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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69화 (130/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69화

(169)

세상 일 중에는 하기 싫어도 입장상 해야 하는 게 많았다.

그리고 성자는 침식자를 수색하는 걸 도와달라는 말에 병력을 내주지 않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침식자가 숨어들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모두 대피하라!”

“정신 파동이 언제 울릴지 모른다. 다들 귀 막고 몸 숙여서 뛰어!”

하늘이 군청색으로 물들어가는 여름날, 풀벌레 우는 소리 들려 오는 저녁이었다.

앙겔루스가 이끄는 정화병들과 발렌시아누스가 바르바토스에게 빌려온 치안감들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등과 허리에는 무기와 성수를 매달고,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었다.

쿵쿵쿵!

몽둥이로 문을 두드려 이른 잠에 빠져든 사람들을 끌어내고, 횃불로 골목을 밝히며 침식자를 찾았다.

물론 그들 중 그들이 사기극에 동원되었다는 걸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성기사님들이 조금 적은 거 같기도…….”

“집중해라!”

그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게 황족이라서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이참에 그의 앞에 주어진 몇 가지 문제를 죄다 해결해 버릴 생각이었다.

첫 번째로 만난 건 진, 그가 이 일에 뛰어들게 된 원인이었다.

“진. 공간이 생기면 일단 올해 가을까지는 대영주들이 데려온 호위병들이 주둔할 거다. 바로 옆에 군대가 있으면 아무리 사나운 대학생들이라도 조금은 움츠러들겠지. 그다음에 방이 많은 건물을 지어 대학 기숙사로 쓸 수 있게 해 줄 거니까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불만 누그러트리고 시간을 끌어라. 할 수 있겠지?”

“예. 전하.”

두 번째로 만난 건 하드리탄, 이 일을 키운 동시에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하드리탄. 대영주들이 호위병단을 데려오면 꼭 이 공터에 주둔시켜야 한다. 공간을 최대한 확보해.”

“꼭 이 공터여야 한다고?”

“중무장한 군대가 황궁 앞쪽에 주둔하는 꼴을 볼 수는 없어. 수도는 신민들이 일으키는 수준의 문제는 경비대와 치안감이, 침식자나 고위 마수들은 기사들이 해결하기 때문에 병력의 절대적인 머릿수가 적다. 대영주들이 한번 들이받아 볼까? 하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어.”

“명심하지.”

세 번째는 앙겔루스, 하드리탄이 들고 온 해결 방법이었다.

“빛의 검, 앙겔루스. 사람들은 내보냈나?”

“……그래. 정화병들은 외부 경비로 돌렸다.”

“웃게나. 앙겔루스. 웃어. 그대는 오늘 그 많은 사람을 살렸네. 그대가 움직이지 않았으면 나는 하늘을 날며 불덩이를 떨궜을 거야. ”

“…….”

발렌시아누스는 그 소문처럼 웃으며 앙겔루스의 흉갑 등판을 두드렸다.

무척이나 오만하고도 잔혹하게, 하지만 샛노란 눈동자 안쪽에 기이한 열기의 신념을 반짝이면서.

“하드리탄.”

“준비되었다.”

재무부가 치안감들을, 치안감들은 평소 손안에 쥐고 있던 시장의 깡패들과 건설 길드를 움직였다.

“밀어.”

“그쪽 못 빼!”

“여기 바퀴 살아있다. 이동식 소형 창고는 최대한 끌어내.”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창고 건물들을 해체했고, 거리를 평탄화시켜 나갔다.

몇 시간이 지나고, 달이 저 높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목조 건물은 쓰러지기 직전이고, 석조 건물이나 벽돌 건물도 금이 많이 가 있습니다. 당장 철거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준입니다.”

깡패들과 건설 길드장이 와 보고했다.

하드리탄은 안경을 중지로 밀어 올리며 물었다.

“이유는 뭐지? 창고 건물이 그렇게 약할 리가 없을 텐데.”

“근본적으로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건물들이 아닙니다. 침대를 들이기 위해 기둥을 자르고, 벽을 쌓기 위해 기둥 벽에 기대는 구조물을 만드는 등 무리한 개조와 중축이 불러온 문제입니다.”

하드리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대공.”

“그래.”

발렌시아누스는 하얀 제복 자락을 여미며 걸어 나갔다.

