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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62화 (17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62화

(162)

나는 와이번을 타고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그레이스와의 만남을 되새겼다.

* * *

“존경하는 할아버지였어요.”

그녀가 나를 마주하고 처음 한 말은 그것이었다.

“그랬나?”

당연히 상속 이야기부터 할 줄 알았건만.

회귀 전 수십 년간 나와 제이릴리스를 괴롭혔던 대영주가 꺼낼 거 같은 말은 아니었다.

나는 무표정 아래 당황을 감추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고 긴 생머리, 차분한 갈색 눈동자와 약간 비틀린 미소, 약간 소심해 보일 정도로 고요한 인상, 그리고 석류처럼 붉은 입술에 어린 기이한 열기.

소매 안쪽에 푸르스름한 멍이 들어 있고, 걸음걸이도 썩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학대의 흔적 같기도 하다.

누가 감히 대영주의 적손에게 손을 올렸을까?

같은 적손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교섭의 말 중 하나로 사용할 수 있겠지.

……그들을 죄다 죽여준다거나.

“전하.”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그레이스가 나를 불렀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얼굴을 봐야 하는 법입니다. 손목이나 몸이 아니라요.”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건지, 진심인지 헷갈리는 태도였다.

나는 옅게 웃으며 용언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지고 손등에 비늘이 돋았다.

“네가 감히 나를 들여다보려 드느냐?”

그레이스가 탁상을 잡고 버티며 내 살기를 받아냈다.

“제 할아버님을 죽인 걸로도 모자라 이제 제 형제자매들까지 모두 죽이시려 하지 않습니까? 그다음은 당연히 저겠지요.”

겁을 먹은 목소리였지만, 주눅 들지는 않은 거 같았다.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신선하구나.”

나는 살기를 거두었고, 그녀는 붉은 입술을 놀려 말했다.

“더 차분하고 손익에 민감할 줄 아셨습니까?”

선선히 인정했다.

사실을 말하고도 무사할 수 있는 건 강자의 대표적인 특권 중 하나다.

“그렇다. 대귀족의 적손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저는 오늘 할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는 침식을 택한 대악인이다.”

“그래서 죽이신 겁니까?”

차분한 갈색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보려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만약에 할아버지께서 충성을 맹세하셨다면, 그래도 죽이셨을 겁니까?”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황제의 명령을 받아…….”

거기서 한번 말을 끊었다.

“그만.”

사람을 잘못 고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놀린다면 이빨을 죄다 뽑아 버리겠다.”

내가 원한 건 황실과 입을 맞춰 가며 눈에 보이는 이윤을 쌓아 나갈 적손이지, 혈육을 잃은 분노에 찬 어리석은 젊은이가 아니었다.

내가 흑루의 손잡이를 바라보자, 그레이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내가 기다리던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제이릴리스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자유 무역 도시를 통해 순도 높은 은과 흑철을 최소한의 관세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낡은 요새와 오래된 갱도를 폐쇄해서 불순한 무리가 모이는 걸 막고, 교단 기부를 통해 성기사들을 간접적으로 양성해 옛것 추종자들을 견제하겠습니다. 그러니 베네치온 각하가 침식자였다는 사실을 감춰 주십시오.”

“너?”

“이걸 바라신 게 아닙니까?”

한에 찬 표정이었으나, 초점 단단히 잡힌 갈색 눈동자에는 총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답했다.

저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딴소리를 했는지 의문도 들었다.

“그래. 내가 바라던 것들이구나. 그런데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느냐? 이렇게…… 건설적이고, 양측 모두가 받아드릴 수 있는 제안을 할 수 있으면서.”

그레이스는 정말로 모르냐는 듯 갈색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전하. 전하께서는 제 할아버지를 죽이셨습니다.”

심장을 차가운 손으로 꽉 틀어쥐는 거 같았다.

“……죄인이었다.”

“좋은 영주님이셨으며, 훌륭한 가주님이셨습니다.”

“네 손목은 다르게 말하는 거 같구나. 누가 손을 댔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손을 대게 놔두었다는 사실부터…….”

“오늘 오전에나 도착하셨을 테니, 그분을 죽인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제 앞에 서신 게 아닙니까?”

