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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76화 (13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76화

(176)

기나긴 하루도 결국은 끝났다.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별궁으로 돌아가 물소 가죽 소파에 드러 누웠다.

루디가 포도주에 과일을 넣고 끓인 뒤 차게 식은 상그리아를 들고 와 주석잔에 따라주었다.

“드세요. 발렌 님.”

“고마워. 그런데 이거 말고 독한 걸로 주면 안 될까? 한 잔 마시고 드러누워 자고 싶은데.”

“안 돼요. 저랑 같이 내일도 5시에 본궁으로 나가셔야죠.”

그랬다.

이제 시작이었다.

충성 맹세를 할 모든 대귀족이 모인 것도 아니고, 서부의 모든 대귀족이 모인 것도 아니고, 고작 서부의 후작 하나가 막 올라온 것뿐이었다.

그의 목표는 편하게 알아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목표는 호탕하게 들어주며 마음 편히 감사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기 연구욕 때문에 근처 나라들을 침공하고 재물을 약탈하겠다는 말이니까.

물론, 그 나라들 역시 회귀 전에 제이릴리스를 죽이려 별 짓거리를 다 했고, 언젠가 개작살을 내버리겠다고 다짐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적어도 침식자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교회랑 같이 눌러야 했다.

그때 나는 루디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녹색 눈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할 말 있어?”

“아, 아니요. 그냥 오늘은 무사히 넘겼다, 싶어서요.”

그것도 잠시, 그녀는 어느 때 같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비공정이 날아올 때는 진짜 큰일 날 줄 알았어요.”

“나도야.”

“온종일 마총을 손에서 안 놨더니 아까 쥐가 났어요.”

“아이고. 손 줘 봐. 마사지해 줄게.”

나는 루디의 손가락을 마디마디 풀어주었고, 루디는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발렌 님 말대로 정원 근처 다른 궁 옥상에 올라가서 후작 머리를 조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후작이 제 쪽을 바라보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미친놈. 거리가 800m도 넘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 의안이 내 생각보다 더 좋은 거였나?”

아직 그 정도로 기술이 발전하지는 않았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궁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텐티아 경이 근위대원들에게 경례를 받으며 정원에 들어왔다.

판금 갑옷 입고, 옆구리에 투구를 끼고, 와이번 호출용 뿔피리까지 든 완전 무장 차림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게 미친 듯 달려온 거 같았다.

분명 후작이 돌아가자마자 관사로 돌아가서 자라고 했는데…….

오늘 새 경지에 올랐으니 푹 쉬어야 마나로드에 무리가 안 갈 텐데…….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텐티아 경이 늠름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창문을 열고 다급하게 외쳤다.

“전하. 당장 본궁으로 출석하라는 황명이십니다.”

짧은 붉은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피처럼 진득한 붉은 눈동자에는 경악과 혼돈이 소용돌이쳤다.

북부의 심장부에서 포위되었을 때도, 우리 둘이서 수백 마리의 침식자와 싸워야 했을 때도, 그레모리우스 후작가의 황금 기사 수십 명을 상대했을 때도 의연하던 텐티아 경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복을 걸쳤다.

“무슨 일인가?”

“방금 청은기사단이 야간 순찰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동부의 대귀족들이 대로를 따라 중부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우리가 불러서 오고 있는 거잖나?”

“그 수가 문제입니다.”

나는 발걸음과 생각을 모두 가속했다.

대귀족들은 호위대로 수천씩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잦았다.

아무리 적어도 기사와 전투마법사 수십, 거기에 정예병 약 1천에서 2천.

각종 치중대와 보급대와 하인과 하녀, 시종과 시녀, 종자와 부관, 행정관과 요리사 등등을 더한다면 3천도 우습게 나왔다.

‘철혈당주’, 인스트루멘툼은 위험하고도 강력한 자였으나, 서부 내에서도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많았다.

당장 이곳으로 올라오는 중인 프로이하이트도 전대 후작 치세에 인스트루멘툼과 몇 차례 치고받은 사이였다.

반면 ‘백상아리’, 아세노르타는 동부의 지배자였다.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는 강자가 아니라, 혼맥과 인맥, 항구와 강을 통한 물류, 함대를 통한 보호 등으로 다양한 영향력을 주고받는 권력자였다.

6천 정도는 쉽게 동원할 수 있을…….

“추정 병력이 보급대를 제외하고도 6만 5천에 달한다고 합니다!”

* * *

외무대신이 게거품을 물며 행정관들을 독촉해 전령을 보냈다.

“‘반역을 꿈꾸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대신. 문장이 너무 과격하십니다. ‘어찌하여 충성맹세를 하려고 오는데 6만 대군을’ 정도로 정리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누가 교회에 가서 홍의주교 한 분만 모셔 오게! 설마 성직자를 죽이지는 않겠지.”

