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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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 하드리탄, 바르바토스는 수도 솔레타라온이 내려다보이는 본궁 한 넓은 회의실에서 다리를 떨고 있었다.
행정관들과 치안감들이 문지방이 닮도록 드나들며 수도 특이 상황을 보고했고, 발렌시아누스는 그 자리에서 원활한 연계를 통해 상황을 정리했다.
“곡물 선단 들어온 거 일단 북쪽으로 올려보냈습니다.”
“잘했네. 대영주들이 약탈할지도 몰라.”
“시장에서 상인 깡패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텐티아 경. 가서 으깨버리게나.”
“서쪽에 대형 키메라 출현!”
“세레라지에 누나, 아니. 대공 전하를 이곳으로 불러오게. 아무래도 벼락을 떨궈야겠어. 계속 오라 가라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낮겠지.”
“홍등가에서…….”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게! 내가 직접 처리하겠네.”
그들이 온종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정확히 언제쯤 대영주들이 도착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커피를 숨 쉬듯 마시며 제정신을 붙들고 물었다.
“경. 아세노르타 후작의 이야기는 들었나?”
텐티아는 포도주를 과일과 함께 끓었다 식힌 상그리아로 목을 축였다.
“들었습니다. 최강의 마검사가 호위대 5천을 거느리고 북상하고 있다는데, 이거 사실상 선전포고 아닙니까?”
“일단 폐하도 중부의 남작들과 기사들을 죄다 끌어모으셨고, 그들이 데려온 병력이 총합 3만은 되네.”
“그래서 성벽 밖에 군막이 저렇게 늘어서 있는 거였군요.”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하드리탄이 불쑥 끼어들었다.
“저들에게 나가는 식량 지원이 매일 금화 80닢에 달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액수를 듣고 놀라기보다는, 황실 행정관들의 물가안정을 칭찬했다.
“고생했네. 현물 확보하느라 수고했어.”
그러니 빨리 맹세 받고 돌려보내야 한다, 고 말하려던 하드리탄은 안경테 너머 푸른 눈을 깜빡이며 불쑥 튀어나왔던 기세 그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하드리탄은 행정의 천재였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전시 행정을 40년간 경험해본 경력자였다.
숫자로 셀 수 있는 게 제일 중요하지만, 그 숫자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대영주들이 수도에서 난리 못 피우게 하려면 징발을 해서라도 병사들을 쥐고 있어야 해.’
“바르바토스 경. 흑철기사단도 모두 나가 있나?”
발렌시아누스의 물음에, 바르바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네 개 기사단이 모두 출정했습니다.”
‘청은’은 매일같이 일대 수백 km를 배회하며 대귀족들이 모이는 이 자리에 어떤 미친 자들이 끼어들어 난동을 피우지 않을까 감시했다.
‘황동’은 정예병들을 이끌고 저 밖 중부 남작들과 기사들을 자신들의 편제에 끼워 넣어 임시 지휘부를 만들었다.
이는 대귀족들의 호위대가 그대로 공성전으로 이행해오는 미친 상황을 대비하는 한 수였다.
‘흑철’은 황동과 함께 움직였고, ‘백금’은 근위대를 이끌고 황궁을 방위했다.
“저희 흑철 기사들도 모두 치안감들과 함께 수도 안정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백금 기사들이 복도에 서서 농담 따먹기나 하는 중에 말이지요.”
바르바토스가 텐티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흑철과 백금은 대대로 앙숙이었고, 바르바토스는 흑철의 단장이었으며, 텐티아는 백금의 신성이었다.
텐티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농담을 나눌 만큼 여유가 있고, 여유가 있을 만큼 평소에 근위대를 잘 조련해 왔다는 말이지요. 흑철 휘하의 치안감들은 흑철기사들의 어설픈 지휘 탓에 매일 같이 격무로 시달린다고 들었습니다. 기사로서 애도를 표합니다.”
“하하. 고맙네. 텐티아 경. 그러나 어찌 황제 폐하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대들보다 애처롭지 않을까?”
텐티아가 바르바토스에게 말로 된 송곳을 찔렀고, 바르바토스가 말로 된 전투 망치를 휘둘렀다.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보다 약한 건, 상식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백금기사단은 혈통의 정점에 선 황실을 지키는 만큼, 누가 누구를 지키냐는 놀림에 오랜 시간 시달려 왔다.
