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63화
(163)
“전하. 그래서 어떤 색으로 맞춰 달라고 하셨습니까?”
텐티아는 잔을 비우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콰하니 달아올라 상기되어 있었다.
무구를 하사받는다는 건 언제나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녀의 주군이 기사다움에 한 걸음 가까워진 거 같아 기쁠 뿐이었다.
“바로 답하지 못했던 거 같네. 갑옷을 내려 주신다고 했을 때는 기뻐서 말이 안 나오더니만, 정작 색을 나보고 고르라 하시니 그건 그것대로 고민이더군.”
발렌시아누스는 곧바로 텐티아의 빈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 주고, 루디에게 반 잔을 받았다.
그 역시 볼이 발그스름해진지 오래였다.
텐티아는 발렌사아누스를 흉내 내듯 붉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평소 입으시는 스타일 같이 하얀 바탕에 붉은 무늬를 넣어도 좋겠지만, 전하께서는 황족입니다. 호위 대상이 호위 기사와 색이 겹쳐서는 안 될 노릇이지요.”
“맞는 말이네.”
“전하는 장교가 아니니 황동색도 안 되고, 수도 경비나 서는 놈들과도 다르시니 검은 바탕에 은색도 안 됩니다. 청은색 역시 신하의 색이지요.”
“으음. 네 기사단의 색은 모두 못 쓰게 되겠군.”
“군청색은 어떠십니까? 군청색 바탕에 노란 무늬를 새기는 겁니다.”
“오오. 멋있겠군.”
루디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두 주정뱅이를 바라보았다.
‘많이 취하셨네요.’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는 벌써 같은 대화를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내려 주신 술을 어찌 아낄 수 있으랴?’
‘으하하하. 옳은 말씀이십니다. 전하.’
저녁 먹고 바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벌써 테이블 옆에 쌓인 포도주 병이 한 아름이었다.
“경, 고맙네. 경 덕에 베네치온 후작을 벨 수 있었어. 경이 헤하르손 주교를 설득해준 덕에 모든 일이 편해졌네. 오늘 내가 얻은 모든 공훈이 경 덕이야.”
“아닙니다. 전하. 불충한 대영주를 고작 여섯으로 무너뜨린 그 위업은 오로지 전하의 공이십니다. 그 패기! 그 용기! 모든 기사의 귀감이 되어 대대손손 칭송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경. 궁금하지 않나? 내가 어떻게 베네치온 후작이 침식자라는 걸 알았는지 말이야.”
텐티아는 고개를 저으며 루디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아 발렌시아누스의 잔에 남은 절반을 채웠다.
“예. 전하. 궁금하지 않습니다.”
“경?! 어찌 지략을 그리 무시할 수 있는가?”
“전하. 저는 머리가 아니라 검을 쓸 때 진가를 내옵니다. 세레라지에 전하는 세속의 일에 관심이 없고, 황제 폐하는 어찌 되든 결과만 좋게 나오시면 기뻐하시니, 재미없고 복잡한 음모는 오로지 전하만 알고 있으시면 되옵니다.”
루디는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깃든 거 같았다.
“그런가? 그렇군. 그래. 알겠네. 흐하하하.”
발렌시아누스가 유쾌하니 웃으며 텐티아와 잔을 부딪쳤다.
핼쑥한 뺨을 넘어 갸름한 턱까지 붉은 기운이 내려오고 있었지만, 루디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 유쾌하고 피폐하며 잔혹한 눈매 속, 모두가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황금빛 눈동자 안에, 언제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미련의 조각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 * *
세레라지에는 약 18일 만에 공방으로 돌아왔다.
지팡이 짚은 소리가 나자마자 제자들과 생도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녀에게 인사했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공방주님. 오셨습니까?”
세레라지에는 새침하니 웃으며 제자들과 생도들에게 말했다.
“다들 내 앞에 있구나.”
“예. 스승님.”
“그럼 실험 기재와 연구실에는 누가 있니?”
“!”
그 말뜻을 알아챈 제자들과 생도들은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녀가 색이 다른 두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말했다.
“가서 연구하렴.”
제자들과 생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몇몇만 남았다.
