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애초에 시녀와 시종은 하인보다는 부르주아들의 비서에 가까운 직종이고, 본궁 시종장에게는 ‘궁정백’이라는 후작급 작위가 주어지며, 제이릴리스의 수행 시녀 비네아도 이름 높은 궁정 귀족 가문 출신이다.
따라서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섬기는 루디가 작위를 받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루디 역시 전설처럼 들어 온 이야기들이 있었다.
제국의 긴 역사에서는 시녀 출신 공작이나 황비, 대신도 몇몇 나왔다.
그러나 그 전설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줄은 몰랐기에, 루디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녹색 눈과 말랑한 볼이 파르르 떨렸다.
“작위라면…… 남작이겠지요?”
발렌시아누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작? 지금 대공 전하에게 남작의 봉사를 받으라 이 말이야?”
미간이 찌푸려지고 하얀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루디는 침착하게 한 걸음 위로 올라간 작위를 꺼냈다.
“그, 그럼 자작이지요. 네. 원래. 자작이 백작의 부관 같은 거니까, 딱 발렌 님을 섬기기 좋은 작위 같아요.”
“내가 백작이면 그랬겠지. 아니야.”
루디는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걸 느꼈다.
“그럼…… 백작인가요?”
백작은 그 아랫단의 귀족들과 급이 다른 작위였다.
본격적인 대영주로 취급받는 백작은 자신의 ‘궁정’을 꾸릴 수 있고, 작위를 내려 귀족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루디는 발렌시아누스의 시녀고, 애초에 발렌시아누스 역시 송곳 꽂을 땅도 없는 황족이니, 백작이든 후작이든 연금만 받을 수 있는 이름뿐인 작위였지만, 그럼에도 백작은 백작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한 눈빛 아래 감춰놓았던 미묘한 떨림이 한 차례 요동치고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루디는 그 역시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발렌시아누스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후작위를 받고 싶어?”
루디가 백작위를 듣고 정신이 나간 걸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한 거 같았다.
“그, 그 만약에 소드 엑스퍼트까지 오르면 공작위도 줄 수 있기는 한데…….”
와장창, 루디는 하얗게 달아오른 머릿속이 완전히 부서져 내리는 걸 느꼈다.
누구는 황실에 쳐들어온 끝에야 받아낸 작위인데, 그게 저렇게 쉽게 입에 올라가도 되나 싶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백작이라니요……. 저, 저는 남작도 황송한데. 게다가…… 테, 텐티아 경은 기사아…….”
루디는 횡설수설 두서없이 말을 흘리며 텐티아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녀가 남작 작위라도 받는다면, 텐티아보다 귀족 서열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텐티아는 그게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경쾌하게 웃었다.
“루디. 귀족은 태어나지만, 기사는 만들어진다. 이건 내가 얻은 직책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기사 작위는 귀족 작위와 달리 세습되지 않았다.
설령 공작의 아들이라도 소드 엑스퍼트에 달하지 못한다면 서임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력 없는 궁정 귀족들은 작위와 별개로 기사들에게 상호 존대를 했다.
노구의 궁정 귀족 궁무대신도 공작이었지만, 텐티아에게 먼저 커피를 권하고 반존대를 했으며, 텐티아 역시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아니면 내게 내심 존대를 듣고 싶었나? 루디 백작님?”
텐티아가 고개를 슬쩍 숙이며 붉은 머리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 아니에요.”
루디의 하얀 얼굴이 텐티아의 머리카락만큼 달아올랐다.
텐티아는 낭랑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아무 문제 없지. 주군께서 내리시는 은혜다. 거절도 불충이야. 달게 받고 충분히 즐기도록 해라.”
루디는 입술을 몇 번 깨물며 정신을 차렸다.
백작, 백작이라니.
이내 그녀는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이런 자리를 주시면 사람들이 발렌 님을 욕할 거예요. 동부 병사 수천 명이 수도에서 싸워서 난리가 난 판에 시녀나 끼고 놀고 있다고요.”
발렌시아누스는 오만하게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루디가 나랑 같이 욕먹어주면 좋겠는데?”
이에 루디는 상냥한 미소로 답했다.
“네. 발렌 님. 언제까지나 함께 하겠습니다.”
초승달처럼 휜 녹색 눈에 결연한 의지를 담으면서.
자작하던 세레레지에는 제 이복동생과 그의 시녀를 보고 새침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희 미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말들이었다.