그리고 47대 솔레타라스 제이릴리스는 인류 역사상 손에 꼽는 강자였고, 당연히 백금기사단에게 가해지는 놀림의 강도도 역사상 손에 꼽는 수준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두 기사가 으르렁거리는 걸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하드리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렇게 놔둬도 되나?”
발렌시아누스는 방탕하니 웃으며 루디가 따라준 상그리아를 마셨다.
“저렇게라도 긴장 풀어야지. 내버려 두도록.”
“아니. 저 둘 말고. 하늘에 뜬 저것 말이다.”
“응?”
발렌시아누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에서 거대한 비공정이 날아오고 있었다.
“세상!”
* * *
비행은 바람 마법계 술식을 이용하든, 순수한 힘을 다루는 파괴술을 이용하든 꽤 어려운 마법이고,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마도구는 언제나 최고급으로 분류되었다.
당장 내가 신고 있는 ‘아니마 라멘툼’도 백작가 두 곳이 30년 동안의 지난한 전쟁을 끝내준 감사의 선물로 보내온 물건이었다.
오래 날 수도 없고, 잠시 몸을 띄워 주는 수준의 마도구가 대귀족들이 황형에게 바치는 진심 어린 감사의 선물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비행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이었다.
그래서 다들 회귀 전의 제이릴리스를 두려워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강력한 마법을 쏟아내고, 어찌어찌 반격하려 하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니까.
사람이 하늘을 나는 일도 그렇게 대단한 일인데, 기계가 하늘을 날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
심지어 그 기계가 기함급 군선만큼 거대한 비공정이라면?
“발렌시아누스 전하. 저게 무엇입니까?”
텐티아 경과 바르바토스 경이 하나같이 넋 나간 표정을 짓고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루디는 들고 있던 상그리아 병을 떨어트렸고, 하드리탄은 안경알을 닦고 다시 쓰기를 다섯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회귀 전에 저걸 본 적이 있었다.
공중전함 니벨룽겐.
육상 착륙이 가능하도록 바닥을 개조한 150m급 전함에 여덟 개의 반중력장과 네 개의 마도공학식 프로펠……로? 러를 단 비공정.
드워프의 손재주와 엘프의 마법 능력과 인간의 광기를 그 피로 물려받은 천재, 철혈당주 마커스의 재능을 증명하는 기물이었다.
저걸 ‘한 대’ 운영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함대’를 운영하는 비용보다 크다고 했다.
니벨룽겐을 가지고 있으면 니벨룽겐에게 공격당하는 수준의 경제적 현상이 일어난다고도 했다.
나는 그 비공정이 수도 상공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며 애써 정신을 붙들었다.
나까지 위압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정신 차리게!”
“전하. 저걸…….”
“우리도 이 모양인데, 수도 사람들은 어떤 상태일 거 같은가?”
내가 바르바토스 경을, 바르바토스 경이 치안총감을, 치안총감이 시내를 바라보았다.
짐을 바리바리 싸서 거리로 뛰쳐나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말해야 하는 게 치안총감의 일이었고, 저 비공정을 몰고 온 후작을 맞이해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세상!”
나는 텐티아 경과 백금 기사들을 대공하고 황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도망쳐!”
“저게 뭐야?”
“철혈당주가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 40만 신민이 집 밖으로 달려 나왔고, 거리는 마차를 몰기는커녕 쥐새끼 한 마리 움직일 틈도 없었다.
맞이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맞이하려고 가는 것부터 문제였다.
“전하. 어찌할까요?”
“발렌. 좋은 생각 있나?”
하드리탄과 텐티아 경이 동시에 물었다.
나는 건물 지붕들과 운하를 흘깃하고 말했다.
“비공정은 동문 밖에 착륙하려는 거 같으니, 일단 동문으로 나가도록 하지. 지하수로로 이동할 거야.”
“아. 그 방법이 있었군.”
“그리고 세레라지에 누나에게 말해서 먹구름을 불러오게. 다른 마법사들이 같이 힘을 합쳐서 우박이랑 뜨거운 비도 좀 내리고. 그럼 집 안으로 돌아가고 싶어지겠지!”
텐티아 경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우물쭈물했고, 하드리탄은 그런 방법도 있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정관 하나가 다시 황궁으로 달려 올라가고, 나는 지하수로로 통하는 길이 있는 건물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 * *
나는 텐티아 경, 하드리탄, 루디와 백금기사들을 대동하고 운하 수문을 통해 동문 밖으로 나왔다.
