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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회귀 전의 꿈을 많이 꾸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번 꾸면 너무나도 생생해,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폭풍이 몰아치며 만든 길을 순풍이 타고 오른다.
피에 굶주린 동부의 상어 떼가 황실과 중부군의 심장부로 몰려들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나!”
한 장교가 목놓아 외쳤다.
사방에서 전령들이 달려와 절망적인 소식들을 전했다.
“중앙 후방에 세레라지에 출현! 뇌운을 생성하는 중입니다.”
“텐티아가 유격전으로 황제 폐하의 발목을 붙들고 있습니다. 지금 못 오십니다.”
“아군 후방에 유스티아누스와 적군 경장기병대 출현. 반역 황자입니다!”
“헬레나 님이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아군 중장 기병대 후퇴합니다!”
“카리오사가 오고 있습니다! 1진 돌파, 2진 돌파!”
“북부 전선 소식입니다. 바르바토스 경이 이끄는 흑철기사단이 북부 대공 세베릭과의 회전에서 대패했다고 합니다.”
아군이 갈려 나가는 와중에, 나는 지휘부의 호화로운 막사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다.
전쟁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중에 나 같은 망나니가 할 일은 없다.
하지만 지금 전장은 혼란에 빠졌고, 그걸 뒤집을 한 수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위험합니다.”
나는 만류하는 기사들과 장교들을 헤치고 나가 적들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동부의 상어 떼가 그들 스스로 일으킨 파도를 타고 아군 전열을 헤집고 있었다.
“청동 왕관과 리치의 지팡이를 가져와라.”
“예?”
내 말에 모든 기사가 입을 쩍 벌렸다.
“그건 흑마법사들의 마도구입니다!”
“대공 전하가 사용하실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언데드로 만드는 마도구입니다. 폐하를 위해 분투하고 쓰러진 병사들에게 안식을 허하소서!”
“성직자들이 기겁할 겁니다. 폐하께 장기적으로 악수가…….”
나는 그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청동 왕관을 썼다.
“시끄럽다! 명예고 성직자들이고 나는 살고 싶단 말이다.”
“아군 병사들은 모두 신실한 광명교도입니다! 전하가 언데드를 부리면 사기가 떨어질 겁니다.”
“죽어서도 황제 폐하께 복종할 수 있으니 더 좋아하겠구나!”
그야말로 개망나니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나는 시체의 벽으로 굶주린 상어 떼의 돌격을 막아냈고, 3시간을 버텨냈다.
카리오사가 백발 금안의 황족에게 집착한다는 걸 알아서, 미끼 노릇을 하며 시간을 끌기도 했다.
결국 저 하늘 위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황제가 날아오고, 붉은 머리 하나가 뚝 떨어졌다.
지휘부에서 환호성이 치솟고, 동부의 상어 떼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그 머리를 보고 안도감보다 안타까움과 슬픔이 들고, 대체 왜 적의 소드 마스터가 죽었는데 슬픔이 드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때면.
“벨 님? 일어나세요. 벨 님!”
나는 악몽에서 깨어난다.
* * *
“루디?”
녹색 눈동자는 덜덜 떨렸고,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으며, 상하쌍대 마총 카스파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지금 황궁 정문 앞에 카리오사 후작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근위병이고 뭐고 다 뿌리치고 이쪽으로 오고 있대요. 도망가셔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본궁의 한 회의실이고, 주변에는 치안감들과 근위병, 백금 기사들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온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나!”
어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씻고 보고를 올린 뒤, 이곳에서 상황을 전해 듣다가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앉아서 잠을 자서인지 어깨와 등이 뻐근했다.
“발렌 전하. 상황이 급하니 실례하겠습니다.”
완전무장 한 텐티아 경이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세레라지에 전하께서 상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카리오사 후작은 폐하의 알현을 명분으로 오고 있으니, 황궁 안쪽까지 들어오지는 못할 겁니다. 일단 붉은 달무리 궁으로 몸을 피하시지요.”
올린 면갑 너머 처연하고 늠름한 붉은 눈동자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내가 도망가면 자백이나 다름없어. 내려 주게나.”
“그게 무슨……! 전하!”
텐티아 경이 나를 붙들려 했지만, 나는 미꾸라지처럼 가볍게 그녀의 건틀릿 사이를 빠져나왔다.
저 멀리서 청회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흐.”
