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인간의 육체는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강해진다.
텐티아 정도만 되어도 대규모 ‘시체 폭발’에 휘말려도 멀쩡히 살아나올 수 있고, 거인의 피가 섞인 소드 마스터 세베릭은 파괴술사들의 마법 포화를 몸으로 버텨낼 수 있으며, 용찬 의식을 한 발렌시아누스는 불에 타지 않는 게 대표적인 예시들이었다.
카리오사는 대륙에서 손에 꼽는 혈통을 타고나고 지독한 단련을 거친 일류 마검사였다.
거기에 가문의 보물인 철판 갑옷까지 입었으니, 어지간한 공격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최고급 소모품인 흑요석 기둥은 일대의 마나를 얼어붙게 했고, 철판 갑옷은 공성 병기를 막아내는 절대적인 방어구에서 잘 만든 갑옷 한 벌로 전락했다.
그녀의 피부는 가죽 갑옷처럼 질기고, 근육은 잘 땋아 한데 엮은 철사 같고, 뼈는 단조한 강철 같았지만, 루디의 마총은 수백 년 전의 대마법사들이 만든 마법의 정수였다.
퍼어엉!
아찔한 총성이 울린 후, 카리오사의 허벅지에서 피가 튀었다.
코트 아래 늘어트린 철편 갑옷에서 미늘 몇 개가 떨어져 나가고, 그녀의 발밑에 붉은 점이 하나둘 늘어갔다.
침식자 몇 명 정도는 가볍게 관통해버릴 위력의 마탄이었지만, 카리오사의 허벅지 안쪽에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루디는 그걸 보며 녹색 눈을 부릅뜨고 기겁했다.
‘발렌 님은 이게 바위 거인도 꿰뚫는 위력이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그녀의 격정은 어디까지나 심장만을 달궜고, 머리는 더더욱 차갑게 식혔다.
바위 거인도 꿰뚫는 마탄을 버티는 인간이 지금 발렌시아누스와 바싹 붙어 있었다.
루디는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파아앙!
두 번째 탄은 종아리에 착탄했다.
퍽!
단단한 가오리 가죽 바지가 찢어지고 어김없이 피가 튀었다.
철걱! 휘리릭, 그리고 다시 찰칵.
루디는 중절한 마총을 빙그르르 돌리며 두 발의 대형 마탄을 장착하고,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들고 있던 24발의 ‘카스파’ 마탄을 모두 소모한 뒤에는, 리볼버형 마총 ‘아가테’를 뽑아 36발을 추가로 퍼부었다.
첫 번째 마탄을 맞은 직후, 카리오사는 오른팔을 들어 머리를 가렸다.
“이!”
퍽! 퍼어억!
총탄이 그녀의 몸을 헤집을 때마다, 카리오사는 몸을 비틀며 발렌시아누스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눈동자를 세로로 바꾼 순간부터 용언의 힘을 끌어올려 몸에 비늘을 두르고 있었고, 카리오사를 붙드는 데에만 열중했다.
아무리 카리오사라도 그런 발렌시아누스를 떨쳐 내는 건 어려웠다.
발렌시아누스가 카리오사의 귀에 속삭였다.
“가라앉아. 서머린. 가장 깊은 곳까지.”
카리오사의 검은 동공이 급격히 팽창했다.
그녀의 먼 선조가 바다괴물 서머린을 떠나보내며 했다는 말이었다.
“발렌시아누스!”
카리오사의 손톱이 발렌시아누스의 윗팔뚝을 찌르고 들어갔다.
상어 같은 뾰족한 이빨이 발렌시아누스의 목을 파고들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끝끝내 카리오사를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카리오사는 문득 발렌시아누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용종, 아니. 황족 특유의 지독한 탐욕이 그 황금빛 눈동자에 그렁그렁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
‘황제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나를 제압해야…… 황제 앞에 끌고 갈 수 있다. 동부의 관리는 맡겨야 하지만 왕위는 줄 수 없고, 자기 몸도 내어줄 수 없다 이거군. 내게 내어줄 고깃덩이는 공작뿐이라는 거냐?’
정략(政略).
귀족들 사이에서 숨 쉬듯 나오는 이 말은, 상대를 인간이 아니라 위치나 능력, 또는 자리나 상징으로 보고 대한다는 뜻이었다.
‘황족과 결혼해서, 왕이 되고 싶다고 말했었지.’
탕, 타아앙!
