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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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릴리스의 집무실 앞 복도는 웅장한 아치형이었고, 천장에는 도금한 샹들리에가 희고 붉은 보석과 함께 빛났다.
보석만큼 비싼 큰 유리창 밖에서는 여름 산새가 울고, 녹음이 여름 바람에 몸을 흔든다.
조각구름이 푸른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가운데, 세계 제일의 강대국 솔레타라스의 황제 집무실 앞은
“아 비켜요!”
“내가 먼저야!”
무슨 시장통에라도 온 듯 북적였다!
“폐하께 슬슬 증세를 논해야 하네.”
“증세는 어지간해서는 피하라 하셨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서류를 들고 오다 못해 아예 바퀴 달린 손수레에 실어서 온 고위 관료들.
“2분기에 통과된 55개의 법안 중, 폐하께서 몇 개나 최종적으로 동의하실 거 같나?”
“일단 자경단법은 무조건 통과될 거 같습니다. 코넬 의원과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밀약은…….”
의회 보고서 정리 책자를 가져온 다선의원들.
“이 지역을 재개발하면 황실에 얼마나 떼어 줘야 하겠나?”
“허가부터 받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이참에 운하 자체를 넓히는 것도…….”
각종 청탁을 품고 황제를 찾아온 궁정 귀족들.
“황제 폐하의 개량형 집광식 마법 가로등을 이동식으로 개선해 일선에 보급하고자 합니다.”
“이참에 황실도 준기사급 중장보병들을 양성하도록 하지요.”
군비 증강을 위해 황제를 찾아온 황동기사단의 헬레나와 장교들.
“단장님. 적어도 500명은 늘려야 합니다.”
“음. 나도 마음 같아서는 1000명을 늘리고 싶네.”
대귀족들의 방문을 앞두고 치안감 증원을 위해 찾아온 바르바토스와 치안총감.
“이참에 예산을 더 끌어와서 상처 치유의 물약을 개량해보려 합니다.”
“정말 예상외의 순작용이구나. 혹시 내가 괜찮은 피험자를 추천해줘도 괜찮겠니?”
“세레라지에의 추천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황립 마도 공방의 실적을 보고하기 위해 찾아온 공방주들과 세레라지에.
세레라지에?
“누나. 여기서 다 보네. 어쩐 일로 나왔어.”
안감이 붉고 겉감은 푸른 긴 로브와 고깔모자, 윤기 나는 남색 생머리와 금은 요동이 눈에 띄었다.
“어머. 오랜만이구나. 나도 폐하께 보고하고 예산 타야지 않겠니. 못 잤니? 얼굴이 더 핼쑥해졌구나.”
“예상치 못한 싸움을 겪었지. 텐티아 경 덕에 다치지는 않았어.”
세레라지에가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새침한 얼굴에 약간의 악의가 깃들었다.
내 옆에 있던 하드리탄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세레라지에가 그녀 옆에 있던 분홍빛 단발머리의 공방주에게 분홍빛 물약 한 병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방금 피험자 어쩌고 하는 대화와 함께 해석해 보니, 색이 무척이나 수상했다.
난 예방적인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누나. 그거 공방 폭력이야. 천재로서 모범은 못 보일지언정. 싸움 좀 잘하는 마법사라고 그렇게 선배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거야?”
나는 실실 웃으며 딴죽을 걸었고, 세레라지에는 매끄러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닥치렴. 나도 대공이란다.”
“대공이라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야?”
“첫째. 네가 할 말은 아니잖니. 둘째. 그럼 안 될 줄 알았니?”
일순 내가 말문이 막히자, 세레라지에는 물약 코르크 뚜껑을 따서 내게 내밀었다.
“마시렴.”
“이게 뭔데.”
“피로회복의 물약이란다.”
나는 며칠 전 세레라지에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피로회복의 물약 같은 건 죄다 마약이라고 하지 않았어? 천재 마법사라면서 왜 자기가 한 말을 기억도 못 해? 아이고, 맞다. 바르바토스 단장에게 마법 거리에서 피로회복 물약 파는 새끼들 다 잡아들이라고 해야 했는데.”
내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바르바토스 경을 향해 몸을 돌리자, 세레라지에가 내 목덜미를 잡아챌 기세로 손을 뻗어 왔다.
“너도 오락가락하는구나.”
“어림없다!”
물론 난 한낱 게으른 마법사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할 머저리가 아니었다.
나는 가볍게 세레라지에의 손을 쳐내고, 반대 손으로 하드리탄의 등을 밀어 세레라지에에게 제물로 바치려 했다.
하지만 세레라지에의 손에는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파직!
