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안 나와요.”
“그래요.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거 같아요.”
디에와 호즈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멋들어진 제복을 입은 훤칠한 생도들이 다가와 둘에게 말을 걸었다.
“어린 친구. 형들 면담이 길어지는 것 같은데, 차 한 모금 하면서 이야기나 조금 해볼까?”
“자매님께서는 어디 아카데미의 신학과에 다니고 있으신가요? 아, 실례. 제가 잘못 봤군요. 신학과가 아니라 신학교 소속이신데.”
디에는 웃음 뒤에 숨은 살기를 파악하는 건 어디서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저놈들이 자신을 앵벌이꾼으로 쓰려하는지, 잡아다 제물로 바칠지 정도는 발소리만 듣고도 알아야 빈민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디에는 호즈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
“죄송해요. 형, 누나들. 저 같은 빈민가 애랑 아카데미는 도저히 안 맞는 거 같아요.”
그녀와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꺄아악!”
호즈는 육체적으로 일반인이었지만, 디에는 전사였고, 등에서 바늘 같은 털이 돋을 정도로 힘을 끌어올린 끝에 호즈를 무사히 껴안고 착지했다.
디에는 곧바로 담 쪽을 향해 달리려 했지만, 그의 눈앞에 장검이 유성처럼 떨어졌다.
츠카아악!
연갈색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바람에 날렸다.
“윽!”
몸을 빼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가 잘릴 뻔했다.
“언제 한 번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디에는 상대의 옷깃에 붙은 배지를 확인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검과 두루마리가 교차하는 문장.
“학생회…….”
진이 만든 그 조직의 구성원들은 악명 높은 배움의 거리 생도 중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자들만 모여 있었다.
주로 재능은 있지만 돈이 부족한 평민 출신 생도들을 지원해주며 사실상 사병으로 운용한다고 들었다.
패싸움을 말리고 생도 깡패들을 토벌하는 등 공이 커서 치안감들과도 연계를 맺는 준 공인 조직이라고…….
“순순히 항복하면, 치명상은 입히지 않겠어. 우리도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고.”
학생회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몬신이시여.’
디에가 내심 기도를 올리기 시작할 무렵, 호즈가 나섰다.
“광명신이시여. 당신의 딸을 가로막는 자에게 불길을 내려주소서!”
화악!
일순 강렬한 백색광이 번뜩이고, 학생회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디에! 빨리!”
“네, 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마법이 날아들었다.
“잡아라!”
“회장님 명령이다. 절대로 놓치지 마!”
바위에서 덩굴이 자라나 둘의 팔다리를 묶으려 하고, 사슬에서 번갯불이 튀고, 불길이 바람을 타고 남실남실 날아왔다.
‘전사에게 사술에 대항할 힘을!’
디에는 몸으로 호즈를 향해 날아드는 공격을 받아냈다.
퍽! 파지지직!
“크윽!”
아몬신은 마법사를 요술쟁이라 부르며 경멸했고, 그의 신도들에게 마법 저항력을 내려주었다.
디에는 16살에 현역 전투조가 될 정도의 독실한 아몬 신도였고, 끝끝내 모든 공격을 버텨 낼 수 있었다.
* * *
디에는 담을 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비틀거렸다.
호즈는 기겁하며 디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괘, 괜찮아요?”
“괜찮아요. 빨리 도망쳐요.”
“내가 치료해줄게요. 치유 기도 과목은 지난 학기에 A+ 받았어요.”
“안 돼요. 누나 기도를 받으면 저 불탈지도 몰라요.”
“네?”
“모르시겠어요? 저 이교도예요.”
호즈의 상냥한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디에는 예상했던 씁쓸함을 견뎌내며 말했다.
“누나. 우리끼리 침식자를 잡기는 글렀어요.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에요.”
“……그래요.”
“일단 어디든 좋으니까 성당으로 가세요. 당장 배움의 거리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성당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 드릴게요. 긴…… 하루였어요. 진짜 성공하고 싶었는데. 하하.”
호즈가 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디에를 부축하며 대성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디에는 그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호즈는 디에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네?”
“나도 성공하고 싶었어요. 광명신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분께서 저를 구원해주셨듯, 저도 그분께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멋지게 침식자를 잡아서 제 신실함을 증명할 생각이었어요. 아카데미 학생회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삶을 바꿔준 사람에게 무한한 부채 의식을 갖는 건 당연한 걸까요?’
디에는 목까지 올라온 그 질문을 애써 눌러 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성 모독이었다.
다행히도, 학생회원들은 배움의 거리에서 둘이 멀어지자 일단 추적을 멈췄다.
