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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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릴리스의 시녀 비네아와 발렌시아누스의 시녀 루디는 오전 8시 무렵에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하급 귀족 출신인 루디와 달리, 비네아는 이름 높은 궁정 귀족 출신이었다.
“같이 들어가자꾸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비네아는 언제나 루디를 상냥하게 대했다.
그건 루디가 6연발식 리볼버 마총 아가테와 마법소검 생동을 차고 다녀서도, 수도 하급 귀족 사이에 유명한 결투광이라서도, 손날로 위스키 병을 딸 수 있어서도 아니었다.
10살에 시녀로 들어와 20대에 한 궁을 관리하는 장이 되었다는 입지전적인 서사를 가진 인물이어서도 아니었다.
말랑한 볼을 조물딱거리며 녹색 눈이 빙빙 도는 걸 즐겨서도 아닐…… 거다.
“그래. 어제 두 분 다 밤새도록 여기 있으셨나 보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저렇게 주무시면 허리에 안 좋은데.”
두 시녀는 천장은 화려하고 방 안은 횅한 기묘한 집무실에서,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과 두 번째로 고귀한 사람을 발견했다.
아침 햇살이 동쪽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제이릴리스 황제와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집무실 책상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쌍둥이의 화사한 백금발은 햇살을 받아 반투명한 보석과 석양 받은 물결처럼 빛났고, 하얀 얼굴에는 그 또래에 어울리는 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두 시녀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깨우고 싶지 않다, 고.
“두 분의 저런 모습을 보는 건 이 세상에 저희뿐일 거예요.”
루디는 홀린 듯 중얼거렸고, 비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나도 그래서 이 일을 못 그만둔단다.”
“표정이 인상에 정말 중요하네요. 두 분 다 정말 천사 같으세요.”
“맞아. 그래서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폐하는 언제나 나른하고 잔혹해 보이시지. 발렌 전하도…….”
“네. 오만하고, 피폐하고, 위태롭고. 한 50살 먹은 잔혹한 대귀족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열여덟 소년 같구나.”
잠시 후 비네아가 말했다.
“나갈까?”
창문 너머로 행정관료들이 출근하는 게 보였다.
루디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발렌시아누스가 단잠을 자고 있을 때, 세베릭 하이시스 셉텐트리오스는 강 위에 있었다.
폭풍 치는 바다처럼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과 눈 내린 벌판처럼 고요한 회색 눈동자, 눈이 짓눌려 만들어진 얼음 같은 뺨과 유일하게 핏기가 도는 입술.
피폐한 눈매와 핼쑥한 뺨에서 느껴지는 책임자의 고독과 영광, 믿음직한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북방의 품격.
금실로 장식한 자주색 제복을 입은, 북부 그 자체가 사람이 되어 찾아온 듯한 사내.
때는 나는 새도 떨어질 만큼 무더운 한여름이었으나, 그의 곁에는 다시금 겨울이 찾아온 듯한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전하. 이 길을 반년 만에 다시 가게 되는군요.”
그 옆에는 언제나처럼 르세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검은 머리를 7대 3으로 가르마를 타서 단정히 묶고, 금테 외안 안경을 쓴 일류 행정가이자 빼어난 기사였다.
“그때와 달리 발걸음은 가볍네. 마음도 무척이나 편하군.”
“배도 다섯 척뿐이고, 수적들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닐세. 부관. 받으려고 가는 게 아니라, 주려 가기에 마음이 편한 것이네.”
르세나는 잠시 그 말뜻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 맹세를 하실 생각이시군요.”
“엄청난 곡식과 유민들을 선물 받았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겠지. 듣자 하니 돌아가는 길에는 델루시아토 백작령의 운하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더군.”
“독촉을 약간 했습니다.”
“약간?”
“……예. 약간.”
세베릭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대로, 그리고 평생토록 마수와 이물과 싸워 온 그는 자신이 인간에게 무른 구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제나 고맙군.”
바람이 불어와 뱃전에 나란히 선 두 남녀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런 말씀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마우시다면 그 발렌 대공을 들볶아 지원이나 더 받아내십시오.”
“그럴 수는 없지. 이미 충분히 피곤한 요구를 가져가고 있는데.”
르세나가 쏘아붙이고, 세베릭은 어울리지 않게 쓰게 웃었다.
“그게 무슨 피곤한 소식입니까? 우리 봉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시대의 과업이고, 전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바라던 일입니다. 사실 그리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경. 부동항을 달라는 건 충분히 대단한 일이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을 가지는 건 북부의 숙원이었다.