제국의 대귀족들이 하나둘 수도로 모여드는 가운데, 여름밤이 깊어 갔다.
* * *
분궁, 반쯤 개방된 넓은 1층 회의실에서는 언제나처럼 아침부터 업무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둥 사이로 행정관들과 치안감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상황을 보고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깊은 잠을 자고 돌아왔고, 사악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쌓인 일들을 척척 처리했다.
그는 40년 차 마검사인 동시에, 40년 차 행정 관료였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수도의 평민 의원들이 동부 영주들의 싸움으로 파손된 거리의 복구 비용을 황실에 청구했습니다!”
“궁정 귀족들을 움직여서 일단 의회에 묶어 놔. 여기서 현금이 더 나가면 행정에 문제가 생긴다.”
“일단 잡아둔 금화 500닢은……?”
“그건 세베릭이 오면 접대해줄 돈, 잠깐. 그게 왜 현금으로 남아 있지? 선물로 줄 상아탑 마도구를 사 오라고 했던 거 같은데?”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는 전쟁 같은 이 상황에 필요한 판단을 필요한 순간에 내렸고, 하드리탄은 그 능력을 가장 가까이서 보며 빠르게 흡수했다.
하드리탄에게 필요한 건 천재성을 온전히 개화시켜줄 경험이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그 경험을 압축적으로 주입했다.
“세베릭 대공이 내일 입항할 예정이다. 내일은 운하를 완전히 비워 놔. 대공 전하가 들어오시는데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
“예. 전하. 그럼 상단들의 항의는……?”
“묵살하도록. 세베릭의 편의가 우선이다. 단, 육가공계 식료품의 경우 성벽 밖 선착장에서 하선해 육로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라.”
“예. 전하.”
발렌시아누스는 미움받을 용기를 가진 황형이었고, 그의 이름을 팔아 많은 일을 수습했다.
“전하. 말씀대로 전하께서 동부 귀족들의 난전을 묵인하셨다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신 겁니까?”
“폐하께서 묵인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게 할 수는 없지. 의회는 궁정 귀족들이 견제해줄 거고, 교회는 이미 나를 너무 심하게 비난하고 있어서 더 비난해 봐야 의미가 없어. 그럼 아무 일도 없는 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하께서는.”
발렌시아누스는 이례적으로 머뭇거리는 행정 관료를 손짓으로 밀어냈다.
“자, 자! 열사암후와 적기제독이 어디까지 왔는지 아는 사람 누구 없나?”
“외무부 전령 보고 30분 남았습니다! 지금만 기다려 주십사-.”
“10분 주겠다.”
“으아아아악!”
관료들은 비명을 지르고, 황제는 과거 사생아로 장난질을 치려 했던 플라니티에스 후작과 만나고.
그레모리우스와 프로이하이트의 어린 새 후작들이 이틀 안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보고를 받고, 어쩐지 황실을 피하려 하는 성직자들과 상아탑 마법사들을 다과회 핑계를 붙들어 놓고.
“이 앞까지 왔다고? 근위대!”
시장 봉쇄와 거리 파손으로 손해를 본 신민들에게 구제 금융을 제공하고, 아카데미 학생회장 진을 불러 대학생 깡패들을 단속하고, 코넬을 통해 빈민가 공방에 사람을 더 고용해서 거리가 깨끗해 보이게 하고, 적가면이 잡아 온 수상한 연초 파는 놈들을 죄다 교회를 통해 불태우고…….
제국 황실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또 돌아갔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중심에 서서 오만하게 웃으며 오케스트라의 지휘관처럼 수많은 일을 처리했다.
화려한 하얀 제복을 입고, 한쪽 허리에는 칼, 반대쪽 허리에는 도장을 찬 망나니 대공.
그의 입과 손에서는 피폐하고도 오만하며, 위태롭기에 찬란한 연주가 흘러나왔다.
꼭 그 같은 연주였다.
* * *
“동생아. 이번에 황립 마도 공방이 상아탑과 공동 연구해서 만든 마도구가 있단다.”
그 연주자의 곁으로 한 마법사가 다가갔다.
검은 정장 차림의 관료들이 흩어지며 길을 텄다.
세레라지에는 오랜만에 마법 이야기를 하는 게 기뻐서, 새침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긴 생머리에 남색 로브, 남색 고깔모자를 쓰고 보석 지팡이를 짚은 여인은 까마귀 같은 관료들로 가득한 이 본궁에서 조금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다.