둘은 끝끝내 대성당 옆 으슥한 쪽문에 다다랐고, 호즈는 디에의 입술 앞에 검지를 들어 보였다.
“여기서 기다려요.”
“네?”
“광명께서는…… 이교도를 싫어하시지만, 은혜는 반드시 갚으라고 가르치세요. 디에가 나를 대신해서 마법을 맞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잡혀갔을 거예요. 조금만 있어요. 성기사님들이나 사제님을 만나 허락을 받고 올게요.”
디에는 거절하려 했다.
그는 홀로 옛 빈민가까지 돌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혹시 꼬리를 밟혀 코넬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년의 다리를 붙들었다.
“고마워요. 호즈.”
디에는 20분을 조금 넘게 기다렸다.
담 너머 넓은 잔디밭 저 멀리에 한 붉은 벽돌 건물에서 호즈가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낭패감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 뒤를 따라 성기사 하나가 따라 나왔다.
디에는 호즈의 입술을 읽었다.
‘도망쳐요. 한패예요……?’
“말도 안 돼.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여기까지…….”
믿을 수 없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성자를 두 번이나 납치했고, 교회 내부의 파벌싸움에 개입해서 존경받는 홍의주교 바오로안을 사실상 죽음으로 내몬 대악당이었다.
‘파문당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용서 못 해. 코넬 님을 태워 죽이려 했던 놈이야. ……언젠가 반드시 한 방 먹여줄 생각이었는데.’
소년은 두 가지 이유로 움직였다.
공방을 공격한 게 침식자라는 사실을 밝혀서, 대 침식자 보험금을 타내 납품 일정 관련 위약금을 치르는 게 첫 번째.
코넬을 태워 죽이고 빈민가의 부흥을 막으려 했던 ‘못된 망나니 발렌시아누스’에게 쓴맛을 보여 주는 게 두 번째였다.
디에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렸다.
아몬신의 축복이 몸을 감싸고, 소년은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해 저물어가는 거리를 돌파했다.
* * *
“며칠간 나가 있겠다고 했는데.”
디에는 쓰게 웃으며 아침에 지나쳤던 가로등 기둥을 만지작거렸다.
저 멀리서 야경꾼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옛 빈민가 쪽은, 정확히는 옛 빈민가 중심 구역은 야경꾼들이 돌지 않았다.
이 가로등들 덕분이었다.
이건 무려 황제 폐하가 직접 개발했다는 마법 가로등이었다.
낮에 받은 태양 빛을 모아서 밤에 내뿜는 원리라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밝아서 좋았다.
‘폐하는 왜 발렌시아누스 같은 오빠가 날뛰게 내버려 두시는 거지?’
디에 역시 제이릴리스에 대한 악명은 들어보았다.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나 아버지를 죽이고 황위에 앉은 자.
천륜을 거스른 친족살해자.
그러나 그건 모두 그와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가 아는 제이릴리스는 빈민가 재개발을 허락하고, 마법 가로등을 보내주고, 코넬 의원님에게 배지를 달아주고, 코넬 의원님의 법을 통과시켜준 황제 폐하였다.
물론 두려움이 더 컸지만, 그건 존경심과도 연결된 두려움이었다.
반면 발렌시아누스는 달랐다.
그는 진정 사악하고, 디에의 일상과 맞닿은 대악마였다.
어디서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디에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하얀 갑옷을 입은 백금기사를 대동하고 있었고, 수많은 빈민을 베어 죽이고 불태워 죽이며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던 사람이었다.
거기에 빈민가와 거의 맞닿은 홍등가 쪽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더더욱 무시무시했다.
‘예쁘장한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를 잡아가 불로 고문하면서…….’
쉽게 믿을 만한 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는 발렌시아누스가 사람을 태워 죽이며 웃는 모습을 본 소년이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디에는 힘 없는 걸음걸이로 중앙광장 앞 6층 석조 건물에 들어섰다.
2층에 올라서 외박 신청서에 복귀 시간을 적고, 선배 전투조원들에게 보고했다.
“디에. 복귀했습니다.”
“오. 그래. 빨리 왔구나. 안 그래도 잘됐다. 코넬 님이 너 오는 대로 6층으로 올라오시란다.”
“네?”
“빨리 올라가 봐.”
디에는 당황하면서도 내심 기쁜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6층에 올라서 코넬과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마치 코넬의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코넬 님?”
* * *
6층에는 은은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디에도 밤에 올라온 건 처음이었지만, 낮보다도 촛불을 적게 켜 놓은 거 같았다.
코넬이 넓은 거실 한쪽의 호화로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갈색 단발머리와 지팡이가 보였다.
