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89)화 (189/340)

(189)

언제 정신 파동을 터뜨릴지 모르는 괴물이 대귀족들이 올라온 수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발렌시아누스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문제를 해결하는 건 뜨거운 머리가 아니라 차가운 심장이었다.

제이릴리스는 상경 대귀족들을 한 명 한 명 불러들여 충성맹세 전의 사전 협상을 이어갔다.

본인이 직접 나설 때도 있었고, 궁무대신이나 외무대신을 보낼 때도 있었다.

“짐은 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여기까지 와서 이깟 일로 주춤한다면 천하가 짐을 비웃을 것이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자꾸나.”

발렌시아누스는 그 말이 옳다는 걸 알았다.

그는 회귀 전 포함 59년의 인생에서 쌓아 올린 경험을 모두 발휘했고, 녹색 불꽃을 다루는 침식자를 잡아들일 준비를 했다.

제일 먼저 한 건 사과였다.

“부하들 앞에서 모욕을 주어 미안하군. 내 폭급한 언행에 대해 사과하겠네.”

“예. 전하.”

치안총감은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사과에 놀라워했다.

상대는 성자 납치범이자 홍등가 적가면의 배후로 추정되는 망나니 발렌시아누스였다.

어쩌면 그가 침식자 출몰 정보를 은폐하라는 명령을 거둘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소문을 통제하도록. 절대 신문사나 의원들 따위에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 안 돼.”

그러나 그 사과는 명령을 더더욱 강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며칠간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 바르바토스, 치안총감, 근위대장, 경비대장, 하드리탄, 세레라지에 등을 한데 모아 작전을 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시너지를 맞추는 데에 주력했다.

“마도구는 내일까지 올 수 있을 거 같잖니.”

“오늘 사복 치안감들이 놈의 뒤를 밟았습니다. 투명화와 영체화를 함께 사용할 수 있어 은폐에 능한 녀석입니다.”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세레라지에가 만들어온 마도구로 치안감들이 무장하고, 치안감들의 신호에 따라 흑철기사단이 움직였으며, 이에 들어가는 예산을 하드리탄이 행정관들과 함께 처리했다.

“동생아. 침식자 감지 마도구를 5개 더 만들었단다. 그리고 이건 영체를 공격할 수 있는 전격 부여 스크롤이야. 내가 만든 건 아니고, 시장에 풀린 것 중에 괜찮은 것을 긁어 왔단다.”

“포위망 형성 끝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력이 이쪽에 투입됨에 따라 각지의 뒷골목에서 불온한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발렌시아누스가 개인적으로 동원한 배움의 거리 학생회, 옛 빈민가의 자경단, 홍등가 깡패들이 뒷골목을 관리했다.

“진. 돈 좀 뿌려라.”

“코넬. 늑대들을 풀도록.”

“적가면. 세력을 확장하고 싶은 생각 없나?”

그들의 일은 침식자를 쫓는 게 아니라, 침식자를 쫓는 자들을 쫓는 것이었다.

치안총감과 바르바토스는 깡패가 시민을 지킨다는 말도 안 되는 일에 탄식했지만.

“침식자가 황궁 안에 들어올 때까지 안 걸리는 건 말이 되는가?”

마법과 기적이 흔한 이 세상에서 말도 안 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 * *

8월.

“망나니 동생아. 이리 와 보렴. 이 마법사가 미친 짓을 저질렀잖니?”

세레라지에는 마법 거리 뒷골목 노마법사를 흘겨보고, 그가 가진 책들과 소환진 따위를 가리켰다.

“뭘 했는데?”

“이번 침식자에게 힘을 준 건 아마도 옛것 아이니 같잖니.”

“그렇지. 녹색 횃불을 든 자.”

“그러니까 아이니의 기운을 추적하면 아이니에게 힘을 받은 침식자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무식하고 용감한 자들이 있는 모양이잖니.”

“세상!”

발렌시아누스는 함께 온 학생회원들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옛것은 영육이 구별되지 않는 존재며, 옛것의 힘을 받는다는 건 옛것의 육체 일부를 이식받는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한 옛것을 ‘아주 조금’ 소환한 뒤, 혈마법과 빛 마법을 응용해 핏방울의 주인을 추적하는 마법을 펼친다면, 이론상으로는 침식자를 찾을 수 있었다.

“‘이론상으로는’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니.”

