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78화
(178)
카리오사는 발렌시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6만 5천의 대군을 솔레타라온에서 하루 정도 걸리는 곳까지만 진군시킨 것이다.
그녀와 함께 온 동부의 직신 대영주들은 3백 명 정도의 호위대와 한 무리의 행정관들만을 이끌고 솔레타라온 성벽 아래에 도착했다.
노구의 궁무대신은 그들을 정중히 대접했고, 동부의 직신들은 만족스럽게 전세 호텔로 향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카리오사가 발렌시아누스와 함께 성벽 아래에 도착했다.
4천에 달하는 호위대를 이끌고서.
경비병과 치안감들은 인원 제한은 300명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4천의 정예병을 이끌고 온 사람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5천의 정예병을 가진 사람뿐이었다.
중부에서 불러 모은 3만 대군을 이끄는 황동기사단장이 협박 아닌 협박, 읍소 아닌 읍소를 하고, 치안총감은 카리오사에게 말도 안 되는 금액의 무장세를 요구했다.
그러나.
“내겠다.”
“예?”
“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비켜라.”
금괴로 가득 찬 궤짝을 내미는 카리오사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몸의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지.”
금으로 쌓은 방벽은 더 많은 금으로 만든 망치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렇게 4천에 달하는 대군이 솔레타라온 성벽 안으로 들어왔다.
푸른 비늘무늬를 새긴 동부 바다사나이들의 갑옷과 백상아리 깃발을 본 중부의 시민들은, 그들이 제발 약탈자나 반란군으로 돌변하지 않기만을 벌벌 떨며 기도했다.
아무리 정예병들이 상대라도 황제가 패배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황제가 그들에게 충성을 받기 위해서 ‘다소의 난동’을 눈감을 거라는 예측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서머린의 후예를 따르는 바다 사나이들은 결코 용병 같은 범죄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철통같은 군기와 결속력으로 뭉쳐 있었고, 수도 시민들을 함부로 위협하지 않았다.
밤마다 그들이 홍등가로 몰려가리라고 생각해 치안감들을 증설해놓은 바르바토스와 돈 쓸어 담을 생각만 하고 있던 적가면이 당황할 정도였다.
물론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발렌시아누스와 하드리탄은 가문당 1천 이상의 군대를 성안에 들일 계획이 없었고, 당연히 각지에 마련해 둔 공터로는 4천 병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일단 동쪽에 죄다 밀어 넣어!”
“그럼 여섯 가문의 주둔지를 새로 구해줘야 합니다.”
“황궁 근처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간을 만들어.”
“시장이 하나 있습니다! 창고 부지까지 포함하면 공간도 충분합니다.”
“좋아. 대귀족들의 주둔 기간에는 폐쇄한다.”
“그럼 시민들과 상인들의 반발이 뒤따를 겁니다.”
황실의 행정관들과 하드리탄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었고.
“발렌시아누스…….”
“두 번이나 침식자가 들어왔다고 할 수는 없지. 무장세를 받은 걸로 배상해 줘라. 굶어 죽지는 않도록.”
“막을 수는 없었나?”
“6만 5천을 4천으로 줄였지. 더 필요했나?”
“……아니. 충분하다.”
“그래.”
발렌시아누스는 시장 위에서 와이번을 타고 날아다니며 낮은 온도의 불길을 일으켰다.
“하하하하!”
화염 파도가 시장을 휩쓸고, 상인들이 도망친 자리에 치안감들이 와 현장을 정리하고 군대를 들였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군대를 들이기 위해 시장을 폐쇄했음을 알아챘다.
“뇌물을 얼마나 받았으면!”
“그 미친 망나니 새끼!”
“우리 부모님은 도망치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셨어.”
욕설이 터져 나왔다.
황궁 소속 시녀들과 시종들은 밖에 나다니기를 무서워해서, 심부름꾼을 시켜 장을 볼 정도였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언제나 욕을 먹었고.
“4천 병력 모두 숙영지를 꾸렸습니다.”
“아직까지 흑철기사단이나 치안감들과의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알현 준비가 끝났습니다.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언제나 아파했으며.
“그래. 바로 올라가겠다.”
이번에도 견뎌냈다.
* * *
“결혼동맹이라. 그대를 부마로 들이고, 왕이 되고 싶다는 말이군.”
“그렇사옵니다. 폐하.”