디에는 그녀가 어지간해서는 그쪽 소파에 앉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저기는 같은 의원님들이 오실 때나 사용하시던데…….’
“왔어? 옆에 앉아.”
“네, 네.”
그녀의 목소리에서 책망하는 거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디에는 코넬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코넬…… 님?”
“그대로 앉아 있어.”
맞은편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와 소파에 앉았다.
디에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래. 네가 디에구나.”
유쾌하니 넘긴 백금발, 위태롭게 흔들리는 노란 눈동자와 핼쑥한 뺨, 멋들어진 콧대와 붉은 입술…… 언듯 보면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미남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무결한 건 아니었다.
피부는 반질거렸지만, 입술은 갈라져 피가 묻어나고 있었고, 강력하고 거대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무척 지쳐 보였다.
수도 제일의 망나니,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디에의 앞에 앉아 있었다.
디에는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고 입만 뻐끔거렸고, 발렌시아누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민 꼬맹이 앞에서 이런 소리 하는 게 즐겁지는 않지만, 그래도 코넬 네 얼굴을 봐서 일단 말은 하겠다.”
코넬이 의족도 짚지 않고 일어나 연신 고개를 숙였고, 발렌시아누스가 하얀 미간을 찌푸리며 앉으라 손짓했다.
“열흘 전에 그 미친 애새끼가 불을 싸지르고 다니기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다. 아무리 은폐와 엄폐에 특화되었다고는 해도, 투명화, 영체화, 점멸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침식자가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세레라지에 누나랑 마도 공방주들이 밤을 꼬박 새워서 침식자 추적 마도구를 만들어서 치안감들에게 뿌렸지.”
발렌시아누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득한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그놈이 우리가 자신이 침식자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하도록 신문사랑 의회랑 길거리에 정보도 통제했다.”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그가 몸을 떨었다.
“투명화 발동 시간이랑 횟수를 알아내고, 일일 사용 가능 횟수를 다 뺀 다음에 확실히 잡으려고 근위병, 치안감, 홍등가 깡패, 아카데미 학생회까지 다 풀어 일대에 포위망을 만드는 중이었다. 순차적으로 덮치면서 놈의 힘이 빠지고, 최후까지 몰려 정신 파동을 쓰기 전에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었어.”
“!”
발렌시아누스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디에를 노려 보았다.
“이제 다시 잡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 신학생 애가 침식자라고 고래고래 외친 탓에, 그놈도 이제 우리가 자기를 확실히 침식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겠지. 무슨 말인지 이해되느냐?”
디에는 이를 덜덜 떨었다.
발렌시아누스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씹다 뱉듯 말했다.
“네놈들이 모든 걸 다 망쳐 놓은 거야.”
크지도, 서늘하지도 않았지만,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듯한 목소리였다.
“놈은 지금까지는 비장의 한 수로 남겨두던 정신 파동을 거리낌 없이 쓰겠지. 그럼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이 수도 솔레타라온에 수백 단위의 침식자가 기어 나올 수도 있다고. 그럼 폐하가 직접 나서시거나, 청은 기사단이 제국의 수도를 폭격해야겠지.”
디에는 몸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머릿속이 하얗게 칠해진 기분이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왜 코넬이 여기 함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부하의 책임을 지는 게 상관이었다.
디에는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더듬더듬 내뱉었다.
“코, 코넬 님은…… 아무런…… 제가…….”
죽으면 죽고 말지, 코넬까지 피해를 보게 할 수는 없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디에의 말을 끊었다.
“입 다물어라. 네놈의 목에 그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놈과 네놈의 동료들을 베어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이미 다 목을 쳤다.”
코넬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였고, 발렌시아누스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코넬. 앉아라. 다리 없다고 그렇게 과시하지 않아도, 고아 소녀를 윽박지르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더러우니까. 한동안 애들 좀 단속해. 가만히 놔둘 수가 없으면 하루종일 훈련이나 청소라도 시켜라. 바르바토스 단장이랑 치안총감이 이 다섯과 그 친인척까지 죄다 잡아다 와이번핏으로 보내겠다는 걸 말리고 온 참이니까.”
‘말려? 발렌시아누스가? 그리고 왠지 두 분 조금 친해 보이시는데…….’
디에의 가슴 속에서 무수한 의문이 피어났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걸 풀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넬이 일어서 그의 등에 대고 고개 숙였고, 발렌시아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를 붉은 망토의 기사와 함께 떠나갔다.
디에는 코넬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공명심이 이 거리에 얼마나 큰 피해를 줄 뻔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디에.”
“죄송합니다.”
코넬은 잠시 침묵한 끝에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렴. 가서 아몬신께 기도하자. 모든 혼란에 맞설 힘을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