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나는 폭발 직후 세레라지에와 텐티아 경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했다.
“경! 괜찮은가?”
둘 다 목숨 걸고 구한 미래의 인재들이고, 그걸 넘어서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 세레라지에는 진짜 가족이구나.
“예. 전하. 아무 문제 없습니다.”
텐티아 경은 붉은 화염 저항의 망토를 펄럭이며 면갑을 올리고, 늠름하게 씩 웃었다.
“혹시 다치려 어쩌려고 그리-.”
“전하를 지키다 다치면 영광입지요.”
나는 말문이 턱 막히는 걸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끌어안았던 세레라지에를 일으켰다.
“누나. 괜찮아? 다리 삐거나 깔려서 어디 부러지지 않았어?”
세레라지에가 노란색과 파란색의 금은 요동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실수했을 리가 없잖니…… 역시 이 마도구는 성공작이었단다.”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은 거 같았다.
아니, 세레라지에라면 다치고도 저런 소리를 했을 수도 있기에, 일단 회복 포션을 마시고 안정을 취하게 했다.
곧바로 사람을 보내 제이릴리스 쪽에는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생동’과 ‘아가테’를 들고 달려온 루디를 다독였다.
“발렌 님! 누구에요? 제가 그 못된 놈의 머리통을 썩은 수박처럼 터뜨려 버리겠어요!”
“괜찮아. 괜찮아.”
불타 버린 서류들을 보고 망연자실한 하드리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다행히 제이릴리스 쪽에는 문제가 없다는 보고를 들었다.
“근위대를 다 끌어모아 폐하 곁을 지키고, 흑철 기사들과 치안감들은 황궁 바깥을 순찰하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이후 백금 기사들에게 실행범을 놓쳤다는 얼토당토않은 보고를 들었고, 놈이 정신 파동도 변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에, 한 가지 직감이 들었다.
그날 오후, 고위 치안감들과 치안총감, 바르바토스 경이 침통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나는 내 직감이 맞았다는 걸 알아챘다.
“두 곳 이상에서 이 일이 일어났나 보군.”
“전하. 오늘 시내에서 녹색 화염을 동반한 폭발이 일곱 건 일어났습니다.”
세상.
* * *
나는 이 참담한 소식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미친 듯 돌아가는 걸 느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사망자 수도, 재산 피해도 아니라, 이 사건이 충성맹세에 끼칠 영향이었다.
“오염 위험이 있으니 사망자들은 일단 정화부터 받고…….”
“부상자가 우선이요. 사망자들은 화장합시다.”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수도에 침식자가 나타났습니다. 분명히 세레라지에 전하의 마도구가 울리는 걸 들었다는 말입니다. 당장 교회와 대영주들의 협력을 받아 대대적인 색출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한 근위병의 말이었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결코 허락할 수 없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치안총감과 고위 사제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텐티아 경과 세레라지에도 의문스러운 표정이었고, 하드리탄만이 내 뜻을 이해했는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발렌시아누스.”
나는 달려온 사제들의 치료를 받는 행정 관료들을 바라보았다.
마도구에서 난 소리가 그리 크지도 않았으니,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만 입 다물게 하면 그놈이 침식자라는 건 아무도 모를 게 분명했다.
나는 주변인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놈은 정신 파동을 쓰지 않았지. 그건 오로지 충성맹세만을 방해하려는 계략이야.”
치안총감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게 단순히 약간 정신이 나간 마법사의 반역이라면, 규모가 다소 클지언정 그리 드문 일도 아니야.”
“음.”
“고위 귀족이나 왕족, 황족을 죽여서 관심을 끌려는 미친놈들은 어디에나 있지. 아니면 공화주의자나 열사암후, 그래. 열사암후 체사르의 짓으로 몰아가도 상관없어. 대귀족들의 호위대에 딸려 들어왔다고 주장해도 되고. 하지만 이게 침식자의 짓이라고 밝혀지면 어찌 되겠나?”
치안총감과 바르바토스 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침식자가 수도에서 대낮부터 날뛰고 있는데, 그걸 처리하지도 못하는 무능한 황제 폐하…… 같은 상황이 되는 겁니까?”
난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술 더 뜨면 내통이니 밀약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고,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는 수도에 머물 수 없다며 돌아가겠다는 대귀족이 나올 수도 있지. 애초에 충성맹세를 하기 싫은 대귀족이 그 말을 하기 위해 보낸 자일 수도 있고.”
