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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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온을 쫓아 옥좌 뒤로 뻗은 복도를 향하자, 침식자들과 후작가의 기사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난 몸을 던져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가시 달린 발을 피하고, 검을 들어 눈앞에서 지쳐 드는 장검을 막아냈다.
“감히 베네치온 각하를 모욕해!”
후작가의 기사가 내 머리를 쪼개버릴 듯한 기세로 검을 내리쳤다.
카드드득!
푸른색 마나 블레이드 일렁이는 장검은 한눈에 보기에도 몇 중의 마법이 걸린 마법검이었다.
“으윽!”
그리 두껍지 않음에도 무슨 철퇴처럼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걸 보니, 아마도 ‘예리함’, ‘견고함’, ‘무거움’ 같았다.
하지만 내 검 ‘흑루’는 북부의 드워프들이 담금질한 보검이었다.
그 광석의 종족이 손을 댄 검은 따로 마법 부여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신비가 깃든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그를 끌어들이는 동시에, 맞닿은 검을 아래로 내려그으며 내 검 끝이 앞으로 길게 나아가게 했고, 손목을 비틀어 그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전하!”
텐티아 경이 나를 훅 잡아당겼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그 힘에 끌려 바닥을 굴렀고, 그 직후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세 개의 발가락을 가진 발이 내리 찍혔다.
“미친.”
내게 덤벼들려 하던 기사들조차도 그 침식자를 보고 일순 망설였다.
키는 약 3m, 여기 있는 침식자들과 비교해 보면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놈은 이족보행을 했고, 생전 쓰던 도끼창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닭과 인간을 섞어둔 듯 생겼는데, 붉은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는 모습이 일견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꼬까가가가가가각!”
물론 놈이 도끼창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달려든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후작가의 기사는 중장보병 따위가 제게 무기를 들이댄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지, 맞서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안 좋은데.”
쾅!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걷어차인 공처럼 튕겨 나갔다.
소드 엑스퍼트 기사는 장정 수십 명분의 힘을 내며, 평민 출신 침식자들을 찍어누를 만큼 장사지만, 소드 유저 출신의 침식자들은 그런 기사보다도 한 수 위의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나는 텐티아 경에게 눈짓하는 동시에, 그대로 손바닥 위에서 불꽃을 피워 올렸다.
“흔들리며 피어나는 불꽃.”
불꽃의 진가는 제어력에서 나온다.
나는 화톳불만큼만 피워 올린 불꽃을 침식자에게 덮어씌웠다.
놈의 강철 같은 육신은 기초급 불꽃 마법 따위에 굴하지 않았지만, 나는 놈의 눈알과 부리와 숨구멍과 귓구멍 안으로 불을 밀어 넣었다.
“고통스럽게 뒤져라! 이 죄악과 타락의 결정체야!”
놈은 발광하며 도끼창을 휘둘렀고, 나는 검을 들어 막았지만, 단숨에 떠밀렸다.
텐티아 경이 검을 쳐든 건 그때였다.
“후으.”
그녀가 아버지, 오빠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몰랐다.
하지마 그녀의 검에서는 분명 미련이 한 조각 벗겨진 것이 느껴졌다.
피같이 진득한 질감의 마나 블레이드가 일렁이고, 머리 위로 쳐든 그녀의 검이 경쾌한 원을 그렸다.
퍽, 퍽, 퍽, 퍽!
붉은 원에 연속으로 베인 침식자의 몸은 도끼 맞은 바나나 나무처럼 잘려 나갔다.
사방에 육편과 피가 튀고, 양동 작전임을 알아챈 침식자가 뒤늦게 저항해보지만, 이미 텐티아 경의 검은 침식자의 몸을 사정없이 난자하고 있었다.
쿵!
결국 오래지 않아 그 반인반조 침식자는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 * *
“방금 봤어?”
“혼자서 저 침식자를…….”
“저 갑옷, 뚫을 수 있을까?”
우리를 막아서던 후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고, 그녀는 면갑을 올려 그들에게 늠름한 얼굴과 붉은 눈동자를 보였다.
“그대들의 주군은 광명신 앞에 죄를 지었다! 이에 발렌시아누스 대공께서 성자님의 권위로 정당한 재판을 열려 하니, 그대들은 정의에 반하지 마라!”
이에 한 기사가 면갑을 올리며 답했다.
