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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79화 (140/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79화

(179)

발렌시아누스가 제일 먼저 찾아간 건 텐티아도 루디도 아니고 세레라지에였다.

그녀는 전투마법사인 워록이 아니라 연구마법사인 위저드였지만, 강력한 공격마법에 능통하다는 이유만으로 황립 마도 공방의 상층부에서 기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전투마법사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대공의 권위를 이용해 세레라지에를 그녀의 연구실로 빼냈고, 세레라지에는 새침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진절머리쳤다.

“대체 마법사라는 자들이 왜 그리도 검술과 단련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잖니.”

“으음. 누나도 이참에 관심을 가져 보면 어떨까?”

이에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회귀 전의 전투마법사 세레라지에를 떠올리며 제안했지만.

“그럼 네게 이런 선물을 주지도 못하겠구나. 액체금속 방울 방울마다 주문을 새기고, 그게 한데 합쳐졌을 때도 주문이 유지되도록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

싸늘한 일갈 한 번에 꼬리를 말았다.

“알았어. 미안해. 그런데 진짜 벌써 역산해서 제품화한 거야?”

“이미 마법진도 나와 있고, 그걸 입혀야 할 물건도 나와 있잖니? 그냥 옮겨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건데, 이게 뭐가 어렵다는 거니?”

세레라지에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색이 다른 두 눈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으로 빛났다.

그레모리우스에서 가져온 은판에 새겨져 있던 ‘흐릿함’ 주문과 ‘난반사’ 주문을 해독하고 액체금속 갑옷 ‘아콰테그’에 새겨넣는 작업은, 보통의 마법사가 성공한다면 평생의 역작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난이도였다.

세레라지에는 그걸 한 달도 되지 않아 해내고, 발렌시아누스의 몫에 더해 루디와 텐티아의 몫, 제이릴리스에게 보여줄 시제품까지 네 벌이나 만들었다.

“아무튼 이제 이걸 네 제복에 먹이고 마나를 불어 넣으면 투명화 물약이나 투명 망토를 두른 것처럼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단다. 물론 그것들보다 효과는 조금 떨어지겠지만, 발동 시간은 훨씬 길 거야.”

발렌시아누스는 이례적으로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진짜.”

황금색 눈동자가 올곧게 빛나고, 피폐하면서도 오만한 얼굴에 잠시 그 나이대의 소년처럼 순수한 웃음이 돌아왔다.

세레라지에는 노란색과 파란색의 금은 요동을 떨며 새침하니 답했다.

“고맙기는 무슨. 이걸로 뭔 짓을 할지 모르겠구나. 뭐, 보나 마나 미친 망나니짓이나 실컷 벌이지 않겠니? 황제 폐하께 세레라지에의 공이 크다고 칭찬이나 해 주렴.”

“당연하지. 동부의 백상아리를 쥐고 흔들 수 있게 되면 그 절반은 누나 공이야.”

세레라지에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맞는 말만 하니? 혹시 내게 뭐 잘못한 거 있니? ……아니면 잘못할 거라도 있니?”

발렌시아누스의 순수하던 표정에 굵은 금이 갔다.

생글생글 웃던 눈이 피폐하게 움푹 들어가고, 소년의 뽀얀 뺨이 다시 망나니의 핼쑥한 뺨으로 돌아갔다.

“이래서…… 눈치 빠른 마법사는 싫다니까.”

* * *

세레라지에는 하얀 얼굴을 파랗고 또 빨갛게 물들이며 질색했다.

새침한 얼굴이 이례적인 절박함이 깃들어 노랗고 파란 금은 요동이 부르르 떨렸다.

“동생아.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 할 거란다. 내 말 들리니? 동생놈아?”

“이게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아무도 몰라야 하는데, 텐티아 경은 이미 황궁 안에 하인들로 위장한 첩자가 붙었어. 상대적으로 기사 숙소 쪽은 방비가 허술하니까. 제거해도 의미 없어. 첩자가 없어지면 없어지는 대로 기사와 그 기사의 호위 대상이 움직였다는 걸 알아챌 거니까.”

“루디도 있잖니? 걔도 정예병 몇 명 몫은 하지 않니? 몸도 엄청 날래잖니? 기껏 마도구도 사줬잖니?”

“루디는 마총을 들고 황궁 위에서 경비 서야 해.”

세레라지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침한 얼굴에 체념의 빛이 감돌았다.