쿠구구구-.
저 앞 평야에 150m 길이의 비공정이 착륙하는 중이었다.
중부 기사들과 남작들, 황동 기사들에게 일단 움직이지 말라고 말해 놓고, 포위부터 해야 하지 않냐는 멍청한 놈의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찬 뒤,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비공정 문 앞에 섰다.
치이이익!
선두 아래에서 증기를 뿜어내며 문이 열렸다.
아래로 열린 문은 그대로 넓은 널빤지 사다리 같은 통로가 되었고, 선체 안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내려왔다.
그 선두에 선 사내는 키가 훤칠하고 팔다리가 길었으며, 검은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정장을 입고, 통이 높은 탑햇을 쓰고 있었다.
오른쪽 눈에는 금테 두른 외안 안경을 썼는데, 눈매가 부드럽고 수염도 없어 전반적으로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이종족 혼혈의 대귀족답지 않게 여러모로 인간다운 모습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저 수도의 궁정 귀족이나 부르주아처럼 보였다.
실제로 내 등 뒤에서 텐티아 경이 ‘어찌 대영주가 저런 유약한 차림을 한다는 말입니까?’ 하고 경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식은땀이 흘려 셔츠가 흥건히 젖을 지경이었다.
“그대가 발렌시아누스 대공이군. 소문은 익히 들었네.”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나는 그의 온화한 인사에도 절로 긴장하며 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철혈당주’,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귀족’ 등으로 불리는 후작.
마커스 데보티오 인스트루멘툼이었다.
서부에 그보다 영지가 넓은 후작가는 있었고, 그보다 군대가 강한 후작가도 있었고, 그보다 역사가 깊은 후작가도 있었다.
“물론이네! 나는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는데, 그 누가 나를 불편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보다 위험한 대귀족은 없었다.
……내가 황족으로서 먼저 손을 내밀었고, 그는 얇은 하얀 비단 장갑을 낀 채로 나의 손을 맞잡았다.
예상대로 딱딱한 의수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기가 개발한 의수를 사용하기 위해 자기 팔을 자르고 의수를 붙인 인간을 우리는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기가 개발한 의안을 착용하기 위해서 자기 눈을 뽑은 인간도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호. 놀라지 않는군. 다들 움찔하던데 말이야.”
그가 진심으로 놀란 듯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마테오스처럼 칠흑 같은 어둠을 가진 눈동자도 아니고, 평범한 흑갈색 눈동자가 저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움찔한 건 제가 아니라 이 비공정을 본 수도 사람들입니다. 누가 보면 폐하의 충한 봉신께서, 무력 시위라도 하러 온 줄 알겠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 없잖은가?”
“일단 드시죠. 숙소와 만찬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커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움찔하고는, 비 오는 성벽 안을 바라보았다.
좋은 핑계가 생겼다는 듯 웃으면서.
“으음. 나는 맹세 당일까지 내 비공정 안에 머물도록 하겠네. 의수가 습기에 예민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멀미가 나서 만찬도 거절하도록 하지.”
하드리탄과 텐티아 경과 루디가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귀족 사회에서 입성과 만찬을 거절하는 건 손님 대접을 받기 싫다는 뜻이었고, 주인에게 해야 할 예의도 갖추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미친 듯 돌아가는 걸 느꼈다.
“그러십니까?”
이건 수도 치안을 못 믿겠다는 뜻일 수도 있고, 황제가 축객령을 내렸다는 소문을 유도하는 움직임일 수도 있고, 황제가 그를 푸대접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하려는 움직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불러 줄 때 순순히 들어오십시오. 저 잘난 비공정은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스트도 막아낼 수 있나 봅니다?”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귀족이 히죽 웃었다.
“그렇게 나와야 솔레타라스지.”
그가 연극처럼 과장된 손짓으로 제 뒤에 선 기사 하나를 불렀다.
덩치가 바르바토스 경만큼 크고 검은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망토로 온몸을 가린 기사였다.
나 역시 텐티아 경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면갑을 내리며 한 걸음 나섰다.
마커스가 말했다.
“자. 어디 한 번 끌고 가보게나.”
나는 턱을 쳐들고 답했다.
“한 달 내내 황궁 정원의 천막에서 잘 준비나 하십시오. 처량하게 밤이슬을 맞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