차분한 목소리에 조금씩 울음기가 섞였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대영주의 적손입니다. 예. 전하. 대영주라면 모름지기 제 마음보다 가문의 손익을 중시해야 합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원망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요. 당연히 할아버지의 목을 벤 황족 앞에서도 슬픔 따위는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고아한 태도로 이득을 제시하며 협상을 청해야 하지요.”

하지만, 하고 운을 떼며 그레이스는 말을 이었다.

“조부님이 돌아가신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분이 떠난 슬픔을 다스릴 시간도 없이, 이리 다짜고짜 찾아오셔서 협박 어린 협상을 청하시는 게, 저는 몹시 두렵습니다.”

“…….”

“바라시는 건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레모리우스는 전하의 뜻에 따라 황실에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이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제 조부님이 악마화되면 안 됩니다. 제 권위가 바닥을 치면 자유 무역 도시도 조성하기 힘들 테니까요. 그분은 전하께서 침식자들을 고변할 때 휘말려 사망하신 걸로 괜찮으시겠지요? 예. 그러실 거 같았습니다. 소문으로 듣고 생각하시던 모습과 거의 비슷하시군요.”

나는 그녀를 향해 동정을 느끼며 말했다.

“너는…… 귀족이 아니로구나.”

“전하. 슬픔을 느끼면 귀족이 아닙니까? 슬픔을 느끼면 어리석은 것입니까?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충성맹세가 무엇이기에…… 오전에 사람을 죽이고 오후에 그 사람의 손녀를 찾아와 협상하자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제야 알아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레이스의 눈에는 거짓 한점 없는 슬픔만이 깃들어 있었다.

어떤 어린 세월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도덕과 윤리의식이 높은 걸 보니, 어릴 적에는 수도원에서 교육받았을 수도 있겠다.

마테오스를 통해 홍의주교를 파견해서 권위를 세워주는 것도 괜찮겠다.

40년의 세월은 이러한 생각들을 반쯤 자동으로 불러일으켰다.

나는 오만하게 턱을 쳐들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충성맹세는…… 이 세상에서 피가 덜 흐르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솔레타라스라는 나라가 있어야 제국 북부와 제국 동부 사이에 전쟁이 없지 않겠느냐?”

제국의 인구 밀도가 타국에 비교해서 훨씬 높은 게 그 덕이었다.

영지전이 있다고는 해도 일단 한 나라로 묶인 덕에 훨씬 규모가 작고, 중재도 쉬웠다.

“대영주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마음보다 가문의 손익을 중시해야 하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원망하는 건 가장 위험한 일이다. 당연히 할아버지의 목을 벤 황족 앞에서도 슬픔 따위는 드러내지 말아야 하고, 고아한 태도로 이득을 제시하며 협상을 청해야 하지. 앞으로는 그렇게 하도록 해라.”

“…….”

그레이스가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맑은 눈물이 긴 선을 그리며 주르륵 흘렀다.

경련이 일어난 뺨이 덜덜 떨렸다.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레모리우스 후작.”

그녀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악수를 하고, 그녀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이종족 혼혈이라서인지, 엘프처럼 무심하고 오거처럼 잔혹한 귀족들의 세상에서, 오랜만에 진짜 슬픔을 느끼는 사람을 만났다.

회귀 전의 끔찍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분명 그 할아버지처럼 좋은 영주가 되겠지.

설득하려면 설득할 자신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계약한 옛것의 실체나, 그 옛것 추종자들이 이 영지에서 저지른 짓이라, 그런 걸 고변하며 ‘우리 함께 이 영지를 지켜나가자.’ 같은 식으로 웅변한다면 넘어왔을 거다.

실수한 건지도 모르겠다.

우는 것보다는 당연히 웃는 게 낫다.

그레이스의 원망과 증오의 대상이 황실보다는 제 조부를 향하는 게 내게 이득이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슬픔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게 사치인 세상이기는 하지만, 대귀족쯤 되면 그런 사치를 부려도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하얀 눈물이 너무 반짝여서.

그냥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 * *

“잘했느니라!”

제이릴리스의 목소리가 오후의 집무실에서 울렸다.

쏟아지는 역광이 그녀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백금발과 햇살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아오르게 했다.

그 짙은 그림자 어린 얼굴에서도 눈빛만은 선명했다.

