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61화 (17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61화

(161)

세레라지에는 새침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꼭 나여야 하니? 천재 마법사 외의 수식어나 관계성을 가지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어. 황족에게 구해져서 황실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고 알려져야 하는데, 지금 남은 황족이 여덟뿐이잖아. 그나마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건 여섯, 아니. 아직 넷뿐이고.”

그녀는 발렌시아누스의 노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며 쓰게 웃었다.

“네가 구했다고 말해 봐야 역풍만 불겠지. 하기야 네가 누구를 구했다니, 그걸 누가 믿겠니?”

“그렇게까지?”

“내가 들어도 어처구니가 없구나. 으음. 그래. 최근에 그 헬레나인가 뭔가 하는 전쟁광이 등용되지 않았니? 그 애도 공이 필요하지 않겠니?”

발렌시아누스는 여전히 덜렁거리는 왼팔을 맞추며 답했다.

“동의하지만…… 그 누나도 누구를 구하고 다니는 걸로 유명해질 사람은 아니라서. 게다가 누나 이미 옛 빈민가 쪽에서 나를 쓰러트리고 코넬을 구해준 그런 소문 난 적 있잖아.”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려무나. 소문이 난 게 아니라 소문을 낸 거겠지.”

“그게 그거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렴.”

세레라지에가 새침하니 쏘아붙이고, 발렌시아누스는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양해해줘서 고마워.”

그는 다시금 몸에 비늘을 두르며 5m도 넘는 저택 대문 위로 뛰어올랐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니?”

“절차는 언제나 중요하다고!”

세레라지에의 싸늘한 항의를 배경 음악 삼아 웃어 재끼면서.

파지지직!

전격 마법을 이용한 트랩이 발동되며 그의 팔이 전격에 휩싸였다.

용의 비늘이 죄다 불타고 떨어질 정도의 강도였지만, 그는 무사히 착지했고, 대문 안쪽의 마법 잠금쇠와 굵은 쇠기둥으로 만든 잠금장치를 걷어냈다.

그 과정에서 세 번의 트랩이 더 발동되었지만, 강인해진 몸은 끝끝내 모두 받아냈다.

“누나. 내 손 봐봐. 맛이 간 거 같아.”

“드디어! 잔류를 보아하니 꽤 역사 깊은 학파의 전격 트랩 같구나. 역시 후작가야.”

발렌시아누스는 하얀 손을 가로지르는 나뭇가지 같은 흉터를 내보이며 웃었고, 세레라지에는 왼손으로 지팡이를, 오른손으로는 복잡한 원과 삼각형이 들어간 수인을 그렸다.

“조심하려무나.”

“그래도 나 걱정해주는 건 누나뿐이네. 알고 있었어.”

“뒷말은 빼렴. 게다가 지금은 텐티아 경이 없잖니. 네가 죽으면 누가 내 방패가 되어 주겠니?”

“누나도 뒷말은 빼.”

좁은 정원에서 10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문자 그대로 몸이 반투명하고 일그러져 반대편이 비춰 보이는 자들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흑루를 뽑아 들며 달려들었고, 세레라지에는 연쇄 전격을 쏘아냈다.

그러나 후작가 그림자들의 검 실력은 기사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사아악!

발렌시아누스가 검을 베어 올리며 그림자 하나의 턱을 쪼갰지만, 동시에 두 명의 그림자가 그의 왼쪽 옆구리와 등에 소검을 박아 넣고 비틀었다.

푸푸푹!

소검에는 한 방울로도 장정 수십 명은 몰살시킬 수준의 맹독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독 따위로는 이종의 피가 흐르는 대공을 막아설 수 없었다.

“흐흐.”

옅게 웃은 발렌시아누스는 누더기가 된 왼팔을 뻗어 그림자 하나의 얼굴을 노렸다.

푹!

그림자는 태연히 소검을 내질러 발렌시아누스의 손등을 꿰뚫었지만, 그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림자의 안면을 틀어 쥐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림자가 바닥을 굴렀다.

‘‘화로처럼 달구는 불꽃.’ 이제 몸에도 쓸 수 있거든.’

그는 흑루를 빙그르르 돌리며 오른쪽으로 파고든 그림자를 노렸다.

그림자가 긴 도약으로 물러서자, 발렌시아누스는 검에서 불의 칼날을 빚어내 뿜어냈다.

바람과 불꽃이 그림자의 몸을 파고들고, 끔찍한 비명이 울렸으며, 노란 눈과 붉은 입술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렸다.

남은 그림자 일곱이 동시에 세레라지에에게 달려들었다.

세레라지에는 여전히 자기 역장을 두르고 있었다.

푸른 가루 같은 게 그들의 몸에 무수히 달라붙으며 그림자들의 속도를 줄였다.

“‘난반사’ 주문이 새겨진 가죽 갑옷을 입었구나.”

“!”

