”
세레라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한 손을 들며 일단 넘겼다.
그는 신성력 고갈을 각오하고 도시 전체를 ‘변별의 장막’으로 쓸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이 사화산 저택 정도만 쓸어달라고 했지만, 그러면 안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테오스는 제 기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성자였고, 그의 사소한 불길함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그는 사화산 중턱에 서서 보물의 도시 키멜리온을 내려다보았다.
산마다 요새가, 골짜기마다 광산이 들어선 인구 20만의 검은 도시였다.
“하아.”
이윽고 마테오스의 그윽한 검은 눈동자에 깊은 한탄이 들어찼다.
이례적으로 그 강건한 몸이 휘청였다.
적어도 100군데는 넘을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끔찍한 옛것들의 기운이 갱도에서, 요새에서, 시가지에서 느껴졌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설마 이것도?’
그가 그의 누이동생과 짜고, 도시 하나에 본보기를 보일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그가 이미 이곳에 침식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걸 알았다면?
나아가 그들이 충분히 세를 기르고 난리를 일으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교회가 다 태워 죽여도 좋고, 황제가 운석을 떨어트려도 좋다.
어느 쪽이든 충성 맹세를 요구하기 전, 그 요구를 거절할 자들에게 보일 본보기는 된다.
“주여.”
그는 침착함을 되찾으려 성호를 그었고, 묵묵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신학생 출신에 빈민가 봉사를 즐겼고, 동료의 자발적 침식을 겪은 뒤, 20대에 성자가 된 마테오스다.
자리는 사람을 바꿔 놓았다.
마테오스는 이제 대공이니, 홍의주교니, 황제니 하는 권력자들의 시선과 뒷사정을 이해했다.
“나의 아버지, 나의 광명이시여.”
하지만 무슨 뒷사정이 있든 눈앞의 사람보다, 사람을 구하는 일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그가 구할 수 있다면 더더욱.
“제가 이 땅과 사람들을 대신해 말을 올리나이다.”
그는 신이 인간을 위해 보낸 성자였으니까.
“천상의 세계로부터 빛의 철퇴를 내려주소서.”
어느새 안쪽의 정리가 끝났는지, 아니면 그가 나가는 걸 보았는지, 성직자들이 하나둘 그를 따라 나와 함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그때 마테오스는 침식자 하나가 사화산을 미친 듯 뛰어 올라오고 있는 걸 보았다.
거대한 붉은 도마뱀처럼 생긴 완전 변이체는, 성자인 그가 보기에도 경계심이 느껴졌다.
이 기도를 올리는 중에는 자리를 이탈할 수 없었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결연히 계단을 가로막았다.
마테오스는 강직한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 역시 어디서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성직자들이었지만, 저 침식자를 이길 수 있을지는 몰랐다.
“……자네들.”
“성자님.”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사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살아생전 뵐 수 있어…… 영광이옵니다.”
감격한 사제의 얼굴에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제뿐만이 아니라 성기사들과 정화병들도 똑같이 눈물을 흘렸다.
성기사가 주먹 쥔 손으로 흉갑을 두 번 두드리고 외쳤다.
“끝까지 싸우자! 성자님이 우리 뒤에 계신다.”
“우리는 부끄럼 없이 천당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성기사와 정화병들의 무기에 신성력이 일렁이고, 이에 맞서듯 침식자가 포효했다.
마테오스는 요동치는 마음을 누그러트리려 노력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저들까지도 구해낼 힘을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