속눈썹 길고 황금빛 찬란해, 깜빡할 때마다 해가 지고 뜨는 거 같은 그 눈.

나는 그 앞에서 언제나처럼 그녀의 미모와 야심과 기세에 경도되어, 한없이 올려다보고야 말았다.

“폐하. 그레이스 후작이 소신 탓에 다른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사옵니다. 황실에 빚을 지게 해야 했으나 원망만 품게 했으니,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소신을 벌하여 주소서.”

“안전장치는 잘 만들어 두지 않았는가? 움직임이 수상쩍으면 헤하르손 주교를 통해 견제하면 될 터. 만에 하나 군사를 일으키려 하면, 그때야말로 짐이 나서서 본보기를 보이면 될 뿐이다.”

“하오나.”

“발렌시아누스.”

제이릴리스가 아릿하니 웃었다.

그녀가 관절 반지 낀 손을 천천히 뻗어 왔다.

내가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 있으려니, 제이릴리스는 그대로 손짓해 내가 그녀의 책상 위에 손을 올리게 했다.

“제아무리 수도 제일의 망나니라 한들, 그대도 인간인데 어찌 죄책감이나 동정심이 없겠는가?”

“폐하.”

제이릴리스가 그녀 손을 내 손등 위에 얹었다.

건틀릿 손가락 같은 관절 반지는 얼음처럼 서늘했고, 손바닥은 용찬을 한 나도 느껴질 만큼 따듯했다.

“검은 벽 그자는…… 절대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리라는 사실만 제한다면 훌륭한 영주였다. 그게 제일 중요하지만 말이다.”

나른하고도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렇사옵니다.”

“새 후작이 그대를 원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짐은 생각이 달라.”

“예?”

“짐이었다면 우선 키멜리온의 인구를 3분의 2로 줄여 놓고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레이스 후작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대에게 감사해야 해.”

나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제이릴리스의 손이 강철처럼 단단하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짐이 그대가 슬퍼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안타까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대를 계속 쓰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대는, 짐과 마찬가지로 슬퍼하고 자책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나와는 다른 결과를 내면서 할 자야. 우리는 쌍둥이 아닌가?”

우리가 쌍둥이라는 걸 제이릴리스가 언급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스, 슬퍼하고 자책하고 안타까워하신다는 분이 인구를 3분의 2로 줄이겠다고 하시옵니까?!”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으려니, 그녀가 손을 풀어 주며 태양 같이 웃었다.

“게다가 짐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가 힘들 때는 모든 고통이 짐 탓이라고 생각하라고.”

“제가 감히 어찌.”

“그러니 추호의 의심 없이 명령을 받들라고.”

나는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제이릴리스가 손짓으로 고개를 들게 했다.

“고개를 들어라. 발렌시아누스 대공에게 짐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내린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또한 포도주를 내려 줄 테니, 그대의 호위 기사와 함께 진탕 마시고 취한 다음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모레 돌아오도록 해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말했잖느냐. 잘했다. 충성맹세를 받아냈고, 자유 무역 도시를 통해 그레모리우스의 질 좋은 광석들을 염가에 구매할 수 있게 되었지. 하하. 그 과정에서 생기는 차익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구나.”

그레모리우스의 은과 흑철은 마나 수용성이 높아 똑같은 주술 회로를 새겨도 더 오래 가고 위력이 높았다.

회귀 전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정복하고 지배하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황실 직속 상단을 꾸려 매입할 것이다. 그대에게 지분 10%, 아니. 20%, 아니. 기분이다. 25%를 주마.”

“폐하!”

나는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일어나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황실 직속 상단의 지분은 마르지 않는 황금의 샘이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발렌시아누스. 목숨으로 폐하를 섬기겠습니다.”

“아직 그리 황송해하기에는 이르다.”

“예?”

“성자에게 들었다. 그대가 많이 다쳤노라고. 그대는 용찬을 했다지만 그 힘을 계속 조절하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전장에 나가야 할 일도 있을 테고. 갑옷이 필요할 거야.”

“갑옷이라 말씀하시오면?”

“백금, 청은, 흑철, 황동. 어떤 색이 제일 좋은가? 완전한 검은색은 아니 된다. 그건 오로지 짐의 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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