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81)화 (181/340)

(181)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는 백금색의 갑옷, 가슴에 그려진 방패 모양의 훈장에 새겨진 교차된 검과 태양의 문양.

백금 기사단의 ‘낙성’ 베레토스는 마나 블레이드 두른 철퇴를 휘두르며 ‘백상아리’ 카리오사에게 달려들었다.

“역도는 지금 당장 무장을 해제하라!”

당연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석양의 검’ 펜타, ‘순수’ 오르사, ‘거울’ 하르체다, ‘신성’ 텐티아 등 이름 높은 백금 기사들이 함께했다.

카리오사는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발렌시아누스. 기다려라!”

폭풍을 바깥쪽으로 베어내려 베레토스의 철퇴를 쳐내고, 순풍을 베어 올려 베레토스의 손목을 힘껏 두드렸다.

땅.

베레토스의 손에서 철퇴가 떨어지는 순간, 카리오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높은 뒤돌려차기를 날리며 ‘석양의 검’ 펜타의 아래턱을 후렸다.

퍽!

뒷굽과 투구 면갑이 부딪히는 순간 불꽃이 튀고, 펜타가 일순 비틀거렸다.

곧바로 순풍이 펜타의 겨드랑이를 노리고 불어왔지만, ‘순수’ 오르사가 송곳 같은 검 에스터크를 들고 한 호흡 만에 여덟 번의 찌르기를 날렸다.

“감히 신성한 황궁에서 이 무슨 패악질인가!”

그러나 카리오사는 폭풍과 순풍을 번갈아 휘몰아쳐 아홉 번의 베기로 튕겨냈고.

“내가 불러온 파도에 휩쓸려.”

아세노르타 식 바람 칼날을 휘몰아쳐 오르사를 계단 아래로 날려버렸다.

‘거울’ 하르체다와 ‘신성’ 텐티아가 앞뒤로 달려들어 카리오사의 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하르체다는 장검과 단검의 쌍검술을, 텐티아는 머리 위로 치켜든 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핏빛 원반을 만들었다.

카리오사는 텐티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르체다에게 돌진했다.

폭풍은 중량이 8kg에 육박하는 특중검이었지만, 카리오사는 그 검을 회초리처럼 휘두르며 하르체다의 목, 어깨, 옆구리, 허벅지, 종아리를 후려쳤다.

쾅!

폭발음 같은 폭음이 몇 번이고 일고, 끝끝내 하르체다가 무너져 내리고, 텐티아가 카리오사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베어 내렸다.

“각하. 어딜 감히 발렌 전하에게 그 더러운 마수를 뻗으려 하십니까!”

아무리 카리오스가 대단한 마검사라고 해도, 절대로 피하지도 받아내지도 못할 참격이었다.

카리오사는 여전히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사아아아-!

콰아아아-!

우드드드-!

날카로운 ‘바람 방벽’이 휘몰아치며 텐티아의 몸을 뒤흔들고, ‘돌 가시’가 솟아 텐티아의 갑옷을 찌르고 앞을 가로막았으며, 단단한 돌계단이 ‘수렁 늪’ 주문으로 늪처럼 변해서 텐티아의 몸을 묶었다.

“으아아아!”

그러나 텐티아는 끝내 검을 베어 내렸고.

카리오사의 갑옷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철편 조각을 그녀의 목에 둘렀다.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와 철편 조각이 충돌하고, 일순 철편 조각이 하얀빛을 내며 빛냈다.

우웅-!

막대한 반탄력에 텐티아는 일순 검을 놓칠 뻔했고, 그대로 무릎이 꺾여 뒤로 넘어졌다.

카리오사는 텐티아가 소드 엑스퍼트의 기사도 튕겨서 날아가버릴 반탄력을 견뎌냈다는 사실에 비릿한 웃음으로 놀라움을 표했고.

“살려주마.”

퍽!

폭풍으로 겨드랑이와 허벅지 갑옷 사이를 거칠게 헤집은 뒤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우르릉!

천둥 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 * *

“감히 누구 동생을 제멋대로 데려가겠다는 거니? 딱히 내가 데리고 있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 따위에게 주기는 아깝구나.”

본궁 옥상에 서서, 세레라지에는 주문을 외웠다.

하늘에 뜬 거대한 적란운이 천둥소리로 울부짖으며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 천벌을 내릴 준비를 했다.

그녀는 잠시 카리오사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근위병들과 기사들을 몇 합으로 제압하고, 텐티아의 참격을 3중 마법으로 묶고, 끝내 튕겨 내버린, 무시무시한 마검사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게 너희에게 어울리는 자리란다.”