오만한 시선으로 모두를 깔아보고, 왼손에 불길을 피워 올리면서.

“깔끔하게 태워서 무너트리는 게 낫겠군. 주민 퇴거는 끝났겠지?”

“예. 전하.”

깡패들과 건설 길드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 사이로 걸어 나가 한 목조 창고에 불을 질렀다.

* * *

장은 올해로 33살 되는 짐꾼이었다.

그는 어릴 적 아카데미에 들어가 검술을 배우고 싶어 했고, 무리하게 거액의 학비를 빌려 결국 입학 원서를 썼다.

그러나 그는 재능이 없었고, 결국 빚을 변제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모님은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셨고, 그에게 남은 건 네 동생과 막대한 빚뿐이었다.

울분에 차 집을 나갔고, 배움의 거리에서 생도 깡패 노릇을 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악과 깡만으로는 기사 서임에 실패하고 악에 받친 소드 유저들, 삼류라고는 하나 마법사들이 격돌하는 패싸움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어설프게 깡패 노릇 하다가 뒤지도록 맞고, 한때 도망쳤던 집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형? 형 맞지?”

“오빠?”

두 남동생은 부두에서 짐을 나르고 있었고, 두 여동생은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날 그는 엉엉 울며 마음을 고쳐먹고, 깡패 짓을 그만두었다.

두 동생과 함께 운하 선착장으로 가서 짐꾼 노릇을 시작했다.

성실히 빚을 갚아나가기 시작하자 고리대금업자들의 독촉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한때 검객을 꿈꿨던 마음은 남아 있어서, 동료 짐꾼들이 짐을 슬쩍하려 하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 짐꾼이 고급 연초를 빼돌리려는 걸 막았다.

상단주가 모 귀족에게 바치려 어렵게 얻은 뇌물이었다.

상단주는 그 뇌물로 큰 계약을 성공했고, 그 뇌물을 지키게 도와준 장을 잊지 않았다.

상단주는 연초 값만큼 보너스를 주었다.

빚을 갚았고, 동생들은 식모 일을 그만두었다.

비록 옛날에 창고였다지만 집도 샀고, 결혼도 했으며, 인력사무소를 하나 차려 동생들과 함께 사업을 꾸려 나갔다.

엉엉 울며 사과한 그를, 동생들은 반쯤 용서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교회 정화병들이 찾아와 외쳤다.

침식자가 나타났으니 다들 대피하라고.

장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카데미 물을 먹은 지식인이었다.

본래 교회는 침식자가 나타나면 고래고래 외치지 않았고, 일반인에 가까운 정화병들이 아니라 소수정예의 성기사와 전투사제들을 보냈다.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낀 그는 동생들과 가족들은 내보내고 집에 남았다.

그리고 망나니 대공이 찾아와 불을 질렀다.

“왜, 왜 그러십니까?”

장은 문을 열고 엎드려 읍소했다.

“전하. 저희가 뭘 잘못했단 말입니까?”

오른쪽 끝부터 왼쪽 끝까지, 이 앞부터 저 뒤까지.

거리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그는 물동이를 들어 허겁지겁 불을 끄려 했지만, 마나로 피워 올린 불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았다.

장은 발렌시아누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역시 발렌시아누스에 대한 수많은 소문을 들어 본 바 있었다.

저 오만한 망나니 대공은 성자를 납치하고 곡식을 독점했다.

최근에는 침식자들을 이용해 그레모리우스 후작을 살해했고, 홍등가 깡패들과 연이 깊으며, 그의 별궁에서는 매일같이 타락의 연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런 자 앞을 막아설 만큼, 장은 절박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왜. 제 집에 불을 지르셨습니까?”

발렌시아누스가 무심히도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곳은 네 집이 아니다. 이곳은 황실의 토지며, 상인들에게 창고를 지으라 빌려주었으나, 그들이 창고를 옮기며 붕 뜬 땅이다. 내가 내 땅에서 불을 지르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제가 평생 일해서 지은 집입니다. 전하. 이제 막 결혼한 아내가 있고, 못난 저 때문에 평생 고생만 한 동생들도 있습니다.”

“나는 당장 이 땅이 필요하구나.”

“어째서이십니까?”

“대영주들의 호위대가 주둔할 공간이 필요하다.”

장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으로 물었다.

