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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68화 (129/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68화

(168)

하드리탄은 회귀 전 제이릴리스가 헬레나보다도 총애했던 행정과 경제의 천재였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서류만으로도 삼라만상을 들여다보았고, 잉크 냄새만 맡아도 누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아닌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고귀한 태생이 회귀 전의 그가 30대 재무대신이 되는 것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는 농노의 아들로 태어났어도 황실 재무부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다.

“……그래서 지금 배움의 거리 쪽에 공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혹시 근처에 묶여있는 땅이나 공터 같은 게 있나?”

그는 몇 달 사이에 단발로 기른 하얀 머리를 짧은 꽁지머리로 정갈히 정리하고, 물소 뿔로 테를 만든 고급 안경을 쓰고, 푸른 눈에 약간 비굴한 미소를 띠며 나를 맞이했다.

다리를 떠는 걸 보니 어쩐지 뭔가 불안해하는 거 같고, 내가 들어온 순간 뭔가 들킨 거 같다는 표정을 지었고, 지금 안도하는 걸 보니 뭔가 내게 더러운 짓을 한 거 같지만, 딱히 피해를 보았다는 자각은 없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하드리탄이 정장 재킷을 걸치며 선배 재무관들에게 말했다.

“선배님. 폐하의 고문께서 찾아오셨으니, 제가 잠시 3번 회의실 좀 쓰겠습니다.”

하나같이 궁정귀족 출신 엘리트들로 꾸려진 재무관들은 나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드리탄은 나를 회의실로 안내한 뒤, 본인은 문밖에서 말했다.

“잠시 유관부서들을 돌며 자료를 받아 오겠다. 기다려다오.”

열댓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에서 10분쯤 앉아 있으려니, 복도에서 뭔가 굴러오는 소리가 났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십수 명의 발소리도 함께였다.

혹시 황궁 재무관저가 습격이라도 받았나 싶어 흑루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있으려니, 회의실 문이 왈칵 열리고 40대, 50대 행정관료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하나같이 하얀 가발을 쓰고,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고급 서류 가방을 들었으며, 두 눈을 총기와 광기로 빛내고 있었다.

대신 급은 아니었지만, 모두 강력한 권한을 가진 고위 행정 귀족들이었다.

“하드리탄. 이게 무슨 일이지?”

그가 한 행정관에게 건네받은 지도를 칠판에 붙이며 답했다.

“유관부처의 고관들이다. 네가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여기서 허가받고 저기서 서류 떼느니 한 자리에서 처리할 수 있으면 훨씬 좋을 거 같아서 데려왔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회귀 전 황제와 대공이 수도를 떠나 전쟁과 음주가무에 몰두하는 동안, 나라를 나라 꼴로 유지 시켜준 엘리트들이었다.

“그래. 모두 바쁜 시간 내어 주어 고맙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하드리탄에게 눈짓했다.

“시작해라.”

* * *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가?

40대 행정관료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필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역시 이종족 혼혈인 귀족 출신이었지만, 확실히 황족은 기세 자체가 달랐다.

세인들은 발렌시아누스의 황금색 눈동자나 뒤로 넘긴 하얀 머리카락, 핼쑥한 뺨을 보고 두려워한다지만, 필립이 보기에 그건 발렌시아누스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였다.

필립은 발렌시아누스의 하얀 제복에서 그의 존재감과 기세를 느꼈다.

망나니라는 소문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옷차림은 언제나 황제를 알현할 수 있을 만한 정복이었다.

딱딱 떨어지는 어깨선과 멋들어진 주름이 길게 들어간 바지, 벽처럼 솟아 목을 가린 깃과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은 브로치까지.

저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시녀들을 갈궈대고 깐깐하게 굴지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실체는 단순히 루디와 루디가 고용한 하녀들의 손이 아주 야무진 것뿐이었지만, 착각은 자유였다.

‘저렇게 깐깐한 인간이 움직이는 이상 일은 철두철미하게 굴러갈 수밖에 없다. 황제 폐하 선에서부터 깨지기 싫으면 똑바로 처신해야 해.’

‘다들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하군.’

‘방금 동정심 어린 눈길을 보낸 거 같은데? 다 갈아버려야 할 거 같으니 미리 사과하겠다는 건가?’

하드리탄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평생 봉쇄수도원에 틀어막히기 싫으면.’

그는 얼마 전 한 보고서를 올렸고, 재무대신은 그 공을 높이 사 그에게 책상을 내주었다.