바로 어제 이 궁 옥상에서 벼락 수십 발을 불러낸 마법사 앞에서 모든 관료가 그녀에게 대면 보고 우선권을 상납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세레라지에를 보고 싱긋 웃으며 물었다.
“오. 어떤 마도구인데?”
세레라지에는 자부심 넘치는 높은 목소리로 답했다.
“조금 더 날카로운 창이지. 지금까지 완전히 기운을 갈무리한 침식자를 잡으려면 신성력에 직접 노출 시키는 방법뿐이었잖니? 하지만 우리 위대한 마법사들이 언제까지 그 비열한 사제들에게 의존할 수는 없잖니.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연구를 계속했단다.”
“비열?”
“그래, 비열. 불만 있니?”
“……아니. 그래서?”
“이건 일종의 공명을 일으켜서 침식된 부위를 자극하고, 침식자의 반사적인 반발을 감지해서 침식자의 위치를 파악한단다. 자세한 원리를 말하자면…….”
발렌시아누스는 저 자세한 원리가 대충 마도서 세 권 분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진주 귀걸이를 끼고 한층 더 우아해진 금은 요동의 세레라지에와 이야기하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지만, 지금 그는 시간이 없었다.
“작동하는 거 보여주라.”
“뭐, 뭐?”
“작동하는 거 보여줘.”
발렌시아누스가 바싹 다가와 말하자, 세레라지에의 고깔모자 챙이 가볍게 눌렸다.
세레라지에는 혀를 한 번 차고 나무 상자 안에서 회중시계처럼 생긴 마도구를 꺼냈다.
“정말 인내심이 없구나. 동생아. 그래. 너는 이 신비한 원리 같은 건 조금도 관심이 없고 한낱 현상 따위에만 열광하지. 그런 놈들은 마도구를 못 쓰게 해야 하는데…….”
그녀는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마도구에 마나를 가볍게 불어넣었다.
바늘들이 빙글빙글 돌고 마도구가 은은히 빛났다.
마나에 예민한 텐티아와 발렌시아누스, 세레라지에는 미세한 가루 같은 마나가 사방으로 퍼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근방 100m 안에 침식자가 있으면 그쪽에서 바늘이 멈추고, 숫자 부분에서 빛이 난단다. 10명의 표적까지 한 번에 탐색할 수 있지. 지금은 안전하니까 안 멈출…… 어?”
띵,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바늘이 멎었다.
텐티아는 일순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고, 세레라지에는 색이 다른 두 눈을 일그러트렸다.
그녀가 지팡이를 떨어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긴 남색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해집으며 한탄했다.
“내, 내가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말도 안 돼. 분명히 지하 실험실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는데…… 대체 누가 회로를 이따위로 새긴 거니? 이 열등한 것들이…….”
발렌시아누스는 황금색 눈을 가늘게 뜨고 바늘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텐티아 경.”
“예. 전하.”
“저거. 애 아닌가?”
이제 15살이나 되어보이는 백발의 소년이 황궁 외곽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예. 애가 맞습니다.”
“지금 황궁에 애가 어디 있나?”
다음 순간 소년의 손에서 녹색 불길이 피어올랐다.
불길은 한데 뭉치며 불덩이가 되었고, 행정 관료들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발렌시아누스는 반사적으로 세레라지에를 끌어안으며 바닥에 몸을 던졌고, 텐티아는 면갑을 내리고 달려가 불길을 몸으로 덮쳤다.
화르르륵!
일순 회의실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 * *
다행히 행정 관료 중 사망자는 없었다.
폭발은 강력했지만, 텐티아 경의 갑옷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나설 일도 없이 곧바로 근위병들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30분 뒤, 말도 안 되는 보고가 올라왔다.
“못 잡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근위병들과 백금 기사들이 머리를 숙였다.
나는 황당한 기분으로 물었다.
“못 잡았다? 여기 기사와 전투마법사가 몇인데 못 잡았다?”
애초에 추적 전문가가 아니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사들이 꼬맹이 몸을 가진 침식자 하나를 못 잡았다는 게 그리 납득 가는 말은 아니었다.
“‘은마력’과 ‘투명화’ 마도구를 가지고 있던 거 같습니다. 점멸 마법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신 파동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길다.”
“작정하고 온 놈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