세레라지에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주 조금’ 소환하는 게 네 마음대로 될 거 같았나?”

그녀의 눈에는 집 안에 옛것의 기운이 가득 들어찬 게 보였다.

노마법사 역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 녹색 빛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불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동생아. 이대로라면 여기에 마경이 열릴지도 모르겠구나.”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노마법사를 베어 죽인 뒤, 용언의 불길을 일으켜 그의 집과 실험실과 시체를 완전히 불태웠다.

이후 그는 진과 학생회원들이 무식하고 용감한 자들을 하나둘 처리해 아카데미 안의 징벌방에 가두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신학생 소녀를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시 앙겔루스의 손을 빌렸다.

이후 코넬에게 자경단의 임무를 한 번 더 강조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이번 일에 특별히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는 적의 없는 살의가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미 비슷한 일이 열 번도 더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동기사단의 헬레나를 찾아갔다.

“특히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괴소문이 퍼지는 일이 잦아.”

“괴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아닌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죄다 입대시킬 생각이야. 아마도 최근에 임관한 기사 겸 장교가 그들을 받아서 훈련 시키고, 자기 부대를 꾸리지 않을까 싶은데, 헬레나 누나 생각은 어때?”

직할대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헬레나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황금을 앞에 둔 용처럼 반응했다.

“괴소문 따위를 퍼뜨려 수도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들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 실전을 겪게 해줘야지! 아주 좋은 생각이로구나.”

“그래. 그럼 곧 학생연합회에서 애들을 보내올 테야. 죽이지만 말고, 사정없이 굴려서 정예로 만들어 줘. 우리도 준기사급 중장보병이나 중장기병들이 있으면 좋으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유유히 웃었고, 제이릴리스를 알현하러 가는 길에 텐티아는 물었다.

“의외로 그리 다른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십니다.”

“놀랐나?”

텐티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발렌시아누스는 갈라진 입술로 말했다.

“사실…… 완전히 새로운 전략이나 공격 같은 건 쉽게 나오지 않는다네. 물론 새로운 적을 만났으니 새로운 대응법이 필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새로운 대응법을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대응법을 변형할 수밖에 없어.”

“검술의 발전에 빗대어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적은 혼자고, 나는 지금 수백 명의 치안감과 수천의 깡패들을 부리지. 그러니 정정당당하게 인원수로 몰아붙이는 거네. 아니. 이리 말한다면 정정당당에 대한 모욕이겠군. 굳이 속임수를 써 가며 놈을 끌어낼 필요까지는 없을 뿐이야. 대군에게는 병법이 필요 없지.”

발렌시아누스는 서류를 마지막으로 훑어보고, 흘리듯 말했다.

“아마 놈들은 성물 연구를 통해 옛것의 힘을 은폐할 수 있게 된 거 같군. 놈을 만나면 보통 인간이나 심지어 성직자 같은 기운이 느껴질지도 모르네.”

텐티아는 경악했고.

“예? 아니. 전하.”

발렌시아누스는 태연히 제이릴리스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 * *

발렌시아누스는 제이릴리스를 자주 독대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본래 손위 남매의 황제 독대는, 황제가 손위 남매를 죽이려 하거나, 손위 남매가 황제를 죽이려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잘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가 서쪽에서 떠도 발렌시아누스가 제이릴리스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며, 이미 이복 남매들을 대숙청한 제이릴리스가 한 명 정도 더 죽인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것임으로, 사용인들도 기사들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드리탄은 조금 달랐다.

그는 혈통과 맡은 직무상 발렌시아누스의 다음 차례쯤에 제이릴리스를 볼 때가 많았다.

기다리고 있는 다른 관료들을 죄다 새치기하고 먼저 보고를 올린다는 뜻이었다.

재무대신을 비롯한 재무부의 고위직들이 굳이 그를 통해 보고를 올리는 게 아니었다.

“으흠.”

여하간, 그가 보기에 발렌시아누스의 잦은 독대는 여러모로 기이했다.

그는 만약 기다리는 관료들이 많아 시간이 밀릴 것 같으면, 저녁까지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독대를 고집했다.

그가 아주 대단하거나, 비밀스럽거나, 잔혹하거나, 더러운 내용을 보고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하드리탄의 뒤에 서 있는 청은기사단 부단장이 든 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모 영지에 마경이 발생했고, 3만이 죽었으며, 청은기사단과 주변 영주들의 도움으로 마경이 닫혔다.

