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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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라지에를 황립 마도 공방까지 배웅하고, 배움의 거리로 가기 위해 다시 정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전하.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시종 하나가 은밀히 다가와 말했다.
제복과 배지를 보아하니 본궁, 그것도 제이릴리스를 직접 만나는 시종이었다.
“무엇인가?”
“황제 폐하께서 전하시기를, ‘프로이하이트’이라고 하셨습니다. 전하께 그 6할을 보낸다고 하십니다.”
전대 프로이하이트의 막내딸 출신 후작이 보낸다고 했던 금화 1만 닢이 온 모양이었다.
6할이면…… 금화가 6천 닢이다.
어지간한 성채를 열 개쯤 지을 수 있는 돈이었다.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전하게.”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좋은 소식을 전해 준 시종에게 은화와 금화로 채워둔 작은 돈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작은 성의를 여러 번 베풀며 누리게 해 주는 게 충성심을 사는 법이었다.
시종은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조아리고 자리에서 떠나갔다.
나는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흐흐.”
웃음이 나왔다.
좋은 날이다.
* * *
“전하. 죄송하지만, 학생회의 인력으로 전하의 요구를 들어드리기는 힘들 거 같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회색 머리를 멋들어지게 다듬은 푸른 눈의 엘리트 학생회장, 진이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회장님께 이 서류를 올려야 하는데…… 안에 누구 있어?”
“쉿.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가 들어가셨어요.”
“에이. 농담하지 마. 아무리 우리 회장님이 엘리트라 하셔도 대공 전하가 찾아올 리가 없잖아. 그렇게 꾸민 애겠지.”
“하지만 왼쪽 가슴에 쌍두독수리 훈장을 달고 있었다고요! 그건 아무나 못 다는 거잖아요.”
“그럼 진짜…… 야단이다. 이거 다 보고드려야 하는데.”
귀를 기울여 보니 학생회실 몇몇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이 꾸린 학생회의 멤버들 같았다.
방학을 맞이했음에도 모두 나와서 일하는 걸 보니, 바쁘다는 건 사실인 거 같았다.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바쁘다는 건 사실인 거 같군. 하지만 내가 주는 활동비가 그리 적지 않을 텐데…… 예산이 더 필요한가?”
이 말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정말로 예산이 더 필요하냐는 뜻이기도 했고, 혹시 네가 중간에 다른 생각을 하고있는 게 아니냐는 뜻이기도 했다.
진은 명석한 엘리트답게 그 말뜻을 이해하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을 더더욱 창백하게 물들였다.
그러나 진은 수만 생도를 거느린 거대조직의 회장이었다.
그는 내가 선택한 협력자답게 빠르게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제게 해명을 허락해드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를 들기 위해 현지 협력자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허락하지.”
진이 책상 속에서 서류 한 묶음을 꺼내고, 칠판에 큰 지도 세 장을 붙였다.
배움의 거리 일대를 표시한 지도는 거리마다 색이 달랐다.
“우선. 이 서류들은 지난 1주일간 배움의 거리 일대에서 벌어진 패싸움과 관련된 서류들입니다.”
“패싸움이라고 하면 몇 명 이상이지?”
“양측 모두 100명 이상이 참석한 경우만 ‘패싸움’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배움의 거리에서 난투가 잦다고 해도 100명 이상의 패싸움이 흔히 일어날 리는 없다.
그러나 눈앞의 서류 뭉치는 두께가 내 손가락 두 마디는 되는 거 같았다.
……나 같은 이종족 혼혈은 대부분 손가락이 아주 길고 늘씬하다.
“주모자급만 조사했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문제가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
나는 껍질 벗겨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영주들이 방문했을 때 이런 일이 터진다면, 그야말로 황실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꼴이었다.
“이 싸움을 중단시키고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상 탓에, 전하께서 주신 많은 활동비가 치유 기도 헌금액이나 포션 값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사유는 조사해 보았나?”
한 건 한 건 말려서야 끝이 없다.
결국은 원인을 제거해야 하고, 그걸 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진은 단단한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멋들어진 교복과 황금 줄도 같이 늘어졌다.
“읊어 드리겠습니다. 아카데미라는 공간과 구성원의 특징상, 대공 전하의 앞에서 말씀드리기 송구한 다소 거친 어휘가 등장할 수 있음을 미리 약속드립니다.”
“경청하도록 하지.”
* * *
그 뒤로 진이 읽어 준 분쟁 발생 사유는 총 다섯 장 분량에 달했다.