“아악!”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지만, 깜짝 놀라기에는 충분했고, 그 사이에 손목을 붙들리고 말았다.
“줄 때 먹으렴! 동생에게 물약까지 챙겨 주는 누나가 흔한 줄 아니?”
“아니. 그거 아직 실험 중이라고 했잖아.”
“너는 먹어도 안 죽잖니? 게다가 저 선배는 네가 먹는 그 파란 약 설계에도 참여한 마법약 전문가란다. 믿어봐도 좋을 거야.”
분홍빛 단발머리의 마법사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헤헤.”
하나도 믿음이 가지 않는 미소였다.
나는 망나니답게 눈알을 굴리며 낮게 말했다.
“혹시 내 몸에 문제라도 생기면 둘 다 모래주머니 매달고 연무장 열 바퀴야. 난 절대 혼자 안 죽는다.”
너무나 수상한 분홍색 약을 마셨다.
환장하게도, 딸기 맛이 났다.
약간 몸이 달아오르는 거 같기도 했다.
“어?”
“어떠니?”
세레라지에와 분홍 머리의 마법사가 기대된다는 듯 물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거 자양강장제 아니지?”
“자양…… 뭐?”
“최음제 아니냐고.”
“그런 걸 너한테 먹여서 어디에 쓰겠니? 그런 약 없이도 소후작 그레이스를 밤새도록…….”
“날조 그만!”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거 같았다.
푹 자고 일어나거나, 사제의 축복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게 마약이 아니라고?”
분홍 머리 마법사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일종에 아주 약한 포션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피로가 쌓이면 몸 안에 나는 작은 상처들도 회복이 안 되는데, 그런 걸 치유해줘요. 이번에 새로 개발했어요.”
이 효과대로라면 당장 상품화시켜도 날개 돋친 듯 팔릴 거 같았다.
“그런데 왜 추가 연구가 필요해?”
“이유 모를 부작용이 있어요.”
“부작용?”
“의존성과 중독성이 있어요. 헤헤.”
나는 바르바토스 경을 불렀다.
“단장! 여기 마약쟁이가 둘이나 있네!”
* * *
다행히 나와 세레라지에, 두 전직 망나니 약쟁이가 솔선수범 검증해본 결과, 새 물약의 중독성은 연초보다도 낮았다.
나는 분홍 머리 마법사에게 이후에 이상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바르바토스 경과 마법 거리의 피로회복 물약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눈 끝에 제이릴리스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치안총감이 인원을 늘릴 근거가 하나 더 생겼다고 기뻐하다가 일이 늘었다고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폐하. 제가 왔사옵니다!”
제이릴리스는 수많은 서류의 산 사이에서 언제나처럼 나른하고 오만하게 웃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하드리탄 대공도 있군.”
역시 황제는 초인이었다.
기다리는 나도 지쳐서 복도에 주저앉고 싶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눈을 요요히 빛내고 있었다.
“폐하의 옥체와 정신이 단조한 강철과 같으시니…….”
“방금 피로회복의 물약 한 병 먹었네. 효과 괜찮군.”
“아.”
“원래 초여름이 초겨울 다음으로 바쁜데, 대귀족들 방문까지 더해지니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야.”
문득 나는 집무실 한쪽에서 풍겨 오는 커피 향을 맡았다.
한 시녀가 아예 작은 화로까지 가져다 놓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폐하. 숙면을 취하신 지 얼마나 되셨사옵니까?”
제이릴리스가 말없이 손가락을 꼽았다.
열 손가락을 다 꼽고도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해가 지고 뜨는 거 같았다.
“……그리 중요치는 않을 거 같군.”
“폐하!”
“그래도 이제 그대가 마지막이네. 짐도 오늘은 들어가 잘 생각이야.”
“잘 생각하셨사옵니다.”
“짐은 언제나 잘 생각한다네.”
제이릴리스가 그 나른하고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하드리탄을 바라보았다.
“우선 그대부터 돌려보내도록 하지. 발렌시아누스 대공과 함께하느라 적잖이 지친 모양이군.”
하드리탄의 검증은 빠르게 끝났다.
“저는 폐하와 제국을 위하여…….”
이미 재무부 내에서도 성실하고 능력 있는 행정관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마법이나 검술을 익히지 않은 만큼, 헬레나보다 검증의 필요성이 덜했다.
수상한 짓을 한다면 언제든 뭉개버릴 수 있고, 설령 침식된다 한들 그 증상이 빠르게 드러나고,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가 어쩐지 내게 죄책감을 품은 거 같다는 거다.
제이릴리스 역시 하드리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하드리탄에게 눈치를 주었고, 그때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푸른 눈을 수축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딱히 피해를 봤다는 자각은 없어서 굳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럼 들어가 보도록.”