재무부는 과감하게도 발렌시아누스의 이름을 팔아 그 정책을 시행했고, 욕은 고스란히 발렌시아누스가 먹었다.

하드리탄을 침을 꿀꺽 삼키며 지도를 보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발렌시아누스. 배움의 거리는 지리상으로 수도 동북부에 위치한다.”

“그래.”

“북쪽으로는 공간이 없지만, 배움의 거리 아래부터 수도 동문 옆까지는 공터들이 드문드문 있어. 이 땅을 모두 합쳐서 배움의 거리 쪽으로 돌릴 수 있으면 공간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

“거기에 대학가 건물주인 궁정 귀족들을 좀 불러 증축 허가 좀 내주면 확실히 공간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군.”

발렌시아누스의 잔혹한 눈매에 가학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하드리탄은 마음을 놓지 않았고, 예상대로 발렌시아누스 역시 질문을 마치지 않았다.

“공터들이 드문드문 있다는데, 그럼 왜 진작 처리하지 않았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도 아니었던 거잖나?”

행정 귀족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족 앞에서 설명하기 참으로 민망한 이야기였으나, 이 불덩이를 옆에 떠넘기기에는 유관 부처의 고관대작 모두가 불려온 상황이었다.

‘네가 설명해 드려. 도시계획 담당이잖아.’

‘네가 설명해 드려. 유입인구 조절 담당이잖아.’

‘네가 설명해 드려. 상인회 담당이잖아.’

‘네가 설명해 드려. 빈민가 담당이잖아.’

눈빛만으로도 육두문자가 오가고, 필립은 결국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하. 본래 운하 동북쪽은 창고 거리였습니다.”

“창고 거리?”

이건 발렌시아누스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예. 수도 밖에서 운하를 통해 들여온 물건들을 쌓아 두는 대형 창고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럼 상인들을 만나 봐야겠군.”

“그러나 선대 황제 폐하 때 몇 차례의 재개발을 거치며 창고들이 옮겨가고, 그곳에는 자연스럽게 짐꾼이나 하급 인부 등 수도의 육체노동 종사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곧바로 이건 권한이 꼬여 만들어진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직도 땅의 권리는 서류상으로 상인회에게 있나?”

“예. 그렇습니다. 아직 계약이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도 남아 있습니다. 더욱이 이미 짐꾼들도 입주한 지 수십 년이고, 거주 구역으로 안정화된 지 오래되어 갈아엎기에도 곤란한 상황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선선히 인정했다.

아무리 행정관료들이 톱니바퀴 같은 자들이라고 해도, 그곳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하루아침에 퇴거령을 내리는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달랐다.

“곤란해도 해야지. 다시 불을 질러야겠군.”

“발렌시아누스!”

“하드리탄. 어차피 공간은 필요하다. 대귀족들이 올라오면 그 호위대가 모두 호텔에 머물 수는 없어. 그 정도 숫자만 데려오지도 않을 테고.”

“우리도 생각해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공간을 정리하면 돼.”

“정리? 말해 봐라.”

하드리탄 역시 기계적으로 일하며, 그 기계 사이에 사람이 끼는 걸 그리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거리 하나를 불태우고 재편성하겠다는 소리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악인은 아니었다.

하드리탄은 그 자리에서 국토를 관리하는 부처의 고관과 함께 칠판에 그림을 그려 나갔다.

“결국 중요한 건 땅이다. 주택은 금방 올릴 수 있어. 공터들을 한데 묶고, 옛 창고 건물들을 한데 묶으면 돼. 같은 넓이의 공간으로 배상해주면 된다.”

“흐음.”

발렌시아누스가 잔혹하고 게으른 고양이처럼 웃었다.

무채색 같은 하얀 얼굴에 노란 눈동자만 형형히 빛났다.

하드리탄은 분필을 쥐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대귀족들의 호위대가 들어와 수도 안에 군대가 주둔하게 된다면, 그들의 수발을 들어줄 인력도 필수 불가결하다. 죄다 짐꾼들이고 인부들이니 현장에서 고용도 창출될 거야.”

“그래. 알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 네가 직접 나서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왜지?”

“요즘 네 평판은 정말…… 바닥을 기고 있다.”

하드리탄은 그게 자기 탓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네 개인의 일탈로 치부되었지만, 더 나가면 황실 전체에 대한 불만으로 번질 수 있어. 그래. 안다. 너는 평민들 수천 명쯤이야 이제 손짓 한 번에 불사를 수 있겠지. 하지만 곧 대귀족들이 오는데 수도를 그런 흉흉한 분위기로 만들 수는 없다.”