“스승님. 지난번에 다시 정리하라고 하셨던 뇌운 생성에 관련된 논문입니다. 스승님께서 만드신 붉은 약과 푸른 약의 정제법도 최대한 체계화해 보았습니다.”
세레라지에의 첫 제자, 로레인이었다.
금발 장발에 세레레지에와 비슷한 남색 로브를 입었고,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한 인재였다.
세레라지에는 그녀의 뇌운 논문을 훑어보고 새침하니 말했다.
“이 정도로 어디서 내 제자라고 하지 말렴.”
“죄송합니다.”
“한 사람의 마법사로 너를 소개해도 될 거란다.”
“스승님!”
“삼류 떠돌이 마법사 말이잖니.”
로레인의 얼굴에 경련이 일고, 세레라지에는 30분 동안 논문의 문제점을 짚었다.
“……마나 효율이 이 부분에서 극히 떨어진단다. 생성보다는 증폭의 술식을 이용하려무나.”
“하지만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면 안정성이 떨어집니다.”
“이미 뇌운이 뇌기를 머금고 있는데 왜 그게 외부의 기운이 되겠니?”
“아앗!”
“슬슬 어디를 고쳐야 할지는 알겠다는 얼굴이구나. 가서 수정해 오렴.”
“네. 알겠습니다.”
세레라지에는 로레인의 뒤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잘하고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려무나.”
그걸 들은 로레인의 얼굴에 다시 혈기가 돌았다.
두 번째로 세레라지에의 앞에 선 건 마법 거리에서 주워 온 적발의 마법사, 투피올이었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게 자른 머리에 검은 정장 아래 드러난 손등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어서, 자연스럽게 아카데미 출신 싸움꾼을 떠올리게 했다.
“공방 상황은 어떠니?”
세레라지에가 보기에 마법 실력은 그저 그랬지만, 마법을 이용한 사업을 벌이는 실력은 탁월했다.
세속 일에 관심 없는 그녀로서는 나름 괜찮은 하수인이었다.
“황실에 1차 납품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곧 충성맹세가 있을 테니, 그때 대영주들이 올라오면 맹세 후 구매할 수 있게끔 최대한 물량 비축 중입니다.”
“특이사항은 없니?”
“회로 각인 작업에 필요한 동굴 이끼 시약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거 같습니다. 코넬 의원의 공방과 다른 공방들이 맞붙은 게 원인으로 추측됩니다.”
세레라지에는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 벼락을 떨구고 싶다만, 그녀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몰랐고, 잘 모르는 걸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동생 놈이 오면 만날 시간을 줄게. 그때 그 애에게 이야기해 보려무나.”
“그분이시라면 안심입니다.”
투피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세레라지에는 잠시 발렌시아누스가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해졌지만, 이내 그 의문은 한쪽으로 넘겨 두었다.
‘됐어.’
더 궁금한 것도 많을뿐더러, 며칠 전 그레이스를 다음 후작으로 내정하고 내려올 때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욕심이었다.
누군가는 그걸 회한이나 미련, 슬픔이라고 부르겠지만, 세레라지에의 생각은 달랐다.
‘너는 황제를 사랑받게 해주고 싶구나.’
세레라지에는 무심의 대명사였지만, 남의 감정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의 감정과 감정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잘 알았다.
후회와 미련 계열의 감정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과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세레라지에가 보았을 때, 그녀의 이복동생이 품은 죄책감과 아쉬움은 작지 않았다.
‘베네치온을 죽인 걸 후회한 게 아니었단다. 그레이스를 감정적으로 회유하지 못한 걸 후회한 거잖니.’
세레라지에는 그 사실에 전율 어린 두려움을 느꼈다.
‘내게도 성과가 아니라 충성부터 원했지.’
그녀가 아는 제이릴리스나 발렌시아누스는, 위험 요소를 없애기 위해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
황족들이 떼로 죽어 나간 그 밤이 고작 반년하고도 조금 전이었다.
‘죄책감에 몸을 떨면서도, 목을 내리쳐 버리겠지. 폐하는 죄책감도 안 느끼실 거고. 그게 세속의 권력자들이 살아가는 법이니까.’
세레라지에는 입술을 깨물며 상념을 정리했다.
이번 외출을 통해 얻은 건 많았다.
가시적인 소득 중 최고봉은 이 은판이었다.