“감사하옵니다. 폐하.”
하드리탄이 머리를 조아리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는 기사단 소속이 아니니 저렇게 물러나는 게 예법에 맞았다.
제이릴리스가 이제야, 하고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즐거운 충성맹세 준비 시간이니라.”
* * *
밤이 깊었다.
나는 마지막 순번이었고, 내 뒤로 알현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나와 황제는 여유 있게 올라올 지방 대귀족들의 명단을 꼽아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일련의 명단을 세며 말했다.
“생각보다 적어서 놀랐습니다. 제국의 무수한 백작 중 직신은 한 줌이군요.”
제이릴리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짐이라 한들 직신을 그리 많이 거느릴 필요는 없잖은가? 황제는 본래 통치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이니.”
제국의 정치체제는 봉건제고, 봉건제란 간단히 말해서 봉신이 세금을 내면 주군이 봉신을 보호해주는 제도다.
이 봉신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신과 봉신, 직신(職臣)과 배신(陪臣)이 그것이었다.
봉신은 제이릴리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땅이나 재물을 받은 모든 사람이고, 가신은 그 봉신 중에서 궁정에 머무는 봉신을 말한다.
텐티아 경은 수도에서 월급을 받으며 황제를 섬기니, 봉신인 동시에 가신이고, 그녀의 오빠인 렌티아 경은 중부에서 땅을 가지고 황제를 섬기니, 봉신이지만 가신은 아니다.
또, ‘직신’은 직접 주군을 섬기는 봉신이고, ‘배신’은 그 봉신을 섬기는 하위 봉신이다.
백작이 후작을 섬기고, 후작이 황제를 섬긴다고 할 때, 백작은 황제 입장에서 ‘배신’이 되며, 그는 황제의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수백에 달하는 제국의 지주 귀족 중, 이번에 수도로 올라와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대귀족은 생각보다 적었다.
나는 복부 지방에서 올 명단에 이름이 달랑 하나 적혀 있는 걸 보고 웃었다.
“북부에서는 한 명만 오면 되는군요. 하기야 복부의 64개 백작가는 모두 셉텐트리오스 공작가를 주군으로 두고 있으니 말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짐이 세베릭에게 괜히 곡식을 퍼준 게 아니니라.”
“문제는 서부이옵니다. 워낙 넓고 대귀족들도 많은지라, 직신 후작만 6명에 직신 백작이 23명이옵니다.”
“동부도 만만하지는 않다. 후작가 하나가 있는데, 지배하는 강역이 다른 후작가들과 비교해도 세 배가 넘는다.”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살려 대귀족들의 진짜 목표와 관계, 약점 등을 떠올렸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얌전히 충성을 맹세하고 앞으로도 제이릴리스를 따를지 고민했다.
“폐하. 동부의 아세노르타 후작가를 공작가로 승격시키는 게 어떠시옵니까?”
“승격? 그럼 셉텐트리오스 같은 거물을 하나 더 만들자는 뜻이냐?”
“직신이 적고 배신이 많을수록 관리는 편할 것이옵니다. 아세노르타는 언제나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했으니, 승격되면 오래지 않아 동부를 휘어잡겠지요.”
“……그래. 유능한 황제가 되려면 유능한 봉신을 두어야 한다. 그대의 조언을 삼가 경청하겠노라. 서부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나는 제국의 날고 기는 대귀족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자들을 꼽았다.
“폐하. 결국 시대의 물결을 잡아야 하옵니다. 아무리 강자들이 많다고 한들, 다른 강자가 황실과 힘을 합친다면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겠지요.”
“실로 그러하다.”
“서부의 철혈당주, 남서부의 열사암후, 남부의 적기제독. 이자들의 충성을 받아낸다면, 남은 자들도 물결을 따라 충성할 것이옵니다.”
“그래. 적극적으로 이용 하자구나. 아랫것들이 싸워 줘야 ‘우리’가 군림하지 않겠느냐?”
우리.
그 말을 들은 나는 어쩐지 울음이 나올 거 같았다.
“대공?”
“실례했사옵니다. 폐하. 아, 그들의 호위대가 자리할 공터는 만들어 놨사옵니다. 성벽 밖에도 주둔지를 조성하는 중이옵니다.”
“그래. 그대에게 맡기겠다. 예산도 인력도 마음껏 쓰도록 하라.”
“망극하옵니다. 또한…….”
우리는 오랫동안 앞날을 이야기했다.
“충성맹세를 받으시면.”
“당장 전 제국에 거쳐 침식자 놈들을 색출할 것이다!”
먼동이 틀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