세레라지에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고, 나는 내가 똑바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 * *
“모두 알지 않은가?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신경전과 정치 싸움이 오갔는지. 여기서 그놈이 침식자로 밝혀져 버린다면 죄다 끝이 날 수도 있다고! 당장 내일 북부 대공 세베릭이 오는데, 침식자가 있는 도시에 그를 들일 수 있겠는가? 북부 대공의 충성맹세를 못 받은 폐하가 폐하로 인정받겠는가!”
바르바토스 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덮게. 방법은 상관없어. 이미 잡혔다고 해도 좋고, 미친 마법사를 찾기 위해 마법 거리를 수색해도 좋지. 물론 신문사들을 싹 돌며 입단속을 시켜야 할 거고, 의회에 가서 주요 파벌의 거두들에게 기름칠도 해 줘야겠지.”
텐티아 경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루디를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루디. 가서 금화 세 자루 가져와.”
“세 자루나요?”
“이럴 때 쓰려고 모은 거야.”
치안총감이 헛기침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즉, 발렌시아누스 전하께서는, 사건을 은폐하실 생각이며, 수도에 침식자가 있다는 사실을 시민들과 대귀족들에게 숨겨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히 이해했군. 그렇게 해서 시간을 끄는 사이에 조용히 잡아드려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려야지.”
“그렇군요. 그럼 저는 못 하겠습니다.”
바르바토스 경이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
치안총감이 나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갈색 눈동자가 의분으로 타올랐다.
“전하. 지금 당장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대영주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놈이 언제 정신 파동을 터뜨릴지 모릅니다.”
나는 턱을 쳐들며 그를 깔아보았다.
“내 말을 콧구멍으로 들었나? 그랬다가는 충성맹세는 물 건너가네.”
“정말로 이렇게 감출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러다가 침식자가 1백 명쯤 나와서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수만 명이 죽을 겁니다!”
나는 고집스럽고 충직한 치안총감을 바라보았다.
꽉 쥔 그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치안총감.”
“예. 전하.”
“적가면에게 용돈 좀 받지 않았나?”
바르바토스 경이 목덜미를 잡았다.
치안총감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는 듯, 슬프게 웃었다.
“예. 전하. 받았습니다. 저도 깨끗하게만 살아온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선을 넘었습니다. 금화 10닢으로 안 되는 건 금화 100닢으로 되는 법이지요. 하지만……어떤 일은 금화 1,000닢으로, 금화 10,000닢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반역이나 패륜 같은 일 말이지요. 전하가 제게 지시하신 일은 그런 일입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치안총감의 말이 맞았다.
침식자의 출몰, 그것도 명백히 활동하기 시작한 침식자의 출몰을 은폐하겠다는 건, 문자 그대로 정신이 나간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충성맹세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모르기는 몰라도, 내가 북부 대공에게 지난해보다 30% 늘어난 곡식 지원을 전달한 탓에 굶어 죽거나, 막대한 빚을 진 빈민과 농민들이 수만 명은 될 거다.
아무리 침식이 진행되는 사람들이었고, 깡패들이었다지만, 텐티아 경을 시켜 빈민가에서 사람을 천 단위로 베어 넘긴 적도 있었다.
회귀 전으로 돌아가면 말할 것도 없다.
그때 나는 한 왕국이나 한 백작령에 의도적으로 원군을 보내지 않고, 그곳이 망하는 동안 후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치안총감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감히, 황족의 명령을 거스르느냐?”
“전하!”
바르바토스 경과 텐티아 경이 나를 말리려 했으나, 내 몸에 손을 대지는 못했다.
나는 치안총감의 갈색 눈을 노려보았다.
“너는 내 뜻에 불복할 자격이 없다. 너는, 내가 지금껏 해온 일들을 망칠 자격이 없어. 나는, 너라는 인재가 제 자리에서 톱니바퀴처럼 굴러 주리라는 가정하에 이 일을 준비했다. 그동안 순순히 따랐으니, 앞으로도 그리 해라!”
“…….”
“너는, 나를 실망하게 할 자격이 없어. 내게 기대감을 심어주었으니, 네 양심을 부수고 내 말을 들어라.”
치안총감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동자에게 오만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게 보였다.
