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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58화 (174/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8화

(158)

발렌시아누스는 그 손가락을 보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붉은 입술과 핼쑥한 뺨이 길게 말려 올라갔다.

“하하하하.”

베네치온 후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 영지와 영민들을 사랑했던 영주이자, 황태자파의 거두.

한때 제국의 미래를 손안에 틀어잡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단 한 명에게 50년의 야망이 부서진 야심가.

절망을 야심가를 복수귀로 벼려냈다.

그가 멸시하던 침식 교단에 먼저 손을 내밀게 할 정도로.

“베네치온 후작.”

“길다.”

베네치온은 발렌시아누스의 진득한 미성을 단호히 쳐냈다.

“아직 이름밖에 안 불렀잖습니까? 조금만 더 들어보십시오.”

하지만 백발 금안의 대공은 그 정도 주눅 들지 않았다.

“내가, 길다고 말했다.”

“이렇게 죽으면 자식들은 어쩌시려고 하는 겁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랑 손녀도 있으시면서.”

베네치온 후작은 혈육을 거침없이 입에 담는 무례한 태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직 정정하다. 누구 마음대로 나를 죽이는 거냐? 게다가 그 애들은 침식자가 된 나를 말리려다 감금당했다. 만에 하나 내가 오늘 죽어도 우리 가문에는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다.”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역시 앞으로 수십 년간 더 전면에서 활동했을 노귀족다웠다.

베네치온은 여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네놈도 여기 천년만년 붙어있지는 못하겠지. 내가 죽든 살든, 너는 결국 여기를 떠날 거고, 내 봉신들은 내 손자에게 이 흑철관을 씌울 거다.”

그의 복수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한들, 그가 사랑한 것들을 부술 수는 없다.

“어린놈아. 기억해 두어라. 복수한 다음의 삶을 생각하면, 복수 따위는 할 수 없는 법이다.”

갈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발렌시아누스는 나무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그가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번 했던 말이었다.

“와아. 진짜 지금은 더 패기로우셨네.”

베네치온은 난간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네가 어찌 내 궁정에 침식자들이 있는 줄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누가 누구를 잡으러 왔는지가 이해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네가 어찌 내가 침식자와 거래한 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다시금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애초에 사실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느냐? 내가 보아하니, 네놈은 애초에 나를 죽여버릴 생각으로 온 거 같은데.”

50년간 수도 사교계를 배후에서 휘둘러 왔던 노귀족이 그렇게 말했다.

어깨를 으쓱이고 손끝을 휘두르는 동작 하나하나에 대귀족의 여유와 품위가 깃들어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세로로 갈라진 황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용의 비늘이 돋은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며, 잔혹하고도 경박한 웃음을 지었다.

“전권 대사로서 제안 하나 드립니다. 10년간 세금 5% 깎아 드리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십시오.”

경박하고 오만한 목소리였다.

“거절한다.”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아래쪽 강에 황실 돈으로 무관세 무역도시를 하나 지어 드리겠습니다. 충성을 맹세하십시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절박했다.

“거절한다.”

“옆에 황실 직신 백작들 짜증 나지 않습니까? 앞으로 50년간 셋까지는 영지전을 통해 잡아 먹어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충성을 맹세하십시오.”

거의 비는 거 같기도 했다.

“길구나.”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제가 황제 폐하께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라도 들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제이릴리스.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자칭 황제의 죽음이다.”

발렌시아누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갈라졌다.

“그 외에는…… 바라는 게 없습니까?”

베네치온이 미중년의 얼굴에 차디찬 조소를 띄웠다.

“내가 무엇을 바랄 거 같으냐?”

비로소 발렌시아누스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모든 미련을 끊어낸 듯 후련해 보이는 거 같기도 했고, 모순되게도 답답해하는 거 같기도 했다.

“그래. 절대로 충성하지 않겠다면, 봉신으로 둘 필요가 없지.”

타악, 대공이 암적색 비늘 두른 손을 앞세워 달려 나갔다.

“오늘 여기서 죽어라. 더 망가지기 전에.”

황금색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발코니 아래쪽에서 튀어나오며 그를 막아섰다.

“어딜 감히!”

그레모리우스 기사단장 제르파스였다.

* * *

콰지직!

내 왼팔에 철퇴가 내리꽂히는 소리였다.

“세상!”

암적색 비늘이 들뜨고 갈라졌다.

제르파스는 소왕국 같은 대후작령의 기사단장이라는 실력을 증명하듯, 끔찍하게 강했다.

