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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77화 (13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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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 중 ‘순수한 혈통’ 운운하는 자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물론 수백 년에서 천년 단위로 이어져 온 이종족 혼혈의 대가문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 옛날에 용과 통혼해 제국을 세운 사내가 우리의 시조니, 혈통주의 자체를 비웃을 생각은 없다.

당장 나만 해도 혈통 덕에 쉽게 큰 노력 없이 불꽃 마법을 다뤘고, 마나 블레이드와 마법을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마검사가 되었으며, 용찬 의식도 성공했다.

귀족이란 엘프의 피 덕에 외모가 수려하고 마법을 잘 다루며, 드워프의 피 덕에 손재주가 좋아졌고, 오거의 피 덕에 육체가 강인해진 자들이고.

황족은 거기에 용의 피를 더해 혈통의 정점에 선 자들이다.

‘하프’ 정도가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좋다는 피는 다 섞고, 부작용을 치밀하게 계산해 몇 종족의 피로 상쇄하면서까지 만들어낸 혈통이다.

그래서 나도 제이릴리스도 다른 귀족들도, 딱히 이종족 혼혈이라는 게 외모에서 드러나지는 않았다.

카리오사는 달랐다.

“그래서 왜 이 밤중에 황형 발렌시아누스가 이 카리오사의 막사로 찾아온 거지?”

그녀의 피부는 비늘을 두른 듯 반짝였고, 손톱은 진주같이 불투명했으며, 이빨은 상어처럼 뾰족했다.

별다른 기운을 끌어 올리지 않았는데도 홍채가 맑은 청회색이었고, 동공은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분위기 자체도 조금 더 야생적이었고, 위험한 사냥꾼의 기세가 느껴졌다.

“혹시 제이릴리스 황제 폐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인가?”

물색 머리를 거칠게 묶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매일같이 제이릴리스를 마주하는 나도 오금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마검사의 기세는 그만큼 강력했다.

나는 호화로우면서도 정갈한 막사 안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2, 3중으로 가죽과 융단을 깔았고, 촛불 대신 주먹만 한 수정 마도구로 막사를 밝혔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녀의 등 뒤로 넓은 침상이 보였고, 앞과 뒤, 옆의 벽은 모두 위로 걷어 올릴 수 있는 형태였다.

“그 전에 보내 드린 자들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텐티아 경이 얼굴을 굳히고, 카리오사가 꺄르르 웃으며 손짓했다.

카리오사 뒤에 서 있던 기사가 동부 방언으로 뭐라 외치자, 왼쪽 천막 벽이 걷혀 올라갔다.

“읍! 읍!”

그 뒤에는 먼저 이곳에 왔던 전령들이 입에 재갈을 문 채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텐티아 경이 붉은 눈을 번뜩이고,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아무리 동부의 대후작이라 하셔도 황제 폐하의 사절을 이렇게 대하실 수는 없습니다. 저들이 어떤 무례라도 저지른 겁니까?”

제발 무례를 저질러서 저런 꼴이 됐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냥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라서 억류했다고 나오면 나도 곧 같은 신세가 될 테니까.

카리오스가 히죽 웃으며 답했다.

“폐하의 충신인 나를 반란군 취급하는 무례를 저질렀지.”

일단 자기가 반란을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보기에는 6만 5천 대군이 너무 무서웠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사오니, 부디 저들의 재갈을 풀어주시고, 궁으로 돌아가 후작의 진심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시지요.”

“소문과 달리 입이 부드럽구나.”

“후작 앞에서 입이 걸걸할 자가 이 대륙에 있겠습니까?”

“후작을 둘이나 죽이고 하나에게 엿을 먹인, 수도 제일의 망나니라고 들었는데.”

“망나니에게 제일 중요한 건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겁니다. 그래야 바다 괴물에게 다리를 뜯어먹히지 않지요.”

후작 옆에 선 기사와 전령들을 꿇리고 있던 기사가 눈을 치떴다.

하지만 서머린의 후예는 내 말이 꽤 흡족한지, 깔깔 웃으며 손짓했다.

“붉은 기사야. 저들을 수습하고 황궁으로 돌려보내라. 나는 네 주군과 긴밀히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

텐티아 경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답했다.

“각하. 외람되오나, 저는 발렌시아누스 전하의 기사이옵니다.”