세레라지에의 오만함과 자부심은 그런 마검사조차 깔아보았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2등 따위, 웃기지도 않잖니?’

“쳐라.”

번쩍!

한 줄기 벼락이 나뭇가지 같은 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확산 술식을 제외하고, 오로지 카리오사만을 향해 내리찍은 낙뢰였다.

카리오사는 여전히 섬뜩하게 웃으며 폭풍을 하늘로 쳐들었다.

군청색 마나 블레이드가 맹렬하게 빛나며 벼락을 받아냈다.

쾅!

눈이 멀어버릴 듯한 섬광이 터지고, 실제로도 근위병 몇몇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을 굴렀다.

“요술쟁이야! 이 정도 마법으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으냐?”

곧바로 같은 벼락이 한 번 더 떨어져 내렸다.

“이 정도 마법? 말도 판단도 이르잖니.”

쾅!

일순 폭풍을 쳐든 팔이 부르르 떨렸다.

세레라지에의 색이 다른 두 눈동자에, 새침한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녀가 불러온 구름에 명령했다.

“저런 괴물, 더는 보기 싫잖니.”

거대한 적란운에서 수십 줄기의 번개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콰과과광!

마법의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근위병들도 바닥으로 몸을 날리고, 강철 동상처럼 굳건하던 카리오사의 몸도 비틀거렸다.

그녀의 철편 갑옷이 하얗게 빛나고, 반투명한 비늘이 구를 이루며 그녀의 몸을 둘러쌌다.

세레라지에는 승리자의 미소를 그 새침한 입술에 띄우며 선언했다.

“내가 이긴 거 같잖니?”

쾅!

적란운에서 열 줄기의 벼락이 한 점으로 뭉치고, 그대로 압축되며 한 자루의 창이 되어 지면으로 내리꽂혔다.

세레라지에의 남색 머리카락에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황금색 용언의 기운이 남실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황실 제일의 워록들도 눈을 부릅뜨거나 침음성을 흘렸다.

카리오사가 검은 세로 동공을 부르르 떨며 굴욕감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디스펠.”

그 순간 거대한 적란운이 8월의 눈처럼 녹아내렸다.

막대한 마나가 역류하고, 세레라지에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눈, 코, 입, 귀, 손톱 아래, 발톱 아래.

몸에 있는 모든 구멍과 피부가 얇은 곳이 터지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세레라지에는 끝끝내 무너지지 않고 버티며 폭주하는 마나를 심장으로 거두어드렸다.

기적적인 수준의 마나 제어력이었다.

카리오사는 황궁 옥상에 서 있던 남색 그림자가 비틀거리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한 재능이구나. 하지만 너 같은 재능의 마법사가 커서 검까지 익힌 게 나란다.”

그녀의 뽀족한 이빨 사이에서는 여전히 잔류 전기가 튀고 있었다.

‘갑옷을 뚫고 들어와서 깜짝 놀랐어. 쯧. 한참 어린 마법사에게 디스펠까지 쓰다니, 많이 다친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아마도 저 애가 그 세레라지에겠지. 이게 그 유명한 ‘침투’ 술식일 거고. 기존의 차단 마법만으로는 이제 부족하군. 피뢰 마도구는 따로 구해야겠어.’

잠시 이어지던 상념을 끊어낸 건, ‘석양의 검’ 펜타였다.

노을빛으로 빛나는 마나 블레이드가 카리오사의 몸을 반으로 잘라버릴 듯 덮쳐들었다.

카리오사는 히죽 웃으며 폭풍을 치켜들고 입 안에서 주문을 외웠다.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세레라지에가 사용했던 침투 술식이 그대로 그녀의 손에서 재현되었다.

침투 술식이 더해진 전격과 군청색 마나블레이드가 펜타의 석양을 밀쳐내고, 순풍이 펜타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세레라지에는 옥상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색이 다른 두 눈을 부릅떴다.

‘그사이에 내 마법을…… 훔쳐? 그래. 몸으로 겪어 본 건 안 까먹는다는 거구나.’

세레라지에는 심호흡 몇 번으로 침착함을 되찾고, 왼손으로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차근차근 주문을 준비했다.

‘내가 이대로 쓰러질 거 같니?’

* * *

“발렌시아누스. 동부로 가자.”

카리오사는 근위병 하나를 계단 아래로 집어 던지며 말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카리오사는 순수한 힘을 다루는 파괴술 마법으로 발렌시아누스를 끌어당길 생각을 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피를 흘리고 싶다면야.”

그때 카리오사의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 주군을 바닷바람 불어오는 요새 성탑에 가둬 둘 생각이겠지? 절대로 안 돼.”