회귀 전 기사 수십과 중기병대 하나, 워록 수십을 홀로 도륙해버린 사냥꾼.
동부의 제패자, 서머린의 후예, 카리오사 후작이었다.
나는 도망치는 대신 본궁 정문으로 나가 대리석 계단 중턱에 서서 카리오사를 기다렸다.
그때 내 옆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무슨 일인가?”
나는 진심으로 당황하며 물었고, 본궁 고참 시종이 답했다.
“무례한 자가 황실의 일원을 범하려 드니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대공 전하께서 비록 황실의 이름과 황족의 품위는 시궁창에 내다 버린 듯한 행보를 보이셨다고 하나, 저희까지 전하를 그렇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네가 망나니라고 해서, 우리가 너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오만하게 웃었다.
일종의 공갈로 받아들였는지, 시종장이 이를 악물었다.
백금 기사들과 정예병들이 하나둘 내 옆을 지켰다.
텐티아 경이 화한 손잡이에 손을 얹고, 루디가 계단 옆 화단과 가로수 너머로 몸을 숨긴 뒤 카스파를 조준했다.
옥상에서 세레라지에가 주문을 외웠는지, 황궁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쳤다.
우르릉! 쾅!
카리오사는 그 천둥소리를 배경 삼아 다가왔다.
물색 머리는 거칠지만, 단단히 묶고 있었고, 상어 비늘 같은 은회색 철편 갑옷을 둘렀으며, 두 자루 검을 차고 있었다.
나만큼 큰 장신 탓인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살기 탓인지, 그녀를 둘러싼 근위병들과 백금기사들이 작아 보였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검은색 세로 동공이 물어 온다.
이 모든 걸 네가 꾸몄냐고.
나는 망나니답게 웃었다.
오만하고 뻔뻔하게 웃었다.
“이 무슨 무례입니까!”
황실 고참 시종이 달려 나갔다.
깐깐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카리오사가 일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대귀족의 분노는 인간이 만든 법칙 정도가 아니라 자연법칙과 물리 법칙도 거스른다.
세베릭이 눈을 내리듯, 카리오사 역시 폭풍을 부른다.
그녀는 마치 개미를 굳이 밟아 죽이지 않고 지나가듯 시종을 밀어냈다.
이번에 그녀의 앞을 막아선 건 근위병들이었다.
하나같이 정예에, 마나 유저도 여럿이었다.
근위병대 백인장이 카리오사를 막아섰다.
“카리오사 후작 각하.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취침 중이십니다. 어찌하여 이 아침부터 알현을 청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황궁에 무장하고 발을 들임은 대역죄임을 기억하소서. 지금, 대단한 무례를 저지르고 있으십니다.”
좋은 대응이었다.
상대가 보통 기사 정도만 되었어도 통했을 거다.
하지만 카리오사는 근위병이 같잖다는 듯 웃었다.
“그럼 날 막아 보아라.”
상어 같은 이빨을 드러내면서.
“후작 각하의 체면을 보아 이 무례를 용납해 드리고 있으나-.”
“‘용납?’ 지금 누가 누구를 용납해주고 있는지 모르겠느냐?”
“!”
“내 앞을 막아서고도 목이 잘리지 않았음을 대대손손 가문의 영광으로 알아라.”
카리오사가 근위병을 밀어냈다.
그러나 아카데미 검술학부에서 수년간 학년 10위권 안을 지켜 온 근위병은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조교들이, 교수님들이, 근위병 단장님이, 여전히 선망하는 백금 기사들이 하는 말을 10년간 들어왔을 테니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이겨내는 게 용기다.]
[더 강한 상대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게 근위병의 명예다.]
[우리는 언젠가 황실을 위해 죽을 날을 위해 싸운다.]
그런 말들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결국 사람은 어떠한 말로 자신의 삶을 설명하거나 지탱하려 하고, 그건 가장 궁지에 몰린 순간 드러난다.
“황궁을 범한 카리오사 서머린 아세노르타 후작을 체포한다! 역도는 당장 무릎 꿇고 엎드려라.”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근위병과 카리오사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카리오사 후작이 나를 보며 웃었다.
고양감과 설렘이 공존하는 듯한, 피에 굶주린 사냥꾼의 웃음이었다.
“기다려라.”
다음 순간 근위병 넷이 카리오사 후작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잡아!”
펑!