발렌시아누스는 정중히 보고했고, 제이릴리스는 관절반지 낀 손가락으로 집무실 책상을 두드렸다.
툭, 툭, 툭.
황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 조건은 불허한다. 동부가 독립하면 북부에서도 독립의 목소리가 더 커질 거고, 그럼 제국의 국토는 반으로 쪼개진다. 짐은 제국을 안정시킨 다음에는 팽창 정책을 통해 전 대륙을 침식자들의 위협으로부터 해방할 생각이었다. 짐의 뜻에 역행하는 조건을 들어줄 수는 없어.”
“폐하께서 왕작을 거부하시신다면, 카리오사는 필시 대공 작위와 소신을 원해올 것입니다.”
소신을 원해온다고 말하는 발렌시아누스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혈통으로 누렸으면 혈통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고, 당연히 정략결혼도 할 수 있었다.
하물며 카리오사는 대귀족이자 신비한 분위기의 미인이었고, 성격 역시 그리 잔악하거나 비틀려 있지 않았다.
결혼을 굳이 계약에 비유한다면, 꽤 남는 계약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불허한다. 짐은 아직 그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구나.”
“폐하. 하오나.”
발렌시아누스가 항변하려 했으나, 제이릴리스는 단호히 답했다.
언제나 나른한 여유가 배어 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만.”
거부할 수 없는 용언의 권능이 집무실에 울렸다.
“짐은 짐과 그대가 10살일 때, 그대를 한 번 지켰지. 그 뒤로 고작 8년이 흘렀어.”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날 앞에서 그는 영원한 죄인이었다.
제이릴리스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 이상, 그가 할 수는 있는 건 순순히 따르는 것뿐이었다.
“받들겠사옵니다. ……하면 카리오사 후작은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동부를 맡겨 관리하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분명 유능한 대귀족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잠시 커피잔을 기울였다.
황제의 황금빛 눈동자에 가학적인 살기가 스쳐 지나가고, 다시 그 목소리에 나른한 열기가 깃들었다.
“카리오사 후작을 황궁으로 불러라. 일단 오른팔을 자르고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폐하! 진정하시옵소서.”
“그럼 그대가 짐을 진정시켜 보아라. 왕작도 그대도 주지 않고 카리오사 후작이 짐에서 충성을 맹세하게 할 방법을 말해서 말이다.”
“…….”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거래하기 힘들지. 그런 자들을 상대할 때는 무언가를 주는 것보다 무언가를 지키게 하는 절박함을 심어주기가 더 쉽다. 짐은 그 무언가로 목숨을 고를 때가 많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발렌시아누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갈라진 틈이 찢어지고 짙은 마나가 깃든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카리오사가 가진 것, 카리오사가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들 중 그가 쉽게 부술 수 있을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세력은 어떻사옵니까?”
“세력?”
제이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고,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불쾌감이 아니라 의문 표시라는 걸 알았다.
“그녀와 함께 온 직신 백작들과 후작들 역시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카리오사는 공작이든 대공이든 왕이든 지금보다 높은 작위를 가지게 될 거고, 그럼 자기들의 영지에 영지전을 걸어 하나둘 집어삼킬 거고, 본래 그걸 중재해줘야 할 우리 황실은 눈을 감고 있겠지요. 애초에 그렇게 하라고 승격시켜주는 것이니까요.”
“실로 그러하다.”
“물론 동부의 독립을 원하는 자들, 아세노르타를 중심으로 뭉쳐 부흥하고 싶은 자들도 있겠으나, 본래 같은 황제의 직신이었던 아세노르타를 주군으로 모시게 될 미래가 달갑지 않을 수도 있을 거 같사옵니다.”
지금은 똑같은 황제의 직신이지만, 그들 중 누군가가 공작이나 대공, 왕이 되어버리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자들끼리 급이 나누어지고, 급이 올라간 자들이 영지전을 걸어 복속을 요구하면 아예 모셔야 할 주군이 된다.
백작-후작 사이만 되어도 그런 차이를 느낄 터인데, 원래 급이 같았던 직신 후작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속으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일 거다.
“동부에서는 경쟁이 안 되니 차라리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수도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발렌시아누스가 가학적으로 웃었다.
제이릴리스가 똑같이 웃었다.
“그래. 동부의 군대를 하루아침에 여기로 불러올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제가 대영주들을 상대할 때는 결국 폐하의 이름을 빌려 하는 것이옵니다. 제가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라 해도 폐하께서는 대공 하나 관리 못 하냐는 모욕을 받으실 것이옵니다.”