-주변 영주들이 ‘보답’을 내놓으라며 영지전을 일으켰으며, 그걸 부추긴 건 제국 외무대신이다.

-모 영지의 특산물이었던 광산을 빼돌렸고, 그 광산은 상아탑과 계약이 되어 있었으며, 계약 연장 협상을 통해 상아탑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드리탄은 발렌시아누스의 사생활까지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사실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단지 서류로 올릴 수 있는 내용도 반드시 대면 독대 보고하는 게 마치, 내용이 아니라 대면 독대라는 형식 자체에 집착하는 거 같았다.

‘우스갯소리로 한 번 나왔지만, 동생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오빠는 아니다. 그런 사람은 저런 표정을 못 지어.’

하드리탄은 물소뿔 안경을 조심스럽게 고쳐 쓰며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그를 오만하고 가학적이며 경박하다고 평했지만, 제이릴리스 앞에 서기를 기다리는 발렌시아누스는 사뭇 달랐다.

저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피 흐르는 입술에 자연스럽게 걸린 유쾌한 미소, 진중하니 당긴 턱은 분명 귀부인 앞 기사의 그것이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네게 솔직하고 충성스럽다는 걸 계속 말하는 거 같다.’

하드리탄은 발렌시아누스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섰다.

발렌시아누스는 언제나처럼 제이릴리스 앞에 마주 보고 앉아서 보고를 시작했다.

그는 본래 고문이나, 지금은 미친 마법사로 알려진 침식자를 추적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이후 추가적인 움직임이 없는 게 걱정되옵니다. 놈의 목적은 분명 충성맹세의 방해일 터. 그러나 지금 폐하께서는 여러 백작과 후작을 만나시며 착실하게 황도를 밟으시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잘 짜인 안정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더더욱 강한 폭발이 필요하옵니다.”

“그걸 경계하고 있는가?”

“놈을 누가 보냈는지 알아내지 못했사옵니다. 어쩌면 대귀족들과는 어떠한 연도 없을지 모릅니다.”

“앞으로 생길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하드리탄은 다소 생소한 저 보고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제이릴리스는 대부분의 보고에 간결히 답했다.

세 시간짜리 대규모 운하 사업 발표를 들은 뒤, ‘좋구나. 그리하라.’ 이 한 마디만 남기고 손짓해 내보낸 적도 있었다.

그건 행정 관료들과 궁정 귀족들을 믿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들은 제이릴리스 즉위 이후 암묵적으로 관례보다 적은 리베이트와 뇌물만 받고 있었으며, 관료들에 대한 황제의 공치사는 대부분 보너스와 시녀들의 대필 편지로 행해졌다.

여하간, 황제는 대부분의 보고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저렇게 황금색 눈을 친히 마주치고, 때로는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품위 있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중간에 말을 가로채거나 돌려주기도 하고,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여 소신은 불안하옵니다. 놈이 대영주들과 손을 잡고, 대영주들은 놈의 존재를 통해 폐하를 정치적으로 압박할 거 같사옵니다. 자비로우신 폐하의…….”

“아니. 발렌. 되었다. 짐은 아부를 좋아하나, 아무리 그래도 자비만큼은 부끄러워서 못 들어주겠구나.”

“그럼 아름다우신 폐하의…….”

“그래. 좋구나!”

하드리탄은 황제가 뽀얀 이를 드러내며 낭랑히 웃는 걸 보고 숨이 멎을 뻔했다.

느껴지는 형형한 기세가 아니라면 대역이라고 생각해 기사들을 불렀을 거다.

황제가 관절반지를 낀 손으로 발렌시아누스의 손등을 지긋이 움켜쥐었다.

“그대여.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열흘도 넘게 잠을 못 잤다고 들었다. 그대의 몸이 상할까 심히 염려되는구나. 짐도 짐대로 대영주들을 다독이고 또 단속하는 중이다. 게다가 다들 일단 올라오기는 올라오지 않았는가? 정 돌아가려 하면, 그때는 짐이 검을 뽑으면 그만이다.”

하드리탄은 어전임을 잊을 정도로 경악했다.

‘황제에게 감정적인 위로를 받는다고?’

그 자리에서 소리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그는 당황하고 또 황당해하며 그 비인간적인 쌍둥이 남매를 바라보았다.

서로만 보인다는 듯 웃는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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