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87)화 (187/340)

(187)

후드를 뒤집어쓴 소년이 지붕 위를 질풍처럼 내달렸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는 몸동작이 놀라울 정도로 민첩했다.

디에가 아몬의 힘을 끌어 올리며 따라붙었는데도 점점 거리가 벌어질 정도였다.

“젠장!”

‘사람들 앞에서 힘을 더 써서는 안 돼.’

아몬 신앙은 이단이 아니지만, 여전히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디에의 우상인 코넬도 연설 중 은으로 만든 화살에 저격당해서 큰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저 앞에서 도망치는 놈을 놓칠 수는 없는데…….’

후드를 뒤집어쓴 소년이 거리 하나를 뛰어넘으려 했다.

“저 애 좀 봐요!”

“세상에…… 무슨 일이지?”

“누가 쫓아오는 거 같은데?”

사람들이 디에를 바라보았고, 디에는 반사적으로 건물 틈 사이로 몸을 숨겼다.

‘젠장!’

빈민가 태생이라는 낙인은 여전히 소년의 가슴 속에 남아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도록 했다.

디에가 주춤한 사이, 후드를 쓴 소년은 지붕 끝을 박차며 도약했다.

심약한 아가씨 몇몇이 기절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년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소년이 바닥에 떨어져 붉은 고깃덩이로 망가지는 일은 없었다.

타악, 소년은 8m도 넘는 폭의 도로를 건너뛰었고, 허공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나아가 반대편 건물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후두득, 소리와 함께 돌가루가 떨어지고, 밑에 있던 행인들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비켜!”

그는 훤칠한 키에 장검을 들고 있었고, 수도 안에서 장검을 찰 수 있는 건 귀족이나 경비대원, 치안감, 기사, 또는 아카데미 검술학부생뿐이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검술학부생이란, 어지간한 깡패들은 눈도 못 마주칠 실력의 싸움꾼이라는 뜻이었다.

아카데미 생활 내내 수백 대 수백의 패싸움에서 활약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갈라지고, 크리스티안은 벽을 밟고 크게 도약하며 후드 쓴 소년, 아니. 침식자의 발목을 베려 했다.

크리스티안이 뛰어오른 순간, 후드 쓴 소년은 건물 가장자리를 잡은 손을 도리어 놓아버렸다.

“!”

크리스티안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소년은 인파 사이로 추락했다.

디에는 단검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얘야! 괜찮니?”

“일어났어요.”

“병원이나 신전에 가자꾸나.”

“당신들 누구요! 누구길래 칼까지 뽑고…….”

디에는 그 애가 침식자라고 외치려다 잠시 움찔했다.

사람 많은 이 거리에서 침식자를 자극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 사이에 후드 쓴 소년은 사람들의 손길에서 빠져나오더니.

“젠장.”

인파 속으로 몸을 던지고, 애초에 없었다는 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방금 뭐였어?”

“어, 어디 갔지?”

디에는 크리스티안과 눈을 마주치고 침음성을 흘렸다.

사람들이 둘에게 의문과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디에는 크리스티안을 잡아끌고 골목으로들어갔다.

일단 다시 오넬리와 합류해야 했다.

* * *

다섯은 뒷골목에서 모였고, 오넬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추적이…… 끊어졌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문자 그대로 사라지지 않은 이상 불가능할…… 텐데.”

크리스티안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문제 그대로 사라진 게 맞을 수도 있다. 달리던 와중에 갑자기 스르르 사라져 버렸어. 투명화인지 영체화인지, 희귀한 마도구의 힘인지 아니면 놈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거다.”

호즈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치안감님들에게도 말했어요. 침식자가 나타났다고 했고요, 혹시 몰라서 미친 마법사를 봤다고도 했어요. 다들 움직여주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일단…….”