바람 방벽이 치솟고, 근위병 넷이 어른 키보다 높이 떠올랐다가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판금 갑옷이 계단에 부딪힐 때마다 깡깡 소리가 났다.
“……백금 기사단의 코르젠이요.”
“아세노르타의 카리오사다.”
“통성명은 이만하겠소.”
코르젠 경이 면갑을 내리고 계단 아래로 뛰어 내리며 검을 내리쳤다.
푸른 마나 블레이드가 맹렬하게 빛나고, 절벽도 갈라 버릴 검격이 휘몰아쳤다.
다음 순간 카리오사의 손에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장검 두 자루가 뽑혀 나왔다.
오른손, 두툼한 군청색 날에 거친 느낌의 검이 폭풍이었고.
왼손, 얇은 청록색 날에 부드러운 느낌의 검이 순풍이었다.
회귀 전 황실의 부대 몇 개를 도륙해버린 쌍검이었다.
콰앙!
먼저 폭풍이 휘몰아치며 코르젠 경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도약하며 체중까지 실어 벤 참격을 제자리에서 팔 힘만으로 밀어내 버린 거였다.
그리고 그 틈을 타고 순풍이 치솟아 올랐다.
청회색과 군청색 마나가 나선으로 소용돌이치는 순풍이었다.
백금 기사들의 판금 갑옷은 관절부를 이중, 삼중으로 덧대 상하좌우 전후좌우 어디서도 틈을 찾을 수 없는 기물이었지만, 순풍은 기어코 성벽만큼 견고한 철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코르젠 경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꿰뚫었다.
붉은 피가 판금 사이로 흐르고, 백금 기사들이 일제히 도약했다.
나는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 * *
카리오사는 이제 서른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고 히죽 웃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저 황족들의 외모가 그리 마음에 들었다.
도도한 인상에 백금발, 비인간적인 금색 눈동자까지.
‘꼭 한 명쯤 끼고 살고 싶었건만. 왕위랑 같이 받을 수 있겠구나.’
카리오사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지금쯤 동부의 다른 귀족들은 인류 최강의 황제를 들이받은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자기들끼리 축배를 들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함대와 평야와 항구를 갈라먹을 희망에 가득 차서.
하지만 동부의 백상아리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사냥감을 노리지 않는다.
‘황제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이제 그 애는 괴물이 아니야.’
사냥꾼의 본능은 사냥감을 노릴 때 가장 민감해졌고, 그녀는 지난 1년간의 관찰을 통해 제이릴리스라는 사람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챘다.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지만, 폭군에서 황제가 되려 한다. 플라니티에스도 프로이하이트도 그레모리우스도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려 했어. 중부인들이 북부인들을 두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식량을 지원했고, 교회에 기부금을 내고 성자와도 만났다.’
그건 카리오사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제 제이릴리스는 목을 치거나, 아니면 살려주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던 괴물이 아니다.’
‘나는 아직 자식도 없고, 외동딸이라서 나를 죽여버리고 만만한 새 후작을 앉히는 전략도 불가능하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나는 산다. 나 말고는 동부를 안정시킬 만한 귀족이 없거든. 과연 황제가 나를 죽인 다음에 동부에 직접 와서 바닷바람 맞아 가며 1만 개도 넘는 섬을 뒤지면서 해적들과 어인족들을 토벌하려고 할까?’
즉위 1년간 제이릴리스는 미친 듯 목을 쳐댔고, 그동안 그녀는 수면 아래서 숨죽이고 있었다.
그녀가 죽고 동부가 어인족들의 천국이 되든 말든 그냥 죽여버릴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녀는 이제 제국의 황제가 되려 하고, 카리오사 역시 제국의 봉신이다.
지키고 또 이용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결국 상대의 마음을 이용하는 거다.
가장 약한 부분을 물어뜯어 피를 내고 잘근잘근 씹어 가며 힘을 뺀 뒤, 쓰러트려 좌초시키는 거다.
‘직접 나오면 위신 때문이라도 나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나를 죽이면 대체품이 없으니 애초에 나오지 않는다.’
대체품이 없으면 아랫것의 갑질을 눈 뜨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세노르타도 지금껏 손해를 보면서까지 동부의 다른 대영주들의 항구를 보호해 주었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해군을 기르지 못해야, 황제는 아세노르타를 대신해 바다를 지키게 할 가문이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래야 무슨 짓을 저질러도 눈감아줄 테니까.
백금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제국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마검사는 포식자의 웃음을 지으며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