길이만 1.4m에 무게는 5kg도 넘어 보이는 철퇴를 한 손으로 회초리처럼 휘두르며 덤벼드는데, 흉악하게 솟은 여섯 개의 뿔에 푸른색 마나 블레이드가 선명하게 어려 있었다.

내 비늘에 금이 간 갈 보니, 한 방 맞으면 어지간한 기사 갑옷도 뚫릴 거 같았다.

“그 반반한 머리통을 으깨 주마!”

후욱!

후우욱!

그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철퇴를 휘둘렀다.

살짝 스친 코끝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지금!

순간 드러난 허벅지 한쪽과 겨드랑이를 노리며 달려들었지만.

“이놈!”

파지지직!

‘충격 전격’ 주문이 새겨진 왼손 건틀릿을 피해서 다급하게 물러서야 했다.

“진짜 더럽게 빠르네!”

이미 제국 검술 6단계, ‘아사’까지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내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제르파스가 강한 거였다.

산만 한 덩치가 눈 깜짝할 사이에 몇 걸음 거리를 단숨에 좁혀 오니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갑옷만 조금 약해도 멀리서 불길로 지져서 잡을 수 있었겠지만, 그의 갑옷은 주술 회로가 가득 새겨진 고급품이었다.

팔꿈치나 무릎 뒤쪽의 오금처럼 약점이 되기 쉬운 곳도 판금을 덧붙여 가렸고, 면갑 틈 사이로 칼을 찌르는 걸 막고자 아예 작은 구멍이 여럿 뚫린 형태의 면갑을 사용했다.

그런 걸 덮어쓰고 있으면 시야가 조금 어두워질 만도 했지만.

“이노오오옴!! 손속이 잔혹하구나! 가학을 즐기는 악덕 황족이렸다!”

캉, 카가강, 카가가강!

제르파스는 목, 어깨, 겨드랑이, 허리, 허벅지 안쪽을 노리는 내 검을 모두 막아냈다.

텐티아 경의 투구처럼 ‘시야 확장의 주술’이 새겨진 게 분명했다.

“젠장!”

나는 세 걸음을 연속으로 물러서 숨을 가다듬었다.

회귀 전에도 나름 강자였고, 회귀 후에는 경험을 살려 미친 듯 성장해왔지만, 저 단장은 아마 회귀 전 40년을 포함해도 나보다 오래 검을 쥐었을 거다.

게다가 용찬을 한 뒤로 묘하게 검에 관심이 덜 가게 된 것도 있었다.

몸으로 버티고 불로 지져버리면 되는데 뭐 하려고 힘들게 검을 휘둘러? 같은 건방진 생각이다.

텐티아 경은 그래서 마검사 중 경지에 오른 자가 없고, 기사 중 공격용 마도구 쓰는 걸 꺼려하는 자들이 많다고 말했지.

오로지 검의 성취만 생각하면 사실 갑옷도 없는 게 낫다고 한다.

……잡생각이 나는 걸 보니 살 만한 모양이다.

그래. 슬슬 대충 어떻게 이겨야 할지 알겠다.

“그래. 나는 가학을 즐기는 악덕 황족이다! 네놈과 네놈의 주군은 모두 고통 속에 죽을 것이다!”

나는 용언의 기운을 우우 일으켰다.

암적색 비늘이 양팔을 뒤덮고 어깨를 거쳐 목까지 올라왔다.

무슨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는 근거 없고 건방진 자신감이 생긴다.

타앗, 제국 검술 1단계 일체개고를 펼치며 정면으로 땅을 박찼다.

제르파스가 왼손으로 거리를 가늠하고, 철퇴를 힘껏 쳐들었다.

나는 왼팔을 들어 철퇴를 막았다.

여섯 개의 뿔이 솟은 흉악한 쇳덩어리가 내 팔을 내리쳤다.

뻑!

나무가 부러질 때 나는 소리가 나고, 주술 회로 새긴 갑옷만큼 단단한 비늘이 으스러지고, 팔꿈치 관절이 아래로 돌아갔다.

“끄으읍!”

나는 신음하며 달아오른 오른손으로 제르파스의 오른쪽 흉갑 겨드랑이 사이를 잡아채고 그대로 그어 내렸다.

용언의 불꽃으로 달궈진 손은 흉갑 앞판과 뒤판을 연결하는 가죽 벨트를 찢었고, 나는 흉갑을 쥔 채로 바닥을 굴렀다.

“크윽!”

제르파스가 철퇴 뒤쪽에 난 스파이크로 내 심장을 찍듯 후려쳤다.

퍽!

암적색 비늘이 단번에 깨져 나가고, 흉악한 스파이크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내 몸에 들어갔다 빠져나왔지만, 끝끝내 나는 그의 흉갑 앞판을 뜯어냈다.