물론 북부의 전사들이 남하하는 걸 내심 두려워한 중부인들은 언제나 필사적으로 반대하고는 했다.
“이번에는 꼭 받아 갈 겁니다. 지난 반년 동안 전하가 닫은 마경이 몇 개고, 전하가 토벌한 마물과 이물이 몇 마리입니까?”
르세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세베릭은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여. 미안하게 되었네. 무리한 요구를 해야 하겠군.’
“그래. 르세나. 내 노력해보지.”
* * *
“각하. 준비되었습니다.”
‘백상아리’ 카리오사 서머린 아세노르타.
그녀는 동쪽 바다의 수호자 아세노르타 가문의 젊은 가주였다.
제국의 후작가들은 본디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대부분 왕국이었기에 어마어마한 넓이의 영토를 자랑했고, 아세노르타 가문은 다른 후작가들과 비교해도 2.5배가 넘는 영토를 보유한 대영주였다.
강철, 해룡, 폭풍 등 일곱 개의 함대를 거느렸고.
“그래. 그럼 가야지.”
닻 군도, 바다뱀 군도, 배들의 무덤 군도 등 동쪽 바다 수백 개의 섬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바다의 군대여. 해 지는 땅으로 가자.”
동방 대륙의 해적들과 군도에서 올라온 어인족들을 도륙해 왔다.
막대한 영토를 가진 대영주인 만큼 내륙에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후작으로 가지만. 왕위를 받아 돌아올 것이고.”
그녀의 책임감은 그런 호사와 나태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너희는 왕의 기사들이 될 것이다.”
아세노르타 가문에는 먼 옛날 동쪽 바다를 지배했다는 백상아리 괴물 서머린의 피가 흘렀다.
카리오스의 머리카락은 반투명한 물빛이었고, 그녀의 뽀얀 살결은 마치 비늘을 두른 듯 반짝반짝 빛났으며, 그녀의 앞니와 어금니는 상어처럼 날카로웠고, 그녀의 눈은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상어 비늘 같은 철판을 덧대 만든 찰갑을 입었고, 그 위로는 화려한 코트를 걸쳤으며, 혁대에는 ‘폭풍’과 ‘순풍’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마법검을 찼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탓에 27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회한 백전노장 같은 인상이었고, 폭풍전야같이 고요하면서도, 어딘가 격정적인 분위기를 둘렀다.
그건 아세노르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냥꾼의 본능이었다.
피 냄새를 맡으면 돌변하는 백상아리처럼.
“황제는 어리고, 대공은 망나니며, 동부는 멀다. 고깃덩이 하나 정도 물어 오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
이번에 그녀가 노리는 고깃덩이는 왕위였다.
독립 선언은 아니었다.
황제는 왕을 신하로 둘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황제를 섬길 거라면, 후작보다는 왕으로서 섬기는 게 아세노르타의 염원이었다.
“자. 깃발을 올려라!”
푸른 바탕에 하얀 상어가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일단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동부의 해적들과 싸워 온 바다 사나이 3천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중 체내에서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마나 유저가 1천이었고, 남은 2천도 어인족 목 몇 개는 단숨에 도륙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서쪽으로 가자!”
그녀는 그녀의 광대한 직할령과 수백 년간 충성을 바쳐 온 영지들을 지나며 호위대를 보충했다.
아세노르타의 봉신과 배신들이 정예병들과 기사들을 데리고 합류했고, 마침내 카리오사가 그녀의 영향권을 벗어났을 때, 그녀를 따르는 ‘호위대’는 5천에 달했다.
물론 세상의 어떤 미친놈도 제국에서 두 번째로 강한 마검사에게 도전하지는 않겠지만, 애초에 이 군대는 싸움이 아니라 무력 시위를 위한 것이었다.
“왕위를 위하여!”
* * *
“각하. 전사들이 준비되었습니다.”
끝도 없는 사막과 황무지가 펼쳐진 남서부.
‘열사암후’ 체사르 이두메아 시카리우스는 부관의 말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화려한 장옷을 입고 얼굴에 천을 둘렀다.
“이제 내가 준비되었으니, 진짜로 준비가 끝났군.”
그는 올해로 86세가 되는 노귀족이었으며, 일생을 잔인한 이교도 유목 민족들과 사막의 거대한 괴물들과 싸워 온 전사였다.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있지?”
“중장기병이 5백, 공포새 경장 기병이 2천, 암살자가 5백입니다.”
“그럼 충분하다.”
“수도는 복마전입니다! 조금 더 안전을 챙기심이 어떠십니까?”