“음. 정말 외람되구나. 붉은 기사야. 만약 내가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거 같으냐?”

붉은 눈과 청회색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텐티아 경이 주먹을 말아 쥐고 그 자리에서 버텼다.

일순 공기가 무거워지고, 사방에 날 선 검이 가득한 듯한 감각이 들었다.

기사 간의 치열한 살기 싸움이 벌어졌다.

아세노르타의 기사들이 하나둘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나는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려 눈동자를 세로로 바꾸고, 최대한 단호하게 일갈했다.

“텐티아 경!”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제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텐티아 경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지만,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카리오사가 대단하다는 듯 양손을 올리고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해 보였다.

“황제 폐하의 기수들을 챙겨 돌려보내 주게. 그다음에 막사 앞에서 기다리게나.”

“전하……!”

“어서.”

……이 대륙에서 제이릴리스를 제외하면 카리오사를 1대 1로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베릭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는 수도에 없다.

따라서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뿐이다.

손끝 하나 안 다치고 돌아가거나, 효수되어 전쟁의 봉화가 되거나.

텐티아 경도 그걸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를 나서는 그녀에게 아세노르타의 기사들이 놀라움과 경계심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몇 초라고는 하나, 제국 제 2의 마검사를 상대로 버텨낸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막사 옆이 닫혔다.

흡음결계라도 작동했는지 밖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시녀와 시종이 들어와 주석 잔에 포도주를 철철 넘치게 따라주었다.

카리오사가 가학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동부 최고의 명주인 오리엔사그 지방의 포도주지. 이제 오붓해졌군. 자, 대공. 사랑과 전쟁 이야기를 해보자고.”

설렘에 찬 목소리로.

* * *

발렌시아누스는 회귀 전 40년 동안 다양한 상대와 다양한 외교를 해보았고, 그중에는 상대의 막사에 불부터 지르고 보는 ‘윽박’ 외교부터, 상대의 발에 입이라도 맞출 듯 구는 ‘부채감’ 외교까지 있었다.

‘회귀 전에도 공식 문서에 묘하게 제이릴리스의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많이 적혀 나왔지. 나를 포로로 잡으려고 하기도 했어. 백발 금안이 취향인가?’

그는 40년간 강약약강의 삶을 살아가며, 배운 걸 써먹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가장 절실한 순간 약자일 때가 많았고, 승리할 방법을 고를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사랑 이야기라. 그럼 황실의 사랑부터 이야기해보지요.”

유쾌하니 넘긴 금발은 수정구가 내뿜는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고, 높고 멋들어진 콧대와 깊고 피폐한 눈은 얼굴에 입체적인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며칠간의 피로로 갈라진 붉은 입술에서는 짙은 마나를 품은 진득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카리오사가 그 핏방울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미안하네. 대공. 반쯤 본능이라서.”

“이해합니다. 후작.”

“말을 끊어서 미안했네. 황실은 어떤 사랑을 하나?”

“사랑은 신뢰고, 신뢰는 나눔입니다. 권리의 의무를 나눠 주고, 그걸 잘할 수 있으리라 믿는 거죠.”

발렌시아누스는 자연스럽게 후작의 시종의 시켜 동부의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그 뻔뻔한 태도에 카리오사가 혀를 내둘렀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신화적인 강자 앞에서 적당히 도발적인 태도로 관심을 끄는 건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전문가였다.

“아시겠지만…… 제국은 너무너무 넓습니다. 오시는 길에 직접 보셨겠지만, 도로도 도저히 제 몫을 못 하죠. 황실로서도 각지의 직신들을 하나하나 챙기는 게 솔직히 버겁습니다.”

“그래. 나도 오면서 그냥 혼자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네. 내 봉신들의 영지도 육로로 순회하기가 힘든 판이지. 황실의 고충 역시 이해할 수 있어.”

“!”

한 번 눈이 마주쳤다.

발렌시아누스는 카리오사의 입가에 떠오른 여유로운 웃음을 보았다.

‘‘황실의 고충’이라. 자기가 동부의 패자가 되는 걸 당연시하려 하고 있다. 역시 아세노르타. 만만찮은 상대다.’