카리오사는 요란하게 울리는 총성을 들으며 눈을 감고, 발렌시아누스를 떨쳐 내려 팔에 주던 힘을 풀었다.
그게 반격의 전조라 생각했는지, 발렌시아누스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내가 황족에 집착해 여기까지 올라왔듯, 너는 아세노르타에 집착하는가?’
결국 정략이지만.
카리오사가 손해를 보며 다른 대영주들의 항구를 지켜 주고, 발렌시아누스가 할아버지를 죽이고 그 손녀를 찾아가 협상하듯.
왕공 귀족은 그 직위가 곧 사람됨과 입장을 결정했기에.
정략이야말로 가장 진실로 가득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발렌시아누스가 대공이듯, 카리오사는 동부의 대후작이었다.
‘이런 집착도…… 나쁘지는 않네.’
카리오사의 몸에서 한 방울씩 흐르던 피가 거대한 피 웅덩이 몇 개를 만들었다.
루디가 빈 탄띠를 보고 탄식하며 상냥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세레라지에가 전광창 마법을 완성하고 발렌시아누스와 카리오사가 떨어지는 데로 쏘아낼 준비를 했다.
텐티아가 어깨와 허벅지를 찔린 상태로 끝끝내 일어서 계단을 올랐다.
카리오사의 눈에 청회색 안광이 빛나고, 바다 안개 같은 빛무리가 그녀의 양어깨 위에서 일렁이는가 싶더니.
“스스로, 불러온, 파도에!”
그녀가 하늘을 향해 소리 높여 노래했다.
쩍!
다음 순간 텐티아가 발동했던 흑요석 기둥, ‘봉마석’에 굵은 금이 갔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었던 마나가 다시 풀려났다.
기사들의 갑옷이 가벼워지고, 발렌시아누스의 제복에서 흘러내리던 아콰테그가 시간을 되돌린 듯 제자리로 돌아가고, 카리오사의 갑옷 철편 한 조각 한 조각에 하얀빛이 깃들었다.
루디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리고,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마법 단검 ‘생동’ 두 자루를 꼭 쥐었다.
카리오사가 수풀 사이에 숨어 있던 그녀를 흘깃 바라보더니, 포식자처럼 웃었다.
그리고 카리오사는 양손을 들었다.
“여기까지 하지. 항복이다. 죽여도 못 준다는데, 죽이면 나도 죽어. 사냥꾼은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해야 한다고.”
* * *
언제나 그렇듯 싸움은 그 자체보다 뒷수습이 더욱 어려웠다.
특히 포로가 지체 높은 대귀족이고, 성안에 그 포로의 군대 4천이 멀쩡하게 살아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다행히 포로는 더 이상의 적대 의지가 없었고, 아주, 아주아주 부자였다.
“다친 근위대와 기사들의 치료 물약 비용, 기도 헌금 비용, 갑옷과 무기 수리 비용은 모두 내가 내도록 하지. 황금 한 상자면 되겠나?”
“……예. 충분합니다.”
“그래. 아까는 유감이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는 솔레타라스의 시종이고, 각하는 아세노르타의 후작 아니십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의 입장을 정하는 건 직위와 작위였다.
신분이 다른 사람끼리는 함부로 사과해서도 안 되고, 받아서도 안 되는 법이었다.
“그걸 디스펠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잖니.”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
나는 세레라지에가 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다행히 그녀는 놀라운 제어력으로 마나 역류를 제어해 외상만 조금 입었고, 심장 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선배 마법사로서 말하자면, 디스펠을 당하면 그냥 그 마법은 포기해. 마나 아까워하다가 심장이 터지는 수가 있으니까.”
“입 다물렴. 다시 만나면 그때는 한 방에 기절시켜 줄 거란다. ……어머. 이게 뭐니?”
그녀는 분한 듯 새침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지만, 카리오사가 알 굵은 진주 한 상자와 진주 귀걸이 한 쌍을 선물하자 곧바로 금은 요동의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이카리스. 동쪽 바다의 진주 중 특별히 비행 마법 부여가 잘 되는 진주지. 하늘을 날려다 바다에 떨어진 소년의 눈물이 깃들었다는 전설이 있어. 마법사는 기동력이 중요하니, 잘 쓰도록.”
“그래.”
“…….”
카리오사가 잠시 세레라지에를 바라보더니, 짧게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보고를 들어 보니 방화범이 번개를 타고 날아갔다던데…… 대충 무슨 일이었는지 알겠네. 기억해두겠어. 게스타르테의 제자.”