체사르는 부관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껄껄 웃었다.
노인의 웃음소리가 소용돌이치는 모래바람 소리에 섞여 궁정 전체에 울렸다.
일순 노인의 보라색 눈동자에 섬뜩한 광채가 감돌았다.
“내가 그 복마 중 제일 위험한 마귀인데, 안전은 그들이 챙겨야 할 것이다.”
그는 13살에 이교도 유목 민족의 거대한 숙영지에 숨어들어 대족장 일족을 몰살하고 유유히 사라진 사막의 유령이었다.
암살자들의 후작은 거대 샌드웜의 유리질 이빨로 만든 검을 허리에 찬 후, 금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자. 그럼 어린 황제가 제 목숨으로 내게 얼마를 챙겨 줄지 기대해 보자꾸나.”
* * *
남쪽 바다에는 오늘도 거대한 전함들이 떠다녔다.
남부 제일의 대영주, ‘적기제독’의 원양 군선들은, 인간이 거대수와 마도공학을 이용하면 얼마나 거대한 배를 만들 수 있는지 알려주는 표본과 같았다.
산처럼 우뚝 솟은 검붉은 돛대에는 검은 촉수와 창이 그려진 붉은 깃발이 무시무시하게 휘날렸고.
붉게 칠한 선체와 간판에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비늘무늬가 그려져 있었으며.
선두에 유니콘의 뿔처럼 뻗은 검은 바우스프릿은 분명 그럴 용도가 아님을 알면서도, 적의 심장에 꽂아 넣는 기병창 같았다.
어지간히 거대한 배도 50m을 넘지 않는 세상이었지만, 귀중한 거대수를 아낌없이 써 만든 전함들은 바우스프릿을 제하고도 길이가 150m에 달했다.
도저히 선착장에 접근할 수가 없어 모든 보급은 보급선으로 옮겨야 할 정도였다.
그 거대한 배들 사이에서도, 1.5배 이상 큰 덩치로 유난히 눈에 띄는 배가 있었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그 붉은 전함의 이름은 ‘태고의 영면’.
세계 제일의 함대, 붉은 천창 함대의 대장선이었다.
붉은 천장 함대의 제독, 슈브유가티오 나발리스 콘텐티오는 기함의 선장실에서 해도 위에 자석 말을 올리며 전술을 구상하고 있었고.
“각하. 가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부관은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읍소하는 중이었다.
“싸움도 싸움이지만, 새 황제 폐하의 즉위식입니다. 각하의 힘은 대영주로서의 힘보다 총독으로서의 힘이 더 강하시잖습니까? 황제의 손가락질 한 번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싸움이 급하다.”
“제독님!”
“나는 가지 않는다. 폐하께서는 나 한 명의 맹세보다 세 달 뒤에 올라갈 남부 술탄들의 금을 더 좋아하실 것이다.”
* * *
“‘엔진’의 예열은 끝났나?”
“예. 각하!”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영주.
‘철혈당주’, 마커스 데보티오 인스트루멘툼은 멋들어진 세로줄 무늬 정장을 입고, 금테 외안 안경을 끼고 외쳤다.
“그럼 비행을 준비하라!”
훤칠한 키와 긴 팔다리를 뻗어 제스쳐하며, 유려한 미소를 짓는 그는, 꼭 어린 날의 추억을 심어 준 마술사 같았다.
“정말로 하시는 겁니까?”
“황제 폐하께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는 세계 제일의 마도공학자였고.
“나는 이 비공정을 타고 수도까지 날아갈 것이다!”
36년 인생에서 마법 같은 업적을 여럿 이루었다.
쿠구구구-!
땅이 진동하고, 8개의 비석이 중력을 거스르는 역장을 만들어 비공정의 선체를 가볍게 하고, 4개의 프로펠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거대한 영토에서 나오는 막대한 세금을 죄다 때려 박아 만들어낸, 시대를 뛰어넘은 기계가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향했다.
* * *
상아탑 원로들은 이야기했다.
“이제 우리는 자유다. 충분한 시약 공급처를 만들었어.”
“괜히 세속의 싸움에 엮여 피를 볼 필요 없지.”
“조용히 가자고. 조용히. 황제의 심기가 상하지 않도록.”
* * *
7월.
제국 제일의 대귀족들이 수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은 이를 보고 ‘찬탈자’ 제이릴리스가 ‘황제’ 제이릴리스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판가름할 기회라 말했으며.
발렌시아누스는 ‘황제’ 제이릴리스로 만들겠다 다짐했다.
이번에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어떠한 문제도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