“닥쳐라! 감히 각하를 모욕하려 하느냐? 그레모리우스의 궁정에 침식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충격적이나, 우리의 충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텐티아 경은 수많은 검과 도끼창들을 향해서 한 걸음 나섰다.
“마법사로 유명한 후작이 이리도 많은 침식자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 같으냐?”
조금도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물으면서.
“그건……!”
“몰랐다면 무능이요, 알았다면 타락이다! 어서 길을 비키지 못할까?”
기사의 세 가지 덕목은 주군을 따르고, 교회를 섬기고,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명령했고, 성자가 함께하며, 그레모리우스 후작령 영민들을 돕는 일이다.
한마디로, 텐티아 경은 지금 한껏 고양감에 들떠 있었다.
“내 검에 기사도가 함께하니, 무엇이 그레모리우스 가문을 위한 일인지 생각하거라! 전하. 바싹 붙으십시오! 뚫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면갑을 내리며 열 명도 넘는 기사와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중장보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저 망토를 잡아당기며 만류하고 싶었다.
나는 후작이 어디로 도망칠지 알고 있었고, 그곳으로 갈 때는 꼭 정면에서 뚫지 않고, 저 기둥 사이사이 복도를 이용해 돌아가도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낭만에 찬 기사의 검을 멈출 수 있는 건 없었다.
“아하하하하!”
텐티아 경이 양손으로 쥔 검을 좌우로 휘두르며 날아드는 검과 도끼창을 쳐냈다.
그녀의 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후작가 기사들과 정예병들의 무기에는 미련과 당황, 불안감이 어려 있었다.
절정의 기량을 가진 자들의 대결에서 한 박자는 생사와 승패를 가른다.
하물며 양자가 모두 소드 엑스퍼트라면 더 할 말도 없었다.
텐티아 경이 제국 검술 ‘일체개고’와 ‘아사’를 발동했다.
판금 갑옷 위까지 붉은 아지랑이가 어리고, 그녀가 더더욱 가속했다.
강철 군화로 적병의 가슴팍을 걷어차 길을 열고, 등 뒤에도 눈이 달린 듯 검을 휘둘러 나를 노리는 무기를 밀어냈다.
“전하! 더! 더 붙으십시오!”
미안하네.
나는 마음속으로 텐티아 경에게 사과했다.
베네치온 후작은 반 제이릴리스 연합의 핵심 세력이고, 침식자로서도 제국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준다.
요새 도시에 틀어막혀 끝없이 강력한 이물과 침식자를 생산하며 제국을 유린했었지.
“이 몸의 칼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그러니 하루빨리 제거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전하! 전하! 여기는 제가 막을 테니 어서 가십시오!”
하지만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꼭 그래서 죽이려 하는 건 아니라는 것.
‘베네치온 후작의 힘이 변별의 장막으로도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할 만큼 강력한 거 같아.’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는 것.
“죽기야 하겠습니까?”
텐티아 경이 그걸 믿고 자기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이.
내 썩어 문드러진 마음속에 다시금 일말의 죄책감을 피워 올렸다.
하지만 가신 기사가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게 해 주는 게 모든 주군 된 자의 의무인지라.
나는 이렇게 말하며 황동과 구리로 장식된 복도로 뛰어드는 것이다.
“반드시 베네치온 후작을 베고 그레모리우스 후작령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겠네!”
아, 여기서 그레모리우스 후작령을 황궁으로 바꾸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 실없는 잡생각으로 죄책감을 몰아내면서.
* * *
사화산 하나를 통째로 파 만든 궁전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붉은 구리로 장식한 갱도형 복도에 황동 초 수백 개가 서 있고, 붉은 금속광이 은은하게 빛났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복도를 달려 나가며 회귀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젠장.’
그때 제이릴리스가 제국의 후작령 하나를 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넉넉잡아 1달 정도였다.
하늘을 날며 불의 창으로 군량을 태우고 진노의 창으로 성벽을 부수다 보면 어느 군대든 삽시간에 와해 되었다.
1달간 정복하고, 1~2년간 머무르며 안정시킨 뒤, 다른 반란 영주의 영지로 향하는 게 즉위 18년까지의 일상이었다.
……그레모리우스 가문의 영지는 후작령 치고는 넓지 않은 편이었다.
그들은 일대의 광맥과 광산에서 일하는 영민들이 자급자족할 정도의 농토를 단단히 쥐고 있었지만, 그 이상을 가지려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그레모리우스 후작령에 발을 들이고 주도 키멜리온에 도착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수백 개의 요새에 수백 개의 마도구가 쟁여져 있었고, 때로는 광산 깊은 곳에서 악마와 이물과 침식자들이 기어 나왔다.
