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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오사는 황제에게 정원을 둘러보고 싶다 청했고, 대귀족의 안내는 황족이 맡는 게 정석이었다.
루디가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카리오사와 함께 일어섰다.
아무리 천하의 ‘백상아리’라도 황제가 나선 이상 이빨을 숨기리라 생각했다.
땅거미가 기어 오고 태양 마차가 지평선 너머로 달려가는 가운데, 우리는 만개한 장미꽃이 하나둘 꽃잎을 떨구는 정원을 거닐었다.
작은 하천 위를 지나는 나무다리를 건너며, 카리오사가 입을 열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이제 전하라고 부르지도 않는 건가? 하기야 한 달 안에 공작이 될 텐데…… 무슨 상관이람.”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녀의 입가에 다시금 사냥꾼의 비릿하고 잔혹한 미소가 감돌았다.
내 어깨와 목에 박혔던 하얀 이빨이 반짝였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웃었다.
카리오사가 남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나를 세 군도의 공작이 아니라 세 군도의 총독으로 봉했지. 그런데 어차피 그곳은 황실의 손이 닿지 않는 땅이야. 총독 임명 같은 거 없이도 내가 점령할 수 있다고. 그깟 동방 대륙 해적 놈들은 내 함대 앞에서 상대가 안 되고.”
맞는 말이다.
회귀 전의 카리오사는 제이릴리스와의 전쟁과 세 군도 안정화의 양면 전쟁을 해냈다.
“총독이 된 이상 수익을 바쳐야 하지. 물론 자금 지원을 받겠지만, 금화 몇천 닢 정도로는 함대라는 괴물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결국 내 돈을 써서 세 군도를 점령하고, 그 수익은 나눠 먹자는 소리 아닌가?”
맞는 말이다.
정확히 그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절할 수 없지. 해적 놈들과 어인족 놈들은 어차피 토벌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동부에서 내 체면을 살릴 고깃덩이가 필요하니까.”
맞는 말이다.
이미 사실상 공작급 대영주로 여겨지던 그녀다.
5천 병사와 6만 5천 대군을 꾸려 놓고, 공작위 하나만 달랑 받아 돌아가면 망신이다.
“이 일에 내가 불만을 품고 날뛸 수도 있겠지만, 황제, 아니. 폐하의 존재와 별개로 그건 불가능해.”
황제, 라고 말했을 때 난 눈을 가늘게 떴고, 카리오사는 제때 말을 바꾸었다.
“지금 굶주린 상어 떼가 내 주변을 맴돌고 있거든. 물리적으로 피해를 보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일 때가 많은 법이지. 난 한동안 그것들을 진압하고 달래고 본보기를 보이느라 바쁠 거야.”
“그 과정에서 동부의 패권은 자연스럽게 쥐게 되겠지만.”
“응? 그래. 그렇지. 내가 질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나는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한 마검사니까.”
상식을 말하는 듯 태연한 목소리였다.
그 청회색 눈은 너무나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하고 운을 떼며, 물색 머리의 대귀족은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온 동부의 직신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 앞으로 내 봉신이 될 애들이니까. 본보기를 위해서 몇몇을 죽이게 된다면, 그들이 데려온 군대를 흡수해서 안정시키고, 먹여 살려야 하지. 심지어 꽤 잘 먹여 줘야 해. 원래 주인을 죽인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해야 하니까.”
“그렇지.”
“그런데 수도 곡식 시장을 틀어잡고 있는 게 너잖아. 가을 추수 물량의 70%를 황실이 계약했다고 하던데?”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단지 빙긋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얼마까지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여기서 아주아주 비싸게 받아 처먹지는 않겠지. 그럼 내가 함대를 제대로 못 굴리거든.”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욕은 단단히 먹어줘야 해. 그래야 수도 신민들이 굶주려도 황실 욕이 아니라 황실을 협박한 내 욕을 할 거니까. 겸사겸사 너희도 날 욕하면서 민심 좀 모으고…… 통치라는 게 다 그런 거지.”
카리오사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다 결국 멈췄다.
* * *
집광식 가로등이 창백한 빛을 내는, 정원이 끝나고 길로 내려가는 계단 앞.
난 그녀 옆에 서서 말없이 기다렸다.
카리오사가 신비한 얼굴에 상어 같은 미소를 지었다.
환한 빛을 받은 얼굴이 비늘처럼 반짝이고, 동시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색욕과 식욕과 재물욕의 경계선, 고양과 분노의 경계, 깨물어 부수어 버리고 싶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 진짜 이 개망나니 새끼. 플라니티에스가 이렇게 엿을 먹었군. 성자도 이러다가 납치까지 당했을 거고. 나 어떡하냐…… 아니. 이게 아니지. 그래. 발렌시아누스 대공.”