“다른 방어 주문은…… 없니?”

땅!

그녀가 지팡이를 땅에 꽂는 순간, 그림자 일곱을 향해 일곱 줄기의 전격이 뿜어져 나갔다.

번쩍!

푸른 빛이 점멸하고 일곱 그림자가 바닥을 굴렀다.

* * *

저택 안에도 몇몇 그림자들이 더 있었지만, 발렌시아누스와 세레라지에의 상대는 아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이 내지르는 모든 독과 소검을 몸으로 받아냈고, 세레라지에는 압도적인 전격을 퍼부어 그들은 바삭하니 튀겨 버렸다.

안전을 확보한 그들은 후작가 후계자들을 찾아 저택을 뒤지기 시작했다.

후작성에서 기사들을 보내 후계자들을 찾아가려 하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찾았니?”

“어.”

“보석이랑 금화 말고 애들을 찾으렴!”

“이걸 다 털어가는 모습을 보이면 알아서 기어 나오지 않을까?”

“동생아. 네가 오자고 해서 온 거잖니. 조금만 진지한 모습으로 내게 믿음을 주려무나.”

발렌시아누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보석 중에서 알이 굵은 노란 다이아몬드를 세레라지에에게 건넸다.

“이 정도 명도면 지팡이나 마도구에 쓸 수 있지? 가져가.”

세레라지에는 잠시 그 보석을 흘겨보더니, 로브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네 말대로구나. 이 정도 크기와 투명도를 만족하는 건 흔치 않은데.”

“와. 끝까지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해주네.”

“끝까지 들어주면 해 줄 생각이었는데. 이번에도 네 폭급한 성격이 일을 망치는구나.”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수색에 몰두했다.

“누나. 이거 아까 그 난반사 주술 회로 아니야?”

“이게 아니잖니! 또 뭘 주워 온…… 세상에. 이 귀한 걸 어떻게 찾았니? 어서 주렴. 손때가 타겠구나.”

“맙소사.”

그가 불쑥 은판 한 장을 내밀고, 세레라지에는 전율하며 빼앗았다.

“……그래. 역시 가죽 갑옷에서 탈착하는 방식이구나. 가죽에 난반사 주문을 새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거 가져가서 조금 작게 만들어줄 수 있어? 루디도 주고 나도 쓰게.”

“독점권 있는 마법은 아닐 테니까 상관없을 거란다. 역산도 한 일주일이면 되겠구나.”

세레라지에는 이례적으로 순수하게 웃었고, 발렌시아누스는 당황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다 짓니?”

“진짜 나왔네.”

“뭐라니?”

“내가 말했잖아. 다 털어가다 보면 알아서 다들 기어 나올 거라고.”

지하실에서 대여섯 명의 도련님과 아가씨들이 올라왔다.

얼굴이 조금씩 닮아 있어 형제, 자매, 사촌들이라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너희는 누구이기에 이곳에 들어왔느냐?”

세레라지에 또래 정도로 보이는 흑발의 청년이 검을 빼 들며 경계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후작이 워낙 고령이었던 만큼, 손자 손녀들도 모두 성인이었다.

‘훨씬 말이 잘 통하겠네.’

발렌시아누스는 눈동자를 세로로 바꿔 뜨며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냈다.

“이 몸은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다. 지금 당장 그 검을 거두지 않는다면 황족 모욕죄로 네 목을 사정없이 쳐버릴 것이다.”

그의 백발은 피에 젖어 엉클어진 채로 경박하니 뒤로 넘어가 있었고, 붉은 입술은 포식자의 미소를 지었으며, 비늘이 돋은 팔에서는 탄내와 연기가 피어올랐다.

상처 입은 맹수 같은 황족을 마주한 청년은 비틀거리며 물러서고 말았다.

‘일단 너는 안 되겠네. 마냥 유약해도 안 돼. 나랑 한 약속을 지킬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지.’

그 청년의 등을 받치며 나선 건 유순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그녀는 소매를 약간 걷어 내리며 나섰는데, 푸르스름한 자국이 언뜻 보인 것 같기도 했다.

“나를 아나?”

“직접 뵙는 건 처음이나, 그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여인이 앞으로 나서자, 사촌들이 그녀를 말리려 했다.

“뭐 하는 거야?”

“네가 왜 나서?”

한 청년은 아예 대놓고 여인의 손목을 붙들기도 했다.

발렌시아누스는 흥미를 느끼며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이야기는 들어볼 만하겠네.’

그녀는 유순한 얼굴과 달리, 갈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는 게 꼭 몇 시간 전 죽인 노귀족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 내가 발렌시아누스다. 너는 누구냐?”

대답한 건 여인이 아니라 처음 검을 들었던 청년이었다.

“전하. 그녀는……!”

“너에게 묻지 않았다. 건방진 것아.”

발렌시아누스는 청년의 가슴팍을 피 묻은 하얀 구두로 걷어차고, 다시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속 말해라.”