키멜리온은 더했다.
제이릴리스와 발렌시아누스는 이 도시에서 다섯 번의 겨울을 보냈다.
미로 같은 갱도, 무수한 식량, 무수한 침식자, 무수한 저항군, 무수한 이물들…….
지하 갱도에서 끝없이 적들이 기어 나왔다.
‘안 돼.’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 죽었다 깨어났으니 그 짓을 다시 할 수는 없었다.
쿵!
저 앞에서 문이 닫혔다.
두께가 한 뼘도 넘고, 잠금 걸쇠도 밀대만큼 두꺼운 강철 문이었다.
쿵!
저 뒤에서도 문이 닫혔다.
발렌시아누스에게 썩 익숙한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폐쇄 복도다.
‘이렇게 잃은 병사가 몇이었지?’
치이이이익!
문 옆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하얀 증기와 녹색 증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레모리우스 후작령은 연금술로도 이름이 높았다.
돌에서 광물을 효율성 좋게 뽑아내는 게 그들의 생업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노란 눈을 세로로 바꿔 뜨며 피식 웃었다.
그의 손아귀가 비늘에 감싸지더니,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용찬 의식에, ‘화정’에, 타고난 불꽃 마법을 강화하기 위해 할 있는 건 다 했다.
혈단 ‘영생’의 덕인지 오늘은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비켜라. 내 기사가 기다린다.”
콰앙!
두꺼운 강철 문이 뜯겨 나가고, 문 앞에서 독액을 주입하던 연금술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을 한 번씩 후려쳐 기절시키고, 가진 독을 죄다 빼앗은 뒤 걸음을 옮겼다.
미로 같은 복도였으나, 그는 후작이 갈 만한 곳을 알고 있었다.
* * *
베네치온은 궁 바깥쪽의 한 발코니에서 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도시 곳곳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오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갱도 깊은 곳에서 침식 교단 몇몇이 암약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도시의 갱도들은 천 년도 더 전에 이종족이 세상을 지배할 때부터 뚫려 온 것이었다.
근절은 불가능하고,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찍어 누르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그의 궁에까지 들어와서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꼬드기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 충격이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면면을 떠올려 보니 대부분 최근에 합류한 햇병아리들이나, 실력이 하루아침에 급상승한 자들이었다.
‘괘씸한 놈들. 나를 끌어들였다고 해서 내 기사들까지 손을 대? 내가 이 영지를 네놈들의 신에게 봉헌이라도 한 줄 아느냐?’
아무래도 버릇을 가르쳐 줘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그는 검게 물든 왼손을 바라보았다.
아주 흉측하지는 않았으나, 침식의 증거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정화가 공격으로 작용해 정화한 다음에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지식을 위해 자발적으로 침식된 것이지, 정신이 물든 게 아니었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힘과 지식을 일부 포기하고 침식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지식 없이 황제를 이길 수는 없었다.
신과 싸우려면 신 같은 힘이 필요했다.
“베네치온 후작.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자기를 무죄무치라 생각하는 대영주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으니까.”
약간 지쳤지만, 여전히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네치온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 미소는 타고났거나, 진심으로 우러나온 게 아니라, 노력을 통해 몸에 배게 한 것이었다.
“각하라 불러라. 어린 황족아.”
“아무리 내가 이름뿐인 대공이라도 후작에게 각하라 할 수는 없지.”
하얀 제복을 입은 발렌시아누스가 발코니로 걸어 나왔다.
멀끔하게 넘겼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과 제복에는 검댕이 묻어 있었으며, 손등에는 반투명한 암적색 비늘이 돋아 있었다.
그는 요사스럽게 웃으며 반존대로 제안했다.
“후작령에 저런 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이릴리스 황제 폐하께 충성 맹세를 약속하면, 성자님과 함께 침식자들을 진압하는 데에 한 손을 보탤 생각인데, 어떻습니까?”
알 것 다 아는 노귀족이다.
거짓말로 상황만 모면할 사람은 아니다.
회귀 전과 달리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기대는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복수를 포기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베네치온은 품격있게 늙은 미중년의 얼굴에 조소를 띄웠다.
그는 왼손 주먹을 들어 중지만 펴 보였다.
“닥치거라. 뱀 같은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