황동기사단장이 평야 회전을 대비해 편제를 짜 와서 제이릴리스에게 보고했다.

“중앙에 보병 2만과 전투마법사들을 두고, 우익에 중부 기사들과 중장기병을 1천…….”

청은기사단이 말없이 마도구를 정비하고 전투마법사들과 함께 마법 폭격 준비를 했다.

“두려워 말도록.”

“우리는 하늘의 기사다.”

재무부 행정 관료들이 만약 그들이 정말로 호위대일 경우, 매일 그들이 먹어 치울 곡식과 고기의 양을 파악하고, 그것이 수도의 물가에 어떻게 영향을 줄지 파악했다.

잠시 후 하드리탄이 내게 와 말하기를.

“발렌시아누스. 만약 저들이 전쟁이 아니라 오로지 충성맹세를 위해 온 호위군이고, 모든 물자를 수도에서 사 먹는다고 했을 때,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경제적 혼란은…….”

“어려우니까 짧게 정리해서 말해 봐.”

“거두절미하지…… 3달 후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수도 전체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1달 3주 차부터 식량 분쟁이 생길 거다. 물론 이 모든 예측은 앞으로 모여들 대귀족들이 데려올 병사들을 고려하지 않은 수치다.”

저들이 적군이어도 망하고, 아군이라도 망한다고 한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6만 5천이면 거의 수도 인구가 15% 가까이 늘어난 건데, 식량은 그렇게 갑자기 늘릴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은 식량을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15%다.

수요가 15% 증가하면 가격은…… 상상도 하기 싫다.

게다가 앞으로 서부, 북부, 남서부, 남부에서 찾아올 대귀족들과 그 호위병들을 생각하면…….

“치안총감! 지금부터 배급제를 준비하고, 폭동 일어나기 쉬운 거리를 찾아서 위병소를 꾸려 놓게!”

나는 이를 덜덜 떨며 외무대신에게 달려갔다.

“대신. 저들의 진군 경로에 병사를 3천 이상 수용 가능한 대도시가 있나?”

대신이 거품을 물며 답했다.

“대공 전하! 중부에 대도시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부를 순찰하고 온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중부는 모두 크고 작은 남작령들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아니, 그걸 찢어 놓은 게 우리 황실이었다.

그곳의 기사와 남작들을 죄다 불러 모아 정보력 대신 군사력을 선택한 주체도 황실이었다.

“세상!”

나는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단 최악의 상황은, 6만 5천의 군대가 호위대를 가장하고 성벽 아래까지 도달해서, 제이릴리스를 황제로 인정 못 하겠다며 반란군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들의 진의를 묻고자 전령을 보냈지만, ‘백상아리’가 대답을 해 줄지는 모르겠다.

……회귀 전의 그녀는 다른 귀족들처럼 반란 연합의 일원이었다.

물론 그때 최초로 전쟁의 봉화를 켠 건 아세노르타가 아니라 플라니티에스였다.

하지만 아세노르타는 이번 생에서도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균형과 평화를 깨고 ‘찬탈로 즉위한 황제에게는 충성할 수 없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심지어 아세노르타 가문은 과거 황태자파였다.

카리오사 역시 이모가 황제의 비로 들어갔고, 사촌 언니를 제이릴리스에게 잃었다.

나는 이를 덜덜 부딪치다가 제이릴리스에게 향했다.

그녀의 시종들이 황제의 검은 판금 갑옷을 준비하고 있었고, 제이릴리스는 치렁치렁한 백금발을 한데 올려 묶고 있었다.

“폐하. 소신을 보내주십시오.”

황제가 딱 잘라 말했다.

“불허한다.”

“소신이 가서 폐하의 뜻을 전하겠나이다.”

우리는 이미 며칠 전 아세노르타를 공작으로 승격시켜주고, 세베릭의 셉텐트리오스가 북부에서 그리하듯 동부 전체를 관장하게 하겠다고 이야기한 바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옛 권위를 그리워했고, 폐하는 그들이 바라는 걸 주실 수 있으며, 카리오사는 충분한 힘을 가진 마검사이옵니다. 그녀를 공작으로 봉하는 일은 결코 황실의 굴욕이 아니옵니다.”

잠시 홀에 침묵이 어렸다.

“…….”

모두가 입을 닫고 소드 마스터 황제에게 ‘지금 겁먹은 게 아니냐?’ ‘자존심 부리는 게 아니냐?’라고 말한 대공이 짓이겨지는 모습을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제이릴리스를 믿기로 했다.

그녀를 바꾼다는 건, 그녀가 바뀌리라고 믿는다는 뜻이었다.

지금 당장 하늘로 날아올라 ‘진노의 창’을 내던지고 유성 소환을 준비하는 대신, 무력, 정치력, 행정력을 적절히 사용해 최소한의 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으려 하리라 믿는다는 뜻이었다.