그레모리우스의 호위 아닌 호위들이 사용하던 이 은판에는 ‘난반사’ 주문과 ‘흐릿함’ 주문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액체금속에 새기는 법을 알아낼 수 있으면 좋겠구나. 아콰테그를 개발한 마스터의 이름이…….’
상용화한다면 이번에도 제이릴리스와 발렌시아누스 모두에게 감사와 우러름을 받을 수 있으리라.
비가시적인 소득 중 최고봉은 발렌시아누스의 욕망 한 장을 더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웃기고도 무서운 일이로구나. 그 망나니가 그어 놓은 선이 그런 것이었다니.’
황제가 사랑받기를 원한다니.
그러나 그레이스 후작이 마음으로 충성을 바칠 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제 이복동생이 받아드릴 수 있을까?
약점을 잡아 놓았다지만, 안심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지. 황족을 그렇게 집요하게 잡아들이던 쌍둥이가, 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불안 요소를 살려둘 리가 없잖니.’
세레라지에는 제자가 가져온 차를 한 모습 크게 마시며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흩었다.
마법 외의 주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려니 두통이 치밀어 올랐다.
“동생 놈을 위한 파란 약이나 더 만들어야겠구나. 오래오래 살면서 즐거운 마법 연구를 해야지.”
* * *
발렌시아누스의 주변인들은 그가 베네치온 후작이 침식자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묻지 않았다.
제이릴리스는 그런 것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세레라지에는 그런 것에 궁금증을 가지는 법을 몰랐고, 텐티아는 그런 것을 궁금해하지 않았으며, 루디는 광명교회에서 알려 줬거니 하고 생각했다.
정작 그 광명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가진 둘은, 제이릴리스의 정보망이 이제 중부 외곽까지 뻗었다는 판단을 내린 뒤였다.
본인이 들었으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라며 한탄할 소리였다.
“홍의주교께서는 교회가 백작령 이하 지방 영주들을 포섭하고 세속적 권한을 가지려 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그걸 모르는 두 성직자, 교황 내정자 홍의주교 아르고스와 검은 성자 마테오스는 고요한 집무실에서 진중한 대화를 나누었다.
“알겠습니다. 성자님. 이번에 본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어떠셨습니까?”
발렌시아누스는 광명교회가 여러모로 주목하는 인물이었다.
성자가 각성할 때 함께했고, 교회 내부의 파벌 싸움에 참전했으며. 대외적으로 성자를 두 번이나 납치했고, 연초 밀수 토벌 공동 전선을 이륙했으며, 진실로 밝혀진다면 하나하나가 폭동이 일어날 법한 괴소문 수백 개를 후광처럼 두르고 다녔다.
“좋은 의미로든 안 좋은 의미로든 한결같았습니다.”
“한결같았다면.”
“오고 가는 길 내내 와이번을 타고 제가 기절할 때까지 허공을 빙빙 돌았다는 말입니다.”
마테오스는 생각도 하지 싫다는 듯 강철같이 강직하고 잉크처럼 그윽한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와이번’은 마테오스에게 있어 ‘주의 어린 양’이 하루아침에 ‘혼돈의 뱀’으로 변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아르고스는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깐깐한 얼굴을 더더욱 굳혔다.
조금의 웃음도 허락하지 못할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계시와 엇나가는 내용을 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조금 애매합니다.”
마테오스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잘생긴 얼굴에 적잖은 고뇌가 깃들어 있었다.
“본래 그는 그레모리우스 가문의 성채 안쪽만 ‘변별의 장막’으로 쓸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안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래서 도시 전체를 장막으로 덮었고.”
“도시 전체를 말입니까?”
아르고스는 주름살 자글자글한 눈을 크게 떴다.
그 역시 최고위급 성직자였지만, 인구 20만 도시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도를 올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 그랬더니 1백에 달하는 완전 변이급 침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 역시 기도로 무찔렀으나, 그들과 그들을 따르는 침식자 무리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르고스는 대체 어떻게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마테오스의 말에서 문제가 될 부분을 찾아 면밀하게 물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도시 전체에 장막을 사용하면 그 난리가 날 걸 알고, 궁전 안에만 변별의 장막을 사용하라고 했다고 생각하셨겠군요?”
성자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