발렌시아누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릴리스가 무엇을 걱정하냐는 듯 나른하게 웃었다.
“대공. 그대는 망나니나 불리지만, 짐은 폭군이라 불리네. 짐은 황제 시해자, 친족 살해자, 찬탈자라 칭해졌어. 짐의 앞에서 짐을 모욕하면 목을 치면 그만이고, 짐의 뒤에서 짐은 모욕하면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참으로 대범하십니다.”
“그래. 어찌 움직일 생각인가?”
“내분을 유도하려면, 바깥에서 공격을 가하면 아니 되옵니다.”
“그러하지.”
“그러나 예외가 있다면, 그 공격이 구성원 중 하나에게만 이익이 될 때입니다.”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가학적이고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신에게 일을 맡겨 주신다면, 아세노르타 후작이 동부 귀족들을 복속시킬 권위를 위해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도록 하겠사옵니다.”
황제가 흡족하니 웃었다.
“그리하라. 단, 목숨을 걸지는 말아라.”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아세노르타 가문과 직접 엮일 일은 없사옵니다.”
“준비는 오래 걸리겠는가? 짐이 해줘야 할 일은 있는가?”
“준비는 하루면 충분할 듯합니다. 수도에서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움직이면 눈에 띌 것이니 페하의 도움은 받지 않아도 될 거 같사옵나다. 그리고-.”
“그리고?”
“일단 네 시간만 자게 해 주십시오.”
* * *
이틀 후.
“각하. 난리가 났습니다.”
카리오사는 호텔 방에서 시종과 기사의 기이한 보고를 들어야 했다.
“난리라니?”
“지금 1층 홀에 각하를 따라온 동부의 대영주들이 죄다 모여 각하를 만나야겠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서머린의 피로 이어져 온 본능은 이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20분 안에 내려가겠다고 전해라.”
그녀는 시간을 제시해 확신을 줌으로서 혼란에 찬 자들을 진정시켰다.
13살에 해변으로 침공해오는 어인족의 목을 베고, 14살에 그 어인족의 본거지에 상륙작전을 펼친 대귀족다운 판단력이었다.
그녀는 펄을 뿌린 듯 반짝이는 근육질 몸 위로 면 옷을, 그 위로 질긴 가오리 가죽옷을 입었다.
주술 회로 새긴 수백 장의 미늘을 꿰매 만든 철편 갑옷을 두르고, 양손에 두툼한 쇠 장갑을 끼고, 상어 가죽으로 만든 혁대에 역시 상어 가죽으로 칼집을 만든 마법검, ‘폭풍’과 ‘순풍’을 찼다.
물색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리고, 옆구리에 투구를 끼고, 바다 거인과 시 서펀트의 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입었다.
한여름 날씨에 다소 부담스러운 구상이었으나, 이 정도는 해야 아세노르타의 권위를 세울 수 있었고, 카리오사 역시 이미 더위나 추위에 영향을 받을 경지는 아니었다.
“왕이 되려고 수도에 왔건만, 책봉을 받기도 전에 미래 봉신들의 반란부터 마주하는군. 하여간 나나 그대들이나 성질 급한 건 똑같아.”
카리오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1층 홀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녀가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을 때마다 아래층에 몰려 있던 동부의 직신 대귀족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반투명한 청회색 홍채와 세로로 찢어진 검은 동공이 그들을 잡아먹을 듯 훑었다.
먼 옛날 동쪽 바다를 지배한 서머린이 이제는 뭍에서까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세노르타를 상대로 아직 복속되지 않고 버텨 온 그들 역시 가문에 전설 하나쯤 가진 자들이라서.
“카리오사. 이게 무슨 일이오?”
“왜 우리의 보급 수레가 죄다 불타 버린 거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한 마검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카리오사는 그 말에 짐짓 당황하면서도, 요점을 짚었다.
“초원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모양이군. 그런데 그대들이 보초를 게을리 선 걸 왜 내게 따지고 드는 거지?”
한 후작이 머리끝까지 열받은 듯 외쳤다.
“아세노르타 가문의 보급 수레에만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카리오사는 그 말을 듣고 이를 악물었다.
“황실과 밀약하고 우리를 다 고사시키려는 속셈이 아니오? 그대에게 의존하게 만들려고!”
달콤한 피를 흘리던 사냥감을 떠올리면서.
‘발렌시아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