텐티아가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카리오사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텐티아를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 순순히 따라오면, 저 기사를 살려줄게.”

텐티아는 카리오사의 오만한 태도를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를 지키는 백금 기사들을 놀리는 농담은 전 제국에 퍼져 있었고, 많은 이가 백금 기사단을 얕잡아보았다.

이는 백금 기사단이 어느 정도 방조한 측면도 없잖아 있었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텐티아는 허리춤에 달고 있던 한 뼘 길이의 흑요석 돌기둥을 강하게 쥐었다.

파삭!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다음 순간 돌기둥 중심으로부터 반지름 25m 안의 모든 마나가 얼어붙었다.

황립 마도 공방 기술력의 결정체인 이 마도구는 최고의 마법사들이 최선을 다 해도 한 달에 하나를 만드는 게 고작인 값비싼 소모품이었다.

기사들의 마나 블레이드가 작아지거나 없어지고,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수많은 주술 회로도 그 기능을 멈췄다.

“봉마석이라.”

카리오사는 낄낄거리며 텐티아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알기로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검보다 마법에 더 능하다고 들었는데?”

“…….”

“이게 도움이 될 거 같아? 아까 그 마법사의 협공을 노려볼 생각?”

“…….”

“너희도 마찬가지야. 내가 노릴 수 있는 곳이 겨드랑이랑 허벅지 안쪽밖에 없을 때도 썰려 나갔으면서, 너희 마갑을 알아서 고철 떼기로 만들어? 지금은 마나도 쓰기 힘들어졌으니까 부상을 억누르기도 더 힘들 텐데…… 아. 그래. 어쩐지 갑옷이 무거워졌다 했어.”

두툼한 기사 갑옷은 본래 무게가 50kg도 넘지만, ‘경량화’ 술식을 통해 10kg 아래로 느껴지도록 했다.

마나가 얼어붙으며 그 술식도 동작을 멈췄고, 무게는 당연히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걸 다친 몸으로 입고 있으니 근위병들과 기사들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텐티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무거운 투구를 아예 벗어 버렸다.

시야 확장의 주문이 사라진 지금, 투구를 쓰고 있으면 좁은 면갑 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땀에 젖은 늠름한 얼굴이 여름 바람을 맞고,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카리오사는 텐티아의 형형한 눈빛에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고.

“네가 동부에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건 비밀이야. 내 기사들은 질투가 많거든.”

그녀를 뒤로하고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리오사는 끝내 발렌시아누스 앞에 섰다.

고깃덩이를 눈앞에 둔 상어 같은, 약간 취한 거 같기도 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무도 안 죽였지. 잘했나?”

발렌시아누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병 중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하는 자가 있을지언정, 죽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 고마워.”

발렌시아누스가 양손을 뻗어 카리오사를 끌어안았다.

카리오사는 일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백금색 머리카락이, 황금색 눈동자가, 달콤한 향이 풍기는 붉은 입술이 그녀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펄을 뿌린 듯 빛나는 얼굴이 일순 붉게 물들었다.

카리오사가 웃었다.

식욕과 색욕과 정복감을 오가는, 그야말로 대귀족다운 승리감에 찬 표정이었다.

발렌시아누스가 낮고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알고 있듯, 폐하는 나오지 않겠지. 이 꼴은 본 이상 황실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그대의 목을 쳐야 하는데, 그럼 동부에서 어인족들과 싸워 줄 대귀족이 없어지니까.”

카리오사는 포식을 앞둔 상어처럼 웃었다.

“그렇지.”

“사실 후작의 제안은 마음에 들었어. 후작은 아름답고 강하고 부유하고, 내게 호감을 보였지. 나는 황제 폐하의 권위가 안정될수록 붕 뜬 처지가 되고. 그래. 본래 후작은 내게 과분한 여자야. 내 쪽에서 결혼해달라고 빌어야 하지.”

“어쩐지 수상한 낌새가 들리는 말인데?”

“하지만 나는 붕 뜬 처지가 될지라도 수도에 남기로 했네. 나의 황제가 이곳에 계시니.”

“누구 마음대로?”

“한 가지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게 있다면…… 그대가 나의 황제와, 나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진심이야.”

발렌시아누스가 잠시 목소리를 떨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대가 있는 즉위 40년대를 맞았으면 좋겠군.’

내뱉지 못한 말은 마주친 시선에 녹이고, 망나니 대공은 어느새 세로로 바꿔 뜬 눈을 감았다 떴다.

카리오사가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본 그 모습은 마치, 해가 지고 뜨는 거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빛바랜 태양 같은 황족을 취하겠다,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퍼어엉!

마탄의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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