“!”
세레라지에와 나와 루디와 텐티아는 동시에 얼굴을 굳혔고, 카리오사는 낄낄 웃었다.
“거기 시녀. 너는 어느 가문 태생이지?”
루디가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
긴장감과 적대감을 감추려는 거 같았다.
“후작 각하께 말씀드리기 송구할 만큼 한미한 가문입니다. 이름뿐인 몰락 귀족이니 삼가 침묵을 허하소서.”
짧은 침묵 끝에 카리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 마총을 아주 잘 쏘더구나.”
나는 슬쩍 루디와 카리오사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카리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배자가 혓바닥이 길었군. 자. 이제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겠지?”
* * *
알현과 만찬은 마커스 후작 때와 같이 사방의 천을 걷어 올린 야외 천막에서 이뤄졌다.
후작가의 동부 기사들과 전투마법사들, 황실의 백금 기사들과 전투마법사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주변을 경계했다.
세레라지에는 이번에도 전투마법사들 사이에 끼게 되었는데,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팡이를 꼭 쥘 뿐이었다.
제이릴리스는 미리 나와 이야기한 대로, 목에 구멍이 난 내 제복, 여기저기 부서진 카리오사의 철편 갑옷, 오른쪽 어깨 부위와 왼쪽 다리 부분의 보호구가 빠져 있는 텐티아 경의 백금 갑옷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짐이 늦잠을 자 이리도 알현이 늦어지게 되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대공의 재치 덕에 지난 사흘간 아주…… 심장이 요동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 이 제이릴리스의 황형이니 그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지당하십니다.”
둘의 대화는 적당히, 대귀족과 황제답게 흘러갔다.
이미 나 같은 아랫사람들이 말을 다 맞춰 놓고,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는 말이다.
만찬은 만찬답게 호화로운 요리가 나왔지만, 제이릴리스와 카리오사는 머리를 묶어 식사 자리의 예의를 다하지도 않았고, 지금껏 입에 댄 건 예의상 건배한 상그리아 뿐이었다.
“아세노르타 가문이 가진 영토는 일개 후작이 책임지기에 다소 무거워 보이는구나.”
제이릴리스가 황금색 눈동자를 나른하게 빛내며 단조로이 말했다.
저게 미리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왔으면, 땅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무서운 말이었겠지만, 그 뜻이 아니라는 걸 제이릴리스도 나도 카리오사도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동부의 사정에 관심을 가지시니, 실로 감사합니다.”
“따라서 내 그대를 공작으로 봉하여 그대의 위세에 걸맞은 위엄을 갖출 수 있도록 하고.”
공작(duke).
북부 대공(Grand Duke)인 세베릭에 이어, 두 번째 ‘진짜’ 공작이었다.
나도 대공(Prince)이지만, 송곳 꽂을 땅도 없는 이름뿐인 대공이니, 저 둘과는 그 위세를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리오사의 신비로운 얼굴은 어두웠다.
본래 동부 전체를 아우르는 왕이 되려 했던 카리오사니, 공작은 성미에 차지 않을 거다.
5천에 달하는 군대와 6만 5천의 연합군을 꾸려 왔다고 생각하면, 간신히 손해만 면한 성과였다.
다소 체면이 구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제이릴리스에게 청해, 카리오사에게 한 가지 선물을 더 주기로 했다.
“또한 닻 군도, 바다뱀 군도, 배들의 무덤 군도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회귀 전에 거기서 희귀 금속과 금맥, 각종 시약 광산이 몇 개나 터졌는지 모른다.
“!”
“해당 지역의 섬들에서 어인족들과 해적들을 토벌하고, 식민 정책을 통해 안정화하고, 섬에서 광맥을 비롯한 여러 자원을 채굴하라. 만약 이러한 과정에서 동방 대륙과 갈등이 생긴다면,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짐의 이름으로 결정하라.”
동방 대륙 국가들과의 영토 분쟁 탓에 지금껏 점령하지는 못했던 곳들이었다.
그래서 세 군도의 후작이 아니라 총독으로 봉한 거였다.
솔레타라스 제국의 이름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 줘야 하니까.
“폐하!”
카리오사가 청회색의 홍채와 세로로 갈라진 검은 동공을 떨었다.
펄을 뿌린 듯 빛나는 얼굴에 홍조가 돌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뾰족한 이빨이 보이기를 몇 번.
그녀가 제이릴리스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은혜에 이 카리오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