자취방 계약 분쟁,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쳤다, 기말고사 뒤풀이, 층간소음, 벽간소음, 옆 학교 놈들이랑 눈이 마주쳐서 싸우다가 규모가 커졌다, 강의실 퇴거 시간 미준수, 식당에서 옆 학교 놈들 소시지가 더 컸다, 카페 자리 확보, 교재 구입 새치기, 공중변소 자리싸움, 쓰레기 배출 관련 분쟁…….
“어떠십니까?”
“중구난방 같지만, 아니군.”
나는 그 일련의 사유들을 듣고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이 칠판에 붙여둔 저 지도가 무엇인지 알 거 같았다.
“저 지도들. 인구 밀도 표시와 유동 인구 밀도 표시가 맞나?”
“예. 맞습니다. 전하.”
“패싸움 발생 빈도수와 인구 밀도가 완벽하게 들어맞겠군.”
“그렇습니다. 전하.”
수도 땅값은 비싸고, 아카데미들은 밀집되어 있고, 생도들은 대부분 빈곤하다.
아카데미들끼리 한 건물의 강의실을 공유하는 일도 흔하고, 식당과 카페는 언제나 미어터지며, 자취방 구하기와 수강 신청은 하늘의 별 따기다.
회귀 전에는 이렇게까지 문제가 심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헬레나가 죄다 징병해버렸으니까.
……아카데미는 본래 지방 대귀족의 자제들이 교류와 인질을 겸해 들어오던 역사적 배경 상, 사법권이 학장에게 있다.
이는 대귀족 자제들의 사건 사고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게 축소하는 동시에, 그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있게 해 주는 제도였다.
수도 경비대나 치안감, 고등재판소는 소드 엑스퍼트급 기사를 열 명쯤 거느리고 올라온 지방 대귀족의 자제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지만, 명망 높은 노귀족 학자인 학장은 그 귀족 자제를 잘 타이르고, 때로는 처벌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었고, 오늘날에는 아카데미 학장도 매일같이 사람에 치이는 판이다.
우리 아카데미 애들이 다른 아카데미 애들과 싸우고 다쳐 오면, 검술 학부 교수들을 불러서 졸업 필수 교양으로 검술과 격투술 과목을 신설할지언정, 처벌은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자체적으로 단속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법권이 각 아카데미에 있는 만큼 경비대나 치안감들을 투입할 수도 없다.
그래서 진에게 학생회와 사생아 모임을 꾸리도록 해 일종의 사병으로 쓰도록 해줬지만, 아무리 일당백의 싸움꾼들이라도 수백 명이 뒤엉키는 난장판에서 힘을 쓰기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진의 푸른 눈을 보며 말했다.
“네 고충은 이해한다. 하지만 곧 지방 대귀족들이 올라온다. 그때 이런 꼴을 보일 수는 없어.”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 달라 말할 수밖에 없구…….”
그때 학생회실 문이 왈칵 열렸다.
다른 학생들이 들어가면 안 돼, 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얼핏 들린 거 같았다.
덩치가 곰 같은 학생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진을 불렀다.
“회장! 서쪽에서 성 마르가리타 아카데미 애들이랑 우리 아카데미 애들이랑 붙었어.”
진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일어섰다.
“규모는?”
“양쪽 합쳐서 1천 8백 명 정도야.”
나는 입을 쩍 벌렸다.
1천 8백이면 최소 두 개 대대, 최대 네 개 대대에 해당하는 대병력이었다.
하물며 전원이 아카데미 생도들인 만큼, 어중간한 농민병들이나 빈민 출신 병사들보다 몸도 훨씬 좋을 거고, 마법 학부나 신학부, 검술 학부 생도들은 문자 그대로 초인적인 기량을 뽐낼 거다.
진이 한쪽 벽에 걸린 갑옷을 입으며 그 덩치 큰 생도에게 말했다.
“지금 모일 수 있는 애들은 몇 명 정도 돼?”
“회장이나 나 포함해서, 30명 정도…….”
진이 눈을 질끈 감고 학생회실 밖으로 나섰다.
“대공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챈 곰 같은 덩치의 생도도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진. 가면 죽을 수도 있다.”
내 목소리를 들은 학생회 멤버들이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진짜야, 세상에, 둘이 뭐야? 같은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진이 검과 비슷한 길이의 쇠몽둥이를 들며 답했다.
“저는 회장입니다. 전하. 아카데미의 생도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교칙을 엄히 세울 의무가 있습니다.”