황제가 나른하고도 잔혹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았다.

그대는, 하고 중얼거린 제이릴리스가 청은기사단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구름 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

“예. 폐하. 내한 마도구를 이용하면 2시간까지는 구름 위에서 머물 수 있고, 은폐 마도구를 이용하면 추가로 3시간까지 눈을 피할 수 있습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위기에 처한다면, 구해 오거라.”

나는 제이릴리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텐티아 경이 와이번핏 쪽에 대고 그녀의 것과 내 것, 두 개의 뿔피리를 불었다.

와이번들은 어릴 때부터 마법적으로 훈련되어 자기 주인의 뿔피리 소리를 알아듣는다.

제이릴리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분명 나보다 한 뼘은 작건만, 무척이나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단조로이, 그러나 분명 약간의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이번에도 마법이라도 부린 듯 그 백상아리를 낚아 오겠지. 짐은 용언과 써클 마법에 통달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그대의 성취를 짐작할 수 있는 마법사거늘, 왜 그런 재주를 부릴 자신은 없는지 모르겠구나. 그래…… 그대여. 마법이라도 부린 듯 그 백상아리를 낚아 올 자신이 있는가? 되려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나는 환하고 또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믿어주시옵소서. 폐하. 그레모리우스가 그랬듯 삽시간에 해치우고 오겠사옵니다.”

아무 생각도 없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 * *

아세노르타의 군대는 약 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청은 기사들의 말을 듣자 하니 수십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깃발의 문양들을 하나둘 물어보았고, 이내 한 가지 다행스러운 소식을 알아냈다.

아세노르타가 단독으로 6만 5천 대군을 뽑아낸 게 아니라, 동부의 모든 대귀족들이 함께 온 것이었다.

물론 그 괴물들이 의견을 통일하고 함께 왔다는 거 자체가 문제기는 했다.

‘이참에 독립해 봅시다!’하고 ‘다 같이 충성 맹세하려고 가는 길에 만담이나 나눕시다.’ 중 뭐가 대귀족들을 뭉치게 할 확률이 높은지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청은 기사단의 기사들이 하나둘 고도를 높이고, 나와 텐티아 경은 서서히 하강했다.

800m 정도 되는 높이에서 우리를 향해 환한 빛줄기가 뿜어졌다.

밤의 어둠이 곧바로 갈라질 만큼 환한 빛이었다.

“와이번이다!”

“황실에서 사람이 왔다!”

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내달리고, 지상에서 역장과 파괴술이 캐스팅되며 푸른 빛이 뿜어졌다.

후작가의 기사들과 정예병들이 한 천막 주변으로 모여들고, 또 한 무리의 정예병들과 마법사들이 붉은빛과 녹색 빛을 내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착륙 유도였다.

나와 텐티아 경은 순순히 그 유도를 따라 숙영지 한가운데의 공터에 착륙했다.

정예로운 병사들, 폭풍을 일으키는 전투마법사들, 바다괴물과 싸워 온 기사들이 우우 몰려와 나와 텐티아 경을 포위했다.

횃불 수만 해도 300개는 넘는 거 같았다.

어쩐지 집단 사냥 당하는 마수나 이물, 침식자의 기분을 알 거 같았다.

텐티아 경은 검을 뽑으며 했고, 나는 한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다.

이 굶주린 상어 새끼들은 피를 보면 더 날뛰었다.

나는 그들이 묻기 전 나를 소개했다.

눈동자를 세로로 바꾸면서.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제국의 대공이자 황제 폐하의 치안감이다. 카리오사 후작은 어디 있나?”

내 머리 색과 눈 색을 보고도 내가 황족인지 모를 만한 바보는 여기 없었다.

짧은 웅성거림이 퍼지고, 3분여 후 포위망의 한쪽이 갈라지며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이 밤에 대공이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백상아리’ 카리오사 서머린 아세노르타.

반투명한 물빛의 머리카락과 비늘처럼 반짝이는 뽀얀 살결, 상어같이 뾰족한 이빨과 나와 같이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

상어 비늘 같은 철판을 덧대 만든 찰갑을 입고, 그 위로 화려한 코트를 걸쳤으며, 혁대에는 ‘폭풍’과 ‘순풍’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검을 찬, 제이릴리스 다음가는 마검사.

27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전노장 같은 인상이었고, 키는 텐티아 경보다도 큰 장신이었으며,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그건 아세노르타 가문이 가지고 있는 사냥꾼의 본능이었다.

피 냄새를 맡으면 돌변하는 백상아리처럼.

“들어와라. 여름밤에 포도주 한잔할 시간은 있을 거 같으니.”

내심 꽁꽁 묶여 끌려갈 각오를 했던 거치고는 좋은 대접이었다.

그런데…… 방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발렌 전하.”

“나도 봤네.”

나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그 얼굴을 붉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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