상인은 침통한 표정의 젊은이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15년은 더 살았을 테니 말하자면, 일이 진행되다 막혔을 때는 일단 막히기 전까지 되돌아가는 게 정답이라는 거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일단 다시 그 노마법사께 가보는 게 어떻겠나? 나는 잘 모르지만, 새로운 추적 마법이나 더 고차원적인 마법을 청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호즈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신고 안 할게요. 고해성사는…… 아아.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오넬리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그럼 다시…… 가보자.”

디에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고, 곧이어 그게 사실이었음을 알아챘다.

“마법사님?”

두 시간 전 그가 설득했던 마법사의 집은 활활 타올라 재만 남아 있었다.

“말도 안 돼.”

“분명히 여기였잖아요?”

크리스티안과 호즈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 건물에는 그을린 자국 하나 없지만, 마법사가 머물던 집에 남은 건 숯과 재뿐이었다.

오넬리가 덜덜 떨며 자기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는 제 손수건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혹시 이, 이걸 따라서 아이니가 온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분명히 제대로 끊었는데…….”

호즈는 오넬리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언니.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옛것의 기운은 거의 느껴지지 않아요. 마법은 마법인데…… 이게, 저도 참 생소한 기운이라서…….”

오넬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디에는 그녀를 뒤로 하고 상인에게 다가갔다.

그가 뭔가를 찾았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디에 군. 이게 무엇인지 아나?”

디에는 재를 걷어내며 그 쇳덩이의 원래 모습을 추측했다.

“솥 아닙니까?”

재 사이에 반쯤 녹아 뭉그러진 세 발 달린 큰 솥이 있었다.

상인이 그 솥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맞네. 이건 솥이지. 그런데 보통 솥은 아니야.”

“예?”

“이건 마법약을 만드는 솥이네. 온갖 시약과 독극물을 버텨야 하는 만큼 아주 단단한 마법 합금으로 만들지. 내가 알기로 5써클 이하의 마법으로는 이 솥을 녹일 수 없어.”

디에는 그 솥이 촛농처럼 뭉개진 걸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옆에서 오넬리가 상인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크리스티안과 호즈까지 모두 다가와 상인의 말을 경청했다.

“즉, 5써클 이상의 위력을 가진 불길이 일어났다는 건데, 그런 마법사가 수도에 흔하지는 않지. 옛것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걸 보니 그 침식자 놈도 범인은 아닐 거야. 그럼 대체 누가 이곳을 1시간 만에 불태울 수 있겠나? 주변 건물에는 그을음도 안 생길 정도로 정밀하게, 동시에 이 솥이 녹을 정도로 강력하게.”

디에는 자연스럽게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발렌시아누스.”

용의 심장을 씹어 먹고도 살아 남아 지고의 육체와 힘을 얻게 되었다는 그 무시무시한 망나니라면, 그런 불길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호즈가 약간의 죄책감까지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침식자가 있다는 게 드러나면 대영주들이 충성맹세를 하지 않고 돌아갈까 두려워,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사건을 은폐하고 있다고요.”

크리스티안은 의분을 품고 이를 악물었다.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디에는 그 용사같이 구는 사내에게 물었다.

의분은 언제나 환영이었지만, 빈민가 출신인 소년은 의분과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을 구분하기를 원했다.

“그 소문이 진짜라면…… 우리가 뭘 할 수 있죠?”

크리스티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를 도와줄 분이 있다. 아주 똑똑하고 용감하시지. 그분은 궁정 귀족들이나 의원들과도 연이 있어. 그럼 신문사를 움직일 수 있고, 거기까지 가면 아무리 발렌시아누스 대공이라도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는 건 막을 수 없을 거다.”

디에는 내심 흡족하니 웃었다.

호즈와 오넬리도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아카데미의 실권자가 나서준다면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다.

호즈가 배움의 거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대단한 분이네요. 그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크리스티안이 답했다.

“진. 명망 높은 우리의 학생회장님이시다. 얼마 전에는 궁정 귀족들께 투자를 받아 대규모 원룸 건물들을 신설하셨지. 그분이라면 충분히 이 거리에 사실을 알릴 수 있어.”