“…….”
“황제 폐하가 너를 버릴 때 다시 찾아오겠어. 지참금으로는 세 군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강한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난 그 웃음을 보며 답했다.
“정략입니까?”
“당연하지.”
수도 제일의 망나니답게,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만한 말을 바람결에 흘리듯 남겼다.
“아니어도 좋을 텐데.”
“!”
카리오사가 입을 쩍 벌렸다.
상어 같은 이빨이 눈앞에 늘어서고, 청회색 홍채와 세로 동공이 수축했다.
그 신비한 미인을 향해,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밤이 깊어 갑니다. 카리오사 대공. 기사들이 기다리는 거 같은데, 이만 내려가 보시지요.”
카리오사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 진짜, 이 망나니 새끼……”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오늘 밤에 조금 시끄러울 거다.”
동부 직신들과 약간의 실랑이가 있으리라는 말이었다.
“저는 잘 겁니다. 수도 신민들도 잘 수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게 아닌 이상, 그 정도는 받아줄 수 있었다.
카리오사가 마총 구멍이 숭숭 뚫린 제복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 그 등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렸고, 살았다.
난 발렌시아누스가 아니었다면 카리오사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강인하고도 유쾌하며, 의무에 충실하고, 욕망에 솔직했다.
해야 하면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시야가 좁되 그만큼 멀리 볼 수 있어서, 이렇다 할 고민 없이 폭풍같이 치열한 삶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았겠지, 하는 생각을 벌써 수십 년은 한 거 같다.
그래서 내가 카리오사를 못 미워한다.
……그런데 내 이름으로 곡식을 사들인 건 대체 누구일까?
* * *
그날 밤 수도 거리에서는 난리가 났다.
“묶어두었으니까 여기 마나 봉인 비석을 가져와. 이 방에 감금한다.”
“잡아라! 스피나 백작이 도주한다.”
“반항하면 죽여라. 오늘 밤 황실군은 움직이지 않는다!”
카리오사의 4천 대군이 한밤중에 숙영지를 박차고 나와 다른 동부 직신 대영주들이 묶고 있는 호텔을 점령한 것이다.
동부 대영주들도 하나같이 강력한 호위대를 이끌고 있었고, 300인씩 데려온 그들의 호위대를 모두 합치면 5천 2백에 달하는 만큼,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어인족을 산 채로 잡아먹는 바다 사나이들과 기사들은 이미 아침부터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후작은 두 개의 기동 작전을 장교들에게 숙지시켰다.
첫 번째 작전은 제이릴리스를 대비해 수도 밖으로 후퇴하는 작전이었고, 바로 두 번째 작전이 지금처럼 동부 대영주들을 싹 쓸어 담는 작전이었다.
한쪽은 싸움에 준비되어 뭉쳐 있었고, 한쪽은 설마설마하며 나뉘어 있었다.
게다가 카리오사 본인이 선두에 서서 폭풍과 순풍을 휘두르며 날뛰었으니, 동부 직신들은 각개격파 당해 한 명 한 명 사로잡히고 말았다.
“수도 치안감들과 흑철기사단은 뭘 하고 있는가?”
“그게…… 보이지 않습니다. 각지의 위병소도 텅텅 비어 있습니다.”
“에잇! 바보 같은 놈들! 성문 밖 황동기사단에라도 도움을 청해라!”
“성문은 닫혀 있고, 이미 백상아리 깃발의 기사들에게 점령되어 있었습니다.”
동부 대영주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를 바보가 아니었다.
황실이 정말로 이 일을 모른다고 생각할 멍청이는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제이릴리스! 우리를 다 팔았구나!”
본래 군주는 직신들이 싸우면 상당히 적극적으로 말리려 노력한다.
한쪽이 어느 한쪽의 봉신으로 들어가 군주의 배신이 될 경우, 군주에게 올라오는 세금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무려 통합 1만에 달하는 군대에 수도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침묵한다는 건.
이미 모든 계산과 협상이 끝났다는 말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분명 그 망나니의 짓입니다!”
“젠장! 우리가 먼저 협상안을 가져갔어야 했는데…….”
“이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룻밤의 침묵.
왕위와 대공 남편을 모두 포기하고 받아낸 비싼 침묵이었다.
쾅!
아세노르타의 기사들이 호텔 문을 부수고 숨은 적들을 끌어냈다.