“성기사들과 정화병들은 적이 아군의 세 배를 넘기 전까지는 후퇴하지 않지. 5백의 기사를 이끌고 그 40배에 달하는 2만의 정예병들을 쓸어버린 25대 솔레타라스께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셨고. 그런데 너는 무려 60배의 적에게 돌진하려 하는군. 무모하다.”
진이 주머니에서 눈 색을 바꾸는 약을 꺼내 마셨다.
활동비 값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몸이 달아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말했다.
“요새 가슴속이 조금 답답했는데, 잘 되었군.”
미친 듯한 부담감에 잠이 오지 않는다.
“예?”
“도와주겠다.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다. 아는 척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구경하다 나를 쫓아내는 척이나 하고 명성을 얻어라.”
오랜만에 화려하게 날뛸 수 있겠어.
* * *
“불이야!”
“화염 파도다!”
어떤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이 불꽃 온도를 분류하기를, 빨간 불꽃이 약 800도고, 노란 불꽃이 약 1,200도, 하얀 불꽃은 1,500도, 파란 불꽃은 1,650도가 넘는다고 한다.
즉, 자연 상태의 불꽃은 아무리 낮은 온도의 불꽃이라고 해도 사람에게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마법의 불은 달랐다.
“감히 제국의 대공인 이 몸 앞에서 이 무슨 난장판이냐! 어서 네놈들의 냄새 나는 방으로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도록 해라!”
발렌시아누스는 뜨거운 커피 정도 온도의 불길을 일으켜 거리 전체를 휩쓸었다.
마나만을 태워 일으키는 불꽃이고, 워낙 온도가 낮은 만큼 옮겨붙을 일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높이는 6m에 달해서 아무리 사나운 생도들이라고 해도 겁을 집어먹기에 충분했다.
닥쳐, 방이 있었으며 빼앗으려고 나오지도 않았어, 같은 외침이 드문드문 들려왔지만, 온갖 이종족의 혈통으로 재능을 물려받은 황족을 막아서는 건 불가능했다.
하물며 그 황족이 지난 며칠간 온갖 스트레스와 중압감에 짓눌려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면 더더욱.
“하아!”
검술학부나 마법학부 소속의 학생들은 낮은 온도의 불길을 가르거나 이겨내고 달려오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발렌시아누스는 난전에 대해 알려주었다.
“썩 비켜라!”
“비켰다! 이제 내가 때릴 차례니 순순히 맞거라!”
한 검술 학부생의 검을 피한 뒤 가랑이와 정강이를 구두 앞코로 걷어차고, 뺨을 연속으로 쳐 기절시켰다.
“성자님의 원수! ”
“하! 네놈도 와이번에 물려가고 싶으냐?”
신학생의 정화 불꽃을 피하고 묵주를 빼앗은 뒤 그 묵주로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바람이여!”
“등록금이 아깝구나!”
한 마법사의 주문을 용찬 의식으로 강력한 마법 저항력을 가지게 된 몸으로 버텨낸 뒤, 지팡이를 빼앗아 정수리에 내리쳤다.
“마법사가 지팡이를 놓다니! 실격이다!”
“네가 빼앗았……!”
“감히 나를 ‘네가’고 불러? 와이번핏으로 가자!”
삽시간에 수십 명이 바닥을 구르자 아무리 분노한 대학생들이라도 이성과 두려움을 되찾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악!”
“뛰어!”
“발렌시아누스다!”
“망나니 대공이 우리를 다 불태워 죽이려 한다!”
“후작을 둘이나 죽이고 그 딸들을 겁간한 놈이야! 우리 같은 건 산 채로 잡아먹힐 거라고!”
“도망쳐. 그쪽 아니야!”
한 생도는 애인과 함께 달리다 바닥에 넘어졌다.
“아악!”
“윽!”
사방에 불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저 멀리서 백발 금안의 대공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소문보다 훨씬 잘 생겼고, 훨씬 위태로워 보였으나, 그만큼 오만하고도 잔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회장님, 구해 주세요!”
반사적으로 외친 그 목소리에 진이 응답했다.
회색 머리에 푸른 눈을 번뜩이며 진이 달려 나갔다.
“회장님이 오셨다!”
“살았어!”
발렌시아누스는 몇 번 검을 부딪치고 적당히 도망치며 생각했다.
‘절대로 이 꼴을 대영주들 앞에서 보일 수는 없어. 뭐라도 대책을 세워야 해. 제도적으로.’
그는 한 이름을 떠올렸다.
‘하드리탄. 너를 쓸 때가 온 거 같네.’
* * *
“발렌시아누스?”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청년 황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묘하게 겁을 집어먹은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