“날카롭게 찌르는 불꽃!”

“이노옴!”

이제 태워죽일 일만 남았다.

제르파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내게 돌진했다.

소드 엑스퍼트 상급인 그의 신체 능력은 어마어마했지만, 용찬 의식을 한 나를 단번에 제압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꽃 화살과 불의 창이 혀를 날름거리며 하늘을 날고.

“화로처럼 달구는 불꽃!”

흉갑이 망가져 마법 저항력이 떨어진 갑옷이 붉게 달아올랐으며.

“진득하게 달라붙는 불꽃!”

제르파스의 누비옷에 끈적한 화염이 흐르는 강처럼 달라붙었다.

“으워어어!”

기사단장은 그 상황에서도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판금 갑옷 틈으로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다.

그 고결한 정신력과 충성심에 진심 어린 박수라도 보내고 싶어질 정도였다.

나는 보검 흑루를 뽑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몸은 제국의 대공이니라.”

제르파스의 철퇴가 내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충직한 노기사여. 그대는 나를 막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에 승리한 악당 같이 웃으며, 발코니 한쪽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는 노후작을 바라보았다.

“아니마.”

신발 바닥에서 거센 바람이 뿜어져 나오고, 제르파스의 철퇴가 바닥을 쳤다.

“……!”

베네치온이 뭐라 주문을 외우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수십 개의 저주가 쏟아졌다.

‘해주’라는 저주로 마법 저항력을 낮추더니, 결막염, 두드러기, 두통, 복통, 융해, 발열, 악취, 물집까지.

어지간한 기사도 뻗어 버릴 저주 세례였다.

내가 알기로, 본래 그는 마법 그 자체보다도 고서 해독을 즐겼다.

후작가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그의 무력이 아니라 카리스마와 야망, 비전을 보고 따르는 것이었다.

이 저주 세례는 침식자가 되며 얻은 힘이었고, 그 정도로는 용찬 의식으로 강화된 이 몸을 뚫을 수 없었다.

퍼어엉! 퍼어엉! 퍼어엉!

나는 저주를 받아내며 달려가 베네치온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포기할 수 있었잖습니까.”

왼팔이 맛이 가서,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넘어지지 않도록 그대로 밀어붙이며 난간에 기대게 했다.

베네치온이 갈색 눈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포기할 수 있었다고? 그만둘 수 있었다고?”

땡그랑, 흑철관이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려 발코니에 떨어졌다.

그가 내게 서늘하니 일갈했다.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닌데 어떻게 내가 그만둘 수 있겠느냐!”

그는 제이릴리스의 손에 누나와 여동생과 조카와 꿈을 모두 잃었다.

“제이릴리스를 황태녀파에 끌어들일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왜 암살자를 보낸 겁니까?”

“1황자 파라고 해서 살아남았느냐? 결국 다 죽였잖느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1황자파는 제이릴리스를 토사구팽하려 했습니다. 그녀를 끝까지 따르고 능력을 입증한 자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게 달랑 여덟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베네치온의 갈색 눈에 힘이 풀렸다.

나는 세로로 갈라졌던 눈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

“후작. 충성을 맹세하십시오. 그럼 살아서 부귀와 영광을 누릴 겁니다.”

베네치온은 절대로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 귀족의 첫손가락이었고, 만나자마자 신성력으로 태워버릴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충족에, 눈에 보이는 걸 죄다 태워버리지 마십시오.”

나는 피의 복수보다는 더 많은 재화와 웃음과 안정을 위해 돌아왔기에.

“당신이 사랑한 영지와 신민들을 위해서라도.”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에게도 기회를 줬던 것처럼, 베네치온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기회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미련을 가지는 법이니까.

그러나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던 자에게 내일을 꿈꾸게 하는 건 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눈앞에서 누이와 조카들의 목이 날아가는 걸 본 노귀족의 원한은 내 생각보다 깊었다.

“어린 대공아. 욕심도 많구나. 그 악마는 절대로 내 충성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품위 있는 외견을 보고 방심했을지도 모르겠다.

14살의 제이릴리스에게 두 자릿수의 암살자들을 보낸 사람이라는 걸 잠시 잊어버린 거다.

콰득!

노귀족이 손을 뻗어 흑루의 날 뒤쪽을 쥐려 했다.

나는 그게 검을 쳐내려는 동작이라 생각하고 다급히 반격했고, 베네치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을 보였다.

되려 내 검을 더더욱 당기며 제 몸에 흑루를 찔러넣은 것이다.

“네 미련이 너를 죽일 것이다.”

그런 저주를 퍼부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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