“그분들은 길어야 한 달을 머무르지 않으십니까?”

“그 30일간 앞으로 300년 이상을 좌지우지할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시간을 조금만 주신다면!”

발렌시아누스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 황금색 눈동자를 보며, 장은 해가 지고 뜨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누구에게 빌어서 시간이 주어지면 좋겠구나.”

“제발…….”

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발렌시아누스의 발을 붙들었다.

바람을 내뿜는 하얀 가죽 구두, ‘아니마 라멘툼’에 장의 손때가 약간 묻어났다.

“네 용기가 가상하구나.”

발렌시아누스는 한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그는 잠시 장을 죽일까 살릴까 고민했다.

그는 장에게서 그의 속임수를 눈치챌 정도의 지혜와 온갖 기괴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그의 앞을 막아서는 용기를 보았다.

‘살려줄게.’

이 잔혹한 세상에서 한 사람의 신민으로 살아가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자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안주머니에서 금화 세 닢을 꺼내 장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치안감을 불러 대피한 사람들에게 데려가도록 했다.

* * *

“발렌 전하. 문제없으십니까?”

“그래. 텐티아 경. 아무 문제 없네.”

공터화 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성벽과 맞닿은 쪽에서는 거의 건축물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고, 배움의 거리와 맞닿은 쪽도 깔끔했다.

나는 루디와 텐티아 경을 대동하고 거리를 쏘다니며 철거 작업을 도왔다.

목조 창고를 불태워 재만 남기기도 하고, 굵은 대들보를 텐티아 경과 함께 자르기도 하고, 대체 어디서 소문을 들은 건지 이 새벽부터 달려 나와 배움의 거리 학생들을 잠재고객으로 하는 건물을 짓겠다는 건설 길드의 고위직들을 상대하기도 했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하드리탄과 건설 길드의 길드장을 불러 놓고 진에게 줄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텐티아 경은 내가 생각한 이 속임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되려 내가 불안해져서 물으니 그녀가 답하기를.

“내 영지를 찾아온 같은 계급의 손님을 최선을 다해서 접대하는 건 기사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지주 기사들은 같은 기사나 남작이 자신의 영지를 방문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테이블 다리가 부러지도록 상을 차려 주는 게 상식이라고 한다.

“물론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은 같은 기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기사도를 따릅니다. 즉, 영주로서의 체면과 품위를 지키는 건 기사도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루디 역시 즐거운 표정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질색하지도 않았다.

“안쪽으로는 지금 재건축 이야기하고 있으시잖아요. 다 밀어버리지는 않으셨고요. 이참에 4층 이상의 높은 건물로 다시 지을 생각 아니세요?”

“언제 들었어?”

“아까 하드리탄 님이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요. 석재 값이 떨어졌으니까 일단 염가에 건물을 지어 놓고, 월세를 낮게 받아서 원래 이 거리에 살던 사람들을 입주시킨 다음에, 계약 유지한 채로 건물을 궁정 귀족들에게 팔아서 이윤을 낼 생각이시라면서요?”

나는 눈을 돌리며 멋쩍게 웃었다.

“하드리탄이 그렇다 하더라고.”

루디가 배시시 웃으며 내 곁에 바싹 붙였다.

“네. 발렌 님. 믿을게요.”

나는 불타고 무너져 이제 재와 타다 남은 쓰레기들을 긁어모으는 중인 깡패들과 건설 길드원들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이 어느새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좋아.

오늘 하루도 잘 넘겼다.

이제 돌아가면 오전에 세 시간만 잤다가 제이릴리스에게 경과보고를 하고, 하드리탄 천거하고, 올라올 직신(直臣) 대귀족들 명단도 확인하고, 회귀 전 기억으로 걔들 달랠 당근이랑 후려칠 채찍 준비하고…… 그래. 진 선물도 챙겨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잿더미 속에서 굵은 녹색 팔이 솟아 올라왔다.

열기가 녹아 피부가 짓무르고 여기저기 근육이 드러나 있었지만, 분명 생물체의 팔이었다.

“케에에엑!”

키는 약 4m, 마른 체형, 긴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 그리고 긴 머리 뒤쪽에서 갈라지는 네 개의 연두색 촉수.

나는 그놈에게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절망했다.

“세상!”

진짜 침식자가 이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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