여인이 다소곳이 답했다.

“그레모리우스 가문의 여식. 그레이스라 합니다. 키멜리온의 백작이자 그레모리우스의 후작이신 베네치온 각하의 장손입니다.”

“장손?”

“베네치온 각하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셨고, 저는 첫째 아들의 첫째 딸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머릿속에서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말기에 미쳐 가는 베네치온을 대신해 그레모리우스를 이끌었지. 베네치온 사후 10년간은 제이릴리스가 갈기갈기 찢어놓은 가문을 이어 붙이는 데 전념했고. 겉으로는 우리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내심 복수를 다짐하며 유스티아누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능력은 확실하다. 하지만 손안에 쥐고 주무르기 좋은 상대는 아니야. 안전장치가 필요하겠군.’

“어째서 이곳에 들어와 저희 호위병들을 죽였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손발은 떨렸지만, 눈은 떨리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흐뭇하니 웃으며 답했다.

“침식자 베네치온 후작은 죽었다. 나는 황제 폐하를 대신해 그분의 정의를 집행하는 대공으로서, 그가 감금한 너희를 구출하기 위해 왔다.”

그는 ‘구출’에 힘을 주어 말했고, 그레이스는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며칠간 감금된 충격에 실언했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알면 되었다. 소후작. 잠시 위층에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는가?”

“저는 아직…… 예. 전하.”

발렌시아누스는 얼떨떨한 표정의 청년과 여인들을 뒤로하고 그레이스와 함께 3층으로 향했다.

세레라지에는 새침하게 웃으며 후작의 손자 손녀들에게 말했다.

“쟤랑 친했니?”

“예, 예?”

“친했어야 할 텐데.”

처음 검을 들었던 청년이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다.

* * *

성자 마테오스와 주교 헤하르타는 발렌시아누스의 제안을 이해하지 못했다.

“발렌 대공. 후작의 사인을 공표하지 말자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으나, 그는 해야 할 말을 담담히 해 나갔다.

“1백도 넘는 침식자가 창궐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이럴 때야말로 후작가의 권위로 사람들을 결집하고 침식의 무리를 몰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주 일가를 불신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좋을 게 없다는 말이군요.”

“예. 성자님.”

영민들로서는 대대손손 수백 년을 따르며 살았던 그레모리우스다.

침식은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니, 영주 가문에서 침식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필요가 없다.

발렌시아누스가 이렇게 나오니. 기껏 마음을 정했던 헤하르타 주교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레모리우스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설교를 한 뒤, 교회의 권력을 강화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성자 마테오스의 얼굴도 썩 좋지는 않았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럼 그대가 무리하게 후작가의 알현실에서 침식자들의 정체를 밝힌 탓에, 베네체온 후작이 피해를 본 모양새가 됩니다.”

“예.”

“예, 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다가는…….”

“새 후작과 말을 마쳐 두었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황금색 눈을 빛내며 흡족한 어조로 말했다.

마테오스는 그 초연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며 그가 모르는 어떠한 이면계약이 있음을 알아챘다.

‘설마.’

“발렌시아누스 대공. 혹시 충성 맹세와 관련된 일입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성자와 주교를 번갈아 바라보며 답했다.

마테오스가 바로 알아챌 줄은 몰랐던 그의 얼굴에 약간의 겸연쩍음이 떠올랐다.

“그레이스는 총명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이 나이에 후작이 되는 것도 모자라 교회의 공격까지 받으면 한동안 흔들릴 겁니다.”

“…….”

“성자과 주교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황실로서는 강력한 교권보다는 강력한 대영주들의 지지가 필요하니까요.”

“이해합니다.”

“쩝. 좋다 말았군요.”

성자와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만족스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스에게 몇 가지 선물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과실로 인한 후작 살해 등의 혐의로 수도 고등재판소에 재소하기 위해서’ 충성 맹세를 할 거고, 그 판결은…… 광명신께서도 지루해하실 만큼 먼 미래에는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럼.”

“성자님과 주교님은 진실을 알고 계시고, 저 역시 진실을 알고 있으니, 이번 대의 그레모리우스가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할 일은 없습니다. 주교님이 진실을 무기 삼아 어린 후작에게 십일조를 달라 노래 부르지만 않으면 대성당에 암살자들이 찾아갈 일도 없겠지요.”

“하하.”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이례적으로 평화로운 미소가 깃들었다.

“잘 끝났습니다.”

일순 마테오스는 뭔가 말해야 할 거 같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리고 싶었다.

“그럼…… 대공의 이름은 다시 한번 바닥으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아무리 그대가 죄인이라도 저지르지 않은 죄로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나도 오만하게 웃어 보이면서.

“저지르지 않은 죄로 비난을 받아 놔야, 진짜 죄를 지었을 때도 비난 정도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경박한 망나니답게 적당한 이야기로 말을 맺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