“그래서 지금 논의되고 있는 방향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직신 백작 중 세가 강한 자들을 후작으로 새로이 봉해서 일대의 직신 백작들과 군소 귀족들을 통폐합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나온 적도 없고 앞으로도 나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입가에 침도 안 바르고 이야기했고, 카리오사는 그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사냥꾼의 본능을 가진 그녀는 발렌시아누스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다는 사실을 대충 알아차렸지만, 일단 눈감아주고 뭐라고 더 지껄이는지 들어 보기로 했다.

“두 번째는…… 후작 중 충성스러운 자를 공작으로 봉해 동부 전체의 관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위험한 말이로군. 대공. 다른 막사에 있을 직신 백작들과 후작들이 들으면 눈을 뒤집으며 경악하겠어. 충성을 맹세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질 거 같은데?”

새 공작이 그들을 다 때려눕혀서 복속시키고, 직신이 죄다 배신이 되는 걸 방조하겠다는 말이었다.

카리오사가 사냥꾼처럼 웃었다.

당장이라도 막사 문이 활짝 열리고 직신 백작과 후작들이 방금 뭐라고 했소, 이건 황실이 봉신들을 배반한 것이오, 라고 소리칠 거 같았다.

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동부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아세노르타 ‘왕’하고 싸웠지.’

이미 동부의 직신 귀족들도 아세노르타에게 어느 정도 넘어가 있었다.

애초에 귀족들이 모여서 행군해왔다는 거 자체가 암묵적인 합의나 협박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배신들이 황제를 싫어해도, 직신만 황제를 좋아하면 아무 문제 없다는 게 봉건제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카리오사 공작, 아니. 후작. 하하. 이거 말실수를 했군요.”

말실수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실수였다.

카리오사는 가증스러운 사고를 친 고양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렌시아누스가 예상했던 제안을 했다.

“미안해서 어찌나? 나는 공작이 아니라 왕이 되고 싶은데.”

제안을 예상한 이상 답도 준비되어 있었다.

“공작을 거치지 않고 왕이 될 수는 없잖습니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황족과 결혼하면 되지 않겠어?”

“황송하오나. 지금 솔레타라스에는 후작과 격이 맞는 사내가 없습니다. 세레라지에와 헬레나, 데니아는 모두 여성이고, 하드리탄은…….”

카리오사가 사냥꾼처럼 웃었다.

“아니. 나는 발렌시아누스 그대를 이야기하네. 황형 정도는 남편으로 맞아야 왕작(王爵)을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어…… 지금 제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나와 결혼하자는 말이네.”

왕작, 공왕, 대공은 비슷한 직위였고, 호칭도 모두 ‘전하’였으나, 그럼에도 왕(King)이라는 호칭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발렌시아누스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서부, 남서부, 남부의 귀족 중 비슷한 제안을 할 만한 자는 없다. 물론 나를 부마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있겠지만, 카리오사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야. 세베릭도 아직 미혼이고.’

샛노란 눈을 몇 번 깜빡이면서.

‘일단 충성맹세만 잘 이루어져도 내 계획 절반은 성공이다. 내전이 없으면 침공도 없어. 군도의 해적들과 어인족, 침식자, 바다의 거대한 이물들과도 싸우기는 싸워야 해. 카리오사는 회귀 전에도 끝끝내 침식되지는 않았지. 내가 카리오사의 남편이 되면, 카리오사가 군대를 보내서 제이릴리스의 토벌 작전을 도와주게 할 수 있다.’

어차피 귀족, 왕족, 황족의 결혼은 모두 정략결혼이었다.

‘이종족 혼혈이니 우리 둘 다 천천히 늙을 거고, 오랫동안 아름답겠지. 자식이 태어난다면 서머린과 용의 후예들이니 아주 강할 거고.’

그러나.

‘공작이나 대공 정도면 나를 팔아 군대와 평화를 살 만도 하지만, 왕위는 안 돼. 조공국과 봉신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신민들이나 침식자들이 제이릴리스가 영토를 잃었다고 생각하게 할 여지가 있어.’

발렌시아누스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지고 달콤한 핏방울이 맺혔다.

그 핏방울을 보며 카리오사가 다시 입맛을 다셨다.

“일단 수도 안으로 들어가서 계속 이야기해보는 건 어떠십니까? 아무래도……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땅히…… 아가씨, 아니. 폐하를 만나 뵙고 이야기해야 옳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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