발렌시아누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불을 지르면 되겠군.”

하드리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교회를 부른다. 침식자 수색이나 토벌을 핑계 삼아 거리에서 사람들을 퇴거시키고, 그 사이에 건물들을 철거한다. 그게 제일 온건한 방식일 거야.”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말로 진정 흡족한 미소가 깃들었다.

회귀 전 제국의 행정을 유지시켜주던 초인, 하드리탄다웠다.

그는 아직 하드리탄을 믿어도 될지 아닐지 완전히 판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증명했다.

주변 행정귀족들이 모두 하드리탄을 향해 동지애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게 증거였다.

“그래. 그럼 또 성자님을 만나러 가야겠군.”

* * *

“발렌시아누스가 나타났다!”

“잡아라!”

더위가 한풀 꺾인 초저녁, 대성당 담 안 잔디밭에 성기사들과 정화병들이 모여들었다.

성자를 두 번이나 납치한 대악한, 백발 금안의 대공이 뻔뻔하게도 나타난 것이다.

“무슨 일로 이 신성한 장소를 찾아왔느냐?”

“썩 퇴거하지 못할까?”

성기사 앙겔루스는 눈에 불을 켜고 발렌시아누스를 막아섰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문제 그대로 환한 신성력이 줄기줄기 타오르고 있었다.

“하잘것없는 놈들이.”

발렌시아누스는 교회 정화병들이 그에게 들이댄 창촉을 암적색 비늘 두른 손으로 밀쳐냈다.

사제들의 가호로 신성력이 타오르는 창촉은, 부러지면서도 발렌시아누스의 비늘을 불살랐고, 그 모습을 본 정화병들은 더더욱 얼굴을 굳히며 창을 들이밀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성자님을 뵙고 고해성사를 하러 왔다.”

“고해성사? 네놈이?”

앙겔루스는 믿지 못해 되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창의 숲을 몸으로 해치고 앙겔루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어서 성자님을 데려오는 게 좋을 거야. 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교회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사람을 수천 명쯤 태워 죽여야 할지도 몰라.”

“……!”

앙겔루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대성당을 바라보았다.

싸움은 더 비겁한 쪽이 이기는 법이었다.

“전원, 무기를 내려라.”

발렌시아누스는 오래지 않아 마테오스와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독대는 아니었고, 여러 성기사, 전투 사제들과 함께였다.

“성자님. 안색이 맑고 건강해 보이시니 한 사람의 신도로서 기쁠 따름입니다.”

“대공은 오늘도 피곤해 보이는구려. 필시 매일같이 제국을 위해 힘쓰느라 그렇겠지.”

마테오스는 강직하고 그윽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지만, 어찌어찌 저 뻔뻔한 대공과 마주 인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아르고스에게 황실이 침식자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거 같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발렌시아누스에게 묻고 싶었다.

‘만약 내가 그날 도시 전체에 변별의 장막을 쓰지 않았다면, 도시에 남은 침식자들을 어찌할 생각이었습니까? 당연히 즉시 토벌할 생각이었겠지요?’

그런 것 치고는 데려간 인원도 적고, 대 침식자 무장도 변변찮았으며, 결정적으로 짐이 너무 단출했다.

“성자님. 교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침식자를 수색하기 위해 이 거리에서 사람들을 빼내야 합니다.”

발렌시아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테오스는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뻔뻔하고도 잔망스러운 자는 정론을 앞세워 교회를 옮아 매려 했다.

“어찌 우리가 대의와 사명을 외면할 수 있겠소. 성기사들을…….”

“아니요. 정화병만 조금 내주셔도 됩니다.”

“뭐요?”

성자는 조각같이 선명한 얼굴에 의문을 표했다.

“그곳에 침식자는 없을 겁니다.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연막입니다. 그러니까…….”

마테오스는 이어지는 발렌시아누스의 설명을 들고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분명히 침식자를 이용하려 했을 거다. 반드시 법안을 통과시키겠다. 이런 세속 군주들의 손에 모든 걸 맡길 수는 없어. 바오로안 홍의주교님처럼 무력 충돌까지 불사할 생각은 없다. 우리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해. 일단 교회령을…….’

하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건.

“병력을 내주지 않으시면, 제가 욕을 먹어야겠지요.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날며 불길을 쏘아낼 겁니다.”

태연히 내뱉는 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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