가슴에 백상아리 문장과 각자의 문장을 단 기사들은 하나같이 피에 굶주린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뭍으로 올라온 상어 떼가 이빨을 드러냈다.
카리오사는 마지막까지 반항하던 한 후작가 기사의 겨드랑이를 순풍으로 헤집으며 말했다.
“후작 셋은 내 숙영지에 감금하고, 백작들은 모두 불러 내게 충성맹세를 시킨 뒤 감금해라. 공작위를 수여 받는 대로 후작들에게도 맹세를 받을 것이다.”
“예. 각하.”
“그래.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그래도 왕 같은 권력은 손에 쥐겠구나.”
본래 동부가 하나로 뭉쳐 세력을 만들고, 아세노르타가 그들의 대표로서 왕위를 받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동부의 귀족들은 귀족답게 언제나 두 번째 칼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세노르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 어차피 처음부터 수틀리면 다 잡아들일 생각이었어. 이리 돌아오든 저리 돌아오든 항구에 입항만 하면 되지.”
카리오사는 질질 끌려가는 노후작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녀는 흡족하니 웃으며 껴안고 바들바들 떠는 호텔 지배인과 주인에게 다가가 궤짝 하나를 내밀었다.
“자, 자. 받아라. 수리비로는 충분할 거다. 수도에서 이 정도 호텔의 주인인 걸 보면 너도 귀족 같은데, 작위가 뭐냐?”
“후작, 후작입니다.”
카리오사는 깔깔 웃었다.
같은 후작이지만 그녀는 광대한 영토와 일곱 함대를 가졌고, 그는 수도의 저택 하나와 사업체 몇 개, 귀족 연금을 받았다.
역시 중요한 건 작위의 이름이 아니라 실권이었다.
“그래. 후작. 그럼 실례했다.”
그녀를 왕으로 만들어준 백작들의 눈치를 보며 통치하느니, 공작으로서 군림하는 게 백 배는 나았다.
* * *
흑철 기사 몇몇과 치안감들은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현장을 수습하고, 간밤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제이릴리스는 카리오사를 불러 형식적으로 문초했고, 카리오사는 1만의 병력 중 절반을 수도에서 빼기로 했다.
물론 그렇게 빠져나간 5천은 모두 ‘동부 연합’의 5천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 루디, 세레라지에를 모두 별궁에 불러 놓고 제이릴리스에게 하사받은 비싼 술을 있는 대로 깠다.
“텐티아 경. 갑옷은 잘 수리되어 가나?”
“아. 부서진 부분만 새로 하사받았습니다. 판금 갑옷의 장점이 그겁니다. 철편 갑옷은 한곳이 뚫리면 주변을 다 고쳐야 하지만, 저희는 그냥 새 부위를 받아 끼면 됩니다.”
텐티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레라지에가 치고 들어왔다.
새침한 얼굴에 적잖은 피로감이 어려 있었다.
“그렇다고 갑옷 좀 험하게 다루지 말렴. 다 갑옷으로 받아내지 말고 검으로도 좀 막으란 말이야!”
“예? 왜 그러십니까?”
“그 갑옷 맨날 수리하고 또 만드는 게 우리란다. 대장장이들은 갑옷 만들면 끝이지만, 그 부위별로 회로 새기는 건 황립 마도 공방에서 하는 거잖니. 어제는 결국 그 일이 나까지 왔잖니! 낮에는 워록이고 밤에는 연구자니? 이게 말이 되니?”
“으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결국 제자들이…… 아닙니다. 전하.”
텐티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루디는 발렌시아누스의 잔을 채웠으며, 이미 얼굴이 붉어진 발렌시아누스는 루디에게 더럽고 추악한 뒷거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총독부가 점령지를 개발하는 형식이 회사를 차리는 거거든. 그게 돈 계산하기도 편하고 수익 분배하기도 편하니까. 곡물이랑 희귀 금속을 유통하는 황립 어용 상단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네. 발렌 님. 듣고 있어요.”
루디는 녹색 눈을 상냥하게 빛내며 지칠 대로 지친 대공을 다독였다.
“카리오사도 군도 개발할 때 회사를 차릴 건데, 거기 투자금 60%를 황실에서 대기로 했어. 그러니까 황실 지분이 60%지.”
“네네.”
“폐하가 나한테 10%를 주신단다. 흐, 흐흐. 이제 난 부자야. 배당금! 배당금이 분기별로 금화 몇천 닢은 나오겠지.”
“네네.”
발렌시아누스가 부끄럽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루디. 돈 들어오면 수도에 저택 사줄게. 그리고 작위도 줄게.”
“작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