디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상인 아저씨가 어디로 가셨지?”

* * *

디에와 호즈는 밖에서 기다리고, 진과 오넬리가 학생회장실로 들어갔다.

“어서 와. 크리스티안. 방학은 잘 보내고 있어?”

파도 같은 회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교복 어깨가 꽉 낄 정도로 단단한 몸에 훤칠한 키.

수려한 학생회장 진이 서늘한 차를 내밀며 둘을 맞이했다.

오넬리는 소문의 회장을 직접 봤다는 사실에 감격해 얼굴을 붉혔고, 크리스티안은 정중히 예를 표하며 답했다.

“회장님이 생도들 한 명 한 명을 신경 써주신 덕에 잘 보내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크리스티안. 어쩐 일로 방학에 나를 찾아왔지? 혹시 학생회 가입? 언제든지 환영인데.”

“실은…… 학생회에서 나서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크리스티안이 목소리를 착 깔았다.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진이 푸른 눈을 빛냈다.

“자세히 말해 봐.”

“얼마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폭발 사건은 미친 마법사가 아니라 침식자의 짓이고, 충성맹세를 하러 온 대귀족들이 그 핑계로 돌아갈까 무서워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이 사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육하원칙에 따라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회장님. 대낮에 집을 불태우고, 사람 둘이 사라졌습니다. 정황상 이미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제 친구는 아직도 누워서 앓고 있습니다. 사제님 덕에 죽음은 면했지만, 언제 다른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몰려와 린치를 놓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마지막에는 감정과 추측이 들어갔지만, 되려 그의 의분을 더욱 강조해주었다.

“정말이라면…… 아주 심각한 일이네.”

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크리스티안은 신중하고도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회장님만이 저희와 이 수도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으십니다. 부디 배움의 거리를 움직여 개망나니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음모를 밝혀주시고, 위험천만한 침식자를 제거하는 일에 힘을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

진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크리스티안이 당황할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그때 오넬로는 진의 눈빛이 일순 노랗게 흔들리는 걸 보았다.

“회장님?”

“아. 내 정신 좀 봐.”

그가 싱긋 웃더니, 품속에서 아무런 라벨도 없는 약 한 병을 꺼내 마셨다.

“방학 전에 패싸움을 말리다 꽤 강한 저주에 한 방 맞았거든. 사제님께 정화 받기에는 너무 비싸서 그냥 약으로 때우고 있어.”

크리스티안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회장님의 건강은 배움의 거리 전체에 직결되는 일입니다. 하루빨리 정화를…….”

진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한 후원자분이 사 주셔서, 내 돈은 들어가지도 않았어.”

“아.”

그가 손가락 하나를 펴며 유쾌하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해 준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었어. 사람들이 모르는 게 나은 일도 많다고. 그런 거 있잖아. 우리가 노는 동안 지금도 어디에서는 마경이 열려서 영지 하나가 쑥밭이 되었고, 북부에서는 우리 또래면 다들 백전연마의 용사가 되고…… 이걸 계속 옆에서 들려준다고 생각해 봐. 그럼 아카데미 생활을 못 즐기겠지.”

“회장님?”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이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고, 배움의 거리 학생연합회의 대표인데.”

크리스티안은 문득 손끝이 굳어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설마……!”

오넬리가 힘없이 책상 앞으로 고꾸라졌다.

진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가 머리를 찧지 않게 부축했다.

평소처럼 신사답고 유쾌한 진의 모습이었다.

진은 반쯤 일어서서 크리스티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크리스티안. 침식자를 잡아 죽이는 일과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오히려 서로 방해만 될 뿐이지.”

푸른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났다.

크리스티안은 지독한 수마를 느끼며 말했다.

“그 후원자가…….”

“미안하다. 크리스티안. 한동안 자고 있어. 너를 죽일 수는 없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