성자를 납치하고 단 여섯이서 황실에 적대적인 후작가로 찾아간 적도 있는 이 미친 망나니 동생이, 새로운 미친 짓을 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몰래 해야 하는 일이고, 강력한 화력이 필요한 일이라면, 마법사를 찾아와야지.”

“아니. 딱히 강력한 화력은 필요 없어. 잠입 임무야. 그리고 한 이틀 정도는 들판에서 노숙해야 할 거고, 꽤 많이 걸어야 할 거야.”

발렌시아누스는 이제 미안하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그 뻔뻔한 태도에 세레라지에가 전격을 부르고, 그는 한 번 바닥에 쓰러졌다.

“잠입 임무에 마법사를 쓴다는 그 기이한 발상은 둘째치고, 그래서 몇 km이나 걸어야 하니?”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최소 50km?”

세레라지에가 다시 한번 전격을 불렀다.

* * *

둘은 한 상인의 배를 타고 운하를 통해 수도를 나선 뒤, 길도 없는 평야를 가로질러 동부 연합군의 주둔지로 향했다.

6만이 넘는 병사들은 대귀족들이 길러 온 정예병다웠다.

발렌시아누스와 세레라지에 모두 그들의 몸 안에서 적잖은 양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자의적으로 체내의 마나를 다루는 마나 유저까지는 아니었지만, 주먹질 한 번에 사람 머리 정도는 깰 수 있는 초인들이었다.

그런 사내 6만 명이 완전무장을 하고 빼어난 기사들과 장교들의 지휘를 받으며 구름처럼 막사를 펼치고 있었다.

공병대와 마법사들이 나무와 대지 마법으로 세운 울타리는 거의 토성에 가까웠고, 마법사들과 관측병들이 높게 솟은 관측 탑에서 주변을 경계했으며, 울타리 밖에는 보초들이 돌았다.

울타리 바깥쪽으로 100m 정도는 멀끔히 제초되 있었고, 울타리로부터 5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수색병들이 풀숲에 숨어 주변을 경계했다.

세레라지에는 그 모습을 관측마법으로 바라보며 한탄했다.

“동생아.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렴. 아무리 내가 천재 마법사라도 해도, 저기 있는 마법사들 수준도 대단할 거란다.”

“그 대단한 애들은 전부 호위대에 딸려서 수도 안에 들어갔어. 걱정하지 마. 은마력 주문이나 걸어줘.”

“모르니? 은마력은 한번 마나를 쓰면 깨진단다. 몇 개 연합인지는 모르지만 대충 봐도 직신 가문만 15개는 모인 거 같은데, 수래 한 줄까지는 어찌어찌 몰래 불태워도, 남은 14개는 마나를 숨길 수 없는 상황에서 태워야 한다는 거잖니? 그게 가능하리라고 믿니?”

발렌시아누스는 씩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나는 모른단다. 죽든 살든 마음대로 하려무나.”

세레라지에가 달관한 표정으로 발렌시아누스에게 은마력 주문을 걸어 주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싱긋 웃으며 풀숲 사이로 사라졌다.

화려한 하얀 제복이 밤의 어둠 속으로 반투명하게 녹아들었다.

세레라지에는 만약의 상황에 사용하려 ‘전광창’ 주문과 ‘섬광 점멸’ 주문을 양손에 따로 맺었다.

‘일단 지휘관에게 던지고 동생 놈 챙겨서 날아야지. 감전이야 되겠지만 그게 잡혀서 죽기보다는 훨씬 낫잖니? ……대체 그놈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니? 저 녀석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더 단단히 뭉쳐서 황실에 대항하지 않겠니? 이제 곡식 내놓으라는 소리까지 하겠잖니. 하드리탄이 우리 먹을 거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분명히 했잖니.’

문득, 마법의 진리를 깨우쳐도 발렌시아누스의 속은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짓을 태연하게 벌일 수 있는 거니?’

콰아아아-!

1시간도 되지 않아서 수십 개의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세레라지에는 별 총총한 밤하늘을 오랜지색으로 물들이는 기둥을 보며 새침한 얼굴을 굳혔다.

‘시차 발동? 캐스팅만 다 해놓고 시동어를 나중에 외우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러려면 보유한 마나량이랑 제어력이 어마어마해야 할 텐데.’

고개를 너무 높게 들어서 고깔모자가 툭 떨어지자, 밀려온 열풍의 잔재가 긴 남색 생머리를 날렸다.

‘한 번은 들키지 않고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잖니. 그 한 번에 용언으로 마나를 끌어모았구나. 그래. 용언을 쓰는 이상 양도 제어력도 문제는 아니지. 물론 보통 마법사라면 몸이 못 버티겠지만…….’