그 양심의 무게가 너무 무거울 거 같아서, 나는 그의 결정을 조금 더 편하게 해주기로 했다.
“큰애가 아카데미 검술학부 3학년이랬지. 학생회장 진과 친하고, 최근에 학생회에 들어가 신축 자취방을 구했다는데, 아닌가?”
그는 진이 내가 심어둔 현지 협력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진의 일이 아카데미에서 침식에 손을 댄 학생들을 죽이고 화장해서 지하수로에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 거다.
치안총감이 지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멱살을 놓았고, 그는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밀랍 인형처럼 지시했다.
“바르바토스 경. 치안감들과 함께 신민들의 동요를 안정시켜 주게.”
“예. 전하.”
“하드리탄. 행정 관료들을 다독이고, 입단속을 하게.”
“그러지. 발렌시아누스.”
“신문사와 의회 쪽은 내가 직접 처리하지. 세레라지에 누나.”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이야기는 끝났니?”
내가 보인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두려웠으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새삼 그녀가 세상 모든 윤리와 상식에서 벗어난 상아탑 출신의 천재 마법사라는 게 실감 났다.
“별로 무거운 이야기도 아니었어. 그 마도구 최대한 빨리 양산해주라.”
“그래. 맡겨만 주려무나.”
“고마워.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바로바로 말해.”
“정말이니? 그럼…….”
“그 마도구 만드는 데.”
세레라지에가 눈을 깜빡이며 물러섰고, 나는 때마침 돌아온 루디가 가져온 금화 자루를 받아 들었다.
“나는 신문사들과 의회에 가도록 하지. 자. 그럼 다들 움직이게나. 황제페하를 위하여.”
손뼉 치며 사람들을 흩었다.
치안총감이 마지막까지 미련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옳다.
오늘 8번이나 폭발을 일으켰으면서 정신 파동을 터뜨리지 않았다는 건, 우리가 정신 파동의 위험에 벌벌 떨며 신민들을 대피시키고 대영주들을 움직이기를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분명히 이건 세력 있는 옛것 추종자들의 계획이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눈앞까지 온 우리의 목표를 날려버리게 하려는 거다.
정말로 정신 파동을 터뜨릴 리는 없다.
모든 협박은 그걸 하기 전에만 효과가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텐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투구를 옆에 낀 그녀는 늠름한 얼굴에 수심을 드리우고 있었다.
안광 사라진 붉은 눈이 꼭 굳은 피처럼 보였다.
“내게…… 실망했나?”
텐티아 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눈썹 근처에서 흔들렸다.
“예전에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던 적이 있으셨지요. 강해지면 정정당당해지기 쉽다고요.”
그랬던 거 같다.
술 마시고 함께 거리를 걸으며, ‘전하가 그런 술수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 보니, 정정당당하다고 믿었던 방법들이 혹시 틀린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고 했었지.
그때 내가 그렇게 답했다.
아직 약한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그랬네.”
“전하께서는…… 아직 더 강해지셔야 합니까?”
나는 잠시 침묵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정정당당한 대결을 청해 오는 자들에게 정정당당히 맞서 줄 정도로는 강해진 거 같네.”
“그럼.”
“그런데 적은 더 강해지더군. 내가 얼마 전 누구를 상대했는지 아나? 그레모리우스 가문의 황금기사단장 제르파스를 상대했어. 한 대 맞으니 비늘 두른 팔이 부러지더군.”
“기억합니다.”
“카리오사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텐티아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경은 정정당당히 싸웠네. 하지만 만약 패배하면 내가 죽는 상황이라면 어떻겠는가?”
그녀가 조금이나마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제가 알고 있는 방법은 모두 쓰겠지요. 정 안 되면 가랑이를 걷어차고 얼굴에 흙이라도 뿌릴 겁니다. 하하. 그렇군요.”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시간이 없다는 건 최고의 주문이라는 말이 있지. 절박함과 두려움은……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끔 한다네.”
텐티아 경은 나를 따라오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무엇이 그리 절박하십니까?”
그 질문에 나는 체감상 아득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전 대륙에 악명을 떨치는 황제 제이릴리스,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와 그를 지지하는 대영주들과 타국들, 하루걸러 하루 터지는 마경, 마테오스의 죽음…….
“모든 것. 텐티아 경. 나는 모든 게 두렵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녀가 말했다.
“그럼 전하는 언제나 망나니시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