“하하하하하! 누나, 가자! 성공했어. 다 굶어 죽을 준비나 해라. 이 상어 떼야!”

오래지 않아 발렌시아누스가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유쾌한 광소를 터뜨리면서.

엄청난 마나를 붙들고 있던 부작용인지, 손과 얼굴에 핏줄이 터져 큰 멍이 군데군데 들어 있었다.

반투명한 암적색 비늘이 하나둘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고, 머리에는 뿔도 하나 돋았다가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세레라지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렌사아누스를 꼭 잡았다.

“……돌아갈 때는 섬광 점멸로 날아갈 거잖니.”

“잠깐. 그동안 나는 감전-.”

“날아갈, 거잖니.”

‘빨리 가서 포션 마시고 자렴. 아파보이는구나.’

* * *

당연하지만, 대귀족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정말로 아세노르타 가문이 자기네 식량 수레를 제외한 모든 수레를 태워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게 진짜라고 믿을 정도의 지능을 가진 자들은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단지 그렇게 주장하는 게 이득이 되기에 그렇게 외쳐댈 뿐이었다.

“배상하시오!”

“이게 들키지 않을 줄 알았소?”

“황실의 고등 재판소에 제소하겠소!”

그들은 모두 이미 아침에 보고를 듣자마자 수도의 상인들을 고용해 보급대를 보낸 뒤였다.

물론 재산상의 손해는 보았고, 아마도 진범일 황실에게 차후 무언가를 받아내야겠지만, 지금만은 순수한 피해자를 자처하는 게 더 유리했다.

“내 병사들이 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굶어 죽을 판이오!”

여기가 동부였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었다.

아세노르타 가문의 일곱 함대가 항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무역항은 모두 어인족들의 산란지가 될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중부고, 그들이 아세노르타에게 어쩌면 마지막으로 상대적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동부의 상어 떼는 동족 포식도 망설이지 않는다.

피와 고깃덩이에 굶주린 상어들이, 막 고깃덩이 앞까지 다가간 백상아리 서머린의 꼬리지느러미를 물고 늘어졌다.

“…….”

이에 동부 제일의 마검사이자 제국에서 둘째가는 마검사, 동쪽 바다를 지배하는 백상아리 괴물의 후예는 답했다.

“호위대를 많이 데려오지는 않은 모양이군. 나쁜 버릇이야. 누군가 그대들을 지켜주리라고 생각하는 건.”

어인족 유생 같은 수작 부리지 말고 꺼지라고.

저벅.

카리오사는 일곱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녀가 한 걸음씩 내려올 때마다 주변의 직신 대영주들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다이젤 경!”

“호위대 불러와. 3분은 버텨 보겠다.”

“카리오사 후작!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건가?”

청회색 홍채와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그녀에게 질문한 후작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럼 협박이 아닌 거 같았나?”

“이 무슨 광폭한……!”

“테스투다오스 후작. 내년 항구 방위비를 2배로 늘리도록 하지. 싫다면 그대가 함대를 꾸려서 그대의 영지를 지키도록.”

“!”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두 배짜리 고지서를 처맞은 후작이 터질 듯 눈을 부릅떴다.

“……내가 네 탄신연회에도 참석한 걸 모르느냐!”

“그렇게 어린아이가 제 영지를 잡아먹겠다고 덤비는데, 그걸 보고 있어야 할 만큼 자기가 무능하다는 걸 고백하는 건가?”

홀에 모여 있던 대귀족들과 그들의 호위대가 이를 악물고 침음성을 흘렸다.

상대는 군대와 홀로 싸울 수 있는 마검사였다.

카리오사는 분노에 찬 거 같기도 하고 겁먹은 거 같기도 한 수많은 눈길을 조소하며, 호텔 홀을 나섰다.

사냥꾼의 피가 흐르는 대귀족은, 성공할 수 없는 사냥감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경멸했다.

“죽음을 불러오는 짓이지. 그러나 오늘 기분이 좋으니, 피는 보지 않겠어.”

“각하.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아세노르타의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물었다.

카리오사는 가학적으로 웃으며 답했다.

“전군 대기시켜. 나는 황궁으로 간다. 내 예비 신랑이 거기 있을 테니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상어 중에는 교미 중 암컷이 수컷을 물어뜯는 종도 있다더군.”

카리오사는 마차에 타며 생각했다.

‘고깃덩이인 줄 알았는데, 미끼였나? 그래. 어디 한번 나를 낚아 봐라. 손맛 한번 제대로 보여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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