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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데보티오 인스트루멘툼은 14살부터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귀족이라고 불렸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승냥이 같은 봉신들과 탐욕스러운 가신들, 늑대 같은 대영주들에게 둘러싸였고, 모두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암살당하리라 생각했다.
그가 방구석에서 은식기를 녹여 그린 주술 회로와 커튼 봉 파이프로 오래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무기, 마총을 재현하기 전까지는 모두 그랬다.
“각하. 준비되었습니다.”
“그래요. 갑시다. 한동안은 비공정에 머물 생각이에요.”
마커스는 유쾌하니 웃으며 호텔방을 나섰다.
깔끔하게 정리해 묶은 검은 머리, 부드러운 암갈색 눈동자, 단정한 인상에 지적인 분위기를 더해 주는 외안 안경, 훤칠한 몸에 딱 맞는 세로줄 정장.
허리에 에스토크 한 자루를 차고 있지 않았다면, 모두 그가 지방의 대귀족이 아니라 한낱 부르주아라고 생각했으리라.
치이익, 치이익, 치이익.
망토 사이에서 증기 소리를 내며 거구의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의 갑옷은 언뜻 보기에도 황실 기사들의 갑옷보다 훨씬 두껍고 복잡한 기계적 구조였다.
마커스는 그의 찬란한 재능을 개개인의 재능 또는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격차를 줄여 주는 기술 발전에 사용했다.
마도공학의 정수인 마갑은 소드 유저가 소드 엑스퍼트에 맞설 수 있게 했고, 상아탑의 사점 안경을 역산해 만든 저격 술식은, 갓 징집한 농민도 수십 년간 단련한 쇠뇌 사수에 맞먹는 사격 실력을 선물해주었다.
척, 척, 척, 척, 척.
지금 그의 곁에는 거구의 기계 기사뿐만이 아니라, 날렵한 갈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도 함께였다.
그들이 입은 갑옷 안쪽에는 기계장치로 근육 구조를 흉내 내 만들어낸 근력 강화 부품이 있는데, 거의 일상용 소도구 수준의 주술 회로만 새기고도 착용자의 힘을 두 배로 늘려주었다.
“각하. 어, 어디로 가십니까? 혹시 저희 호텔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말씀을…….”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주 편했어요. 다만 제 몸은 증기도 마법회로도 전기도 없는 곳에 있기를 거부하는군요.”
마커스는 말이 아니라 마나와 증기의 힘으로 굴러가는 마차를 타고 성문 밖으로 나섰다.
그의 비공정 앞에는 이미 그의 병사들과 마법사들, 조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마차를 비공정 안으로 들이고, 조종실로 올라가 앉았다.
부관들과 시종들, 조수들이 몰려와 보고를 올렸다.
* * *
“…상아탑은 침묵 중…….”
“……세베릭이 만찬을 가지지 않고 호텔에서 대기…….”
“……!”
‘언제까지나 개개인의 재능에 의존할 수는 없어. 인간은 타고난 마나감응력이 낮고, 이종족의 피는 시간이 지나면 묽어지기 마련이다. 유일하게 지식만으로 강해질 생각을 하는 건 상아탑뿐이지만, 놈들은 오만해서 그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하지.’
그는 대부분의 보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 정도도 알아서 해내지 못할 놈은 모두 죽였고, 알아서 잘하는 일에는 굳이 그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보고만큼은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완성형 마총이 상아탑 밖에 나와 있다고요?”
“예. 각하. 발렌시아누스의 시녀 루디가 사용하는 물건입니다.”
마커스의 입술이 비틀리며 위로 말려 올라갔다.
“시녀? 그 보물을 시녀 따위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보통 시녀는 아닙니다. 소드 유저의 경지에 오른 일류급 암살자이자 마총 사수이며, 발렌시아누스를 오랫동안 섬겼고, 그의 궁을 관리하는 관리인이기도 합니다.”
“흐음.”
마커스는 밝게 웃었다.
‘인질로서의 가치와 전달자로서의 가치가 둘 다 있군요.’
“회유는 힘들겠고…… 납치하거나 마총만 빼돌리는 건 가능할까요?”
부관이 고개를 저었다.
“발렌시아누스의 곁을 거의 떠나지 않습니다. 무력만 생각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만, 은밀히 납치하는 건 무리입니다.”
“마총만 빼돌리는 건?”
“역시 무리입니다. 리볼버 형식의 마총 ‘아가테’와 상하쌍대 산탄총 형식의 마총 ‘카스파’를 가지고 있는데, 둘 다 상시 패용하고 있습니다.”
마커스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오른쪽 의안에 식염수와 회복 포션 몇 방울을 타 만든 인공 눈물을 흘려 넣고, 재차 물었다.
“카리오사와 싸울 때 ‘아가테’를 한 자루만 쓰는 거 같던데……? 다른 한 자루의 행방은 아나요?”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세레라지에 대공이 개인 연구실에서 연구 중입니다.”
곧바로 돌아온 답치고, 마커스의 마음에 드는 답은 아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거대한 나무를 떠올렸다.
“황립 마도 공방…… 그쪽은 도저히 못 들어가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사람만 붙여 놔요. 필요할 때 납치해서 마총과 인질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예. 각하.”
“아. 그리고 저 친구는 잠깐 남으라고 해요.”
시종 하나가 움찔했고, 마커스의 의안은 그 찰나의 경련을 놓치지 않았다.
조수와 부관들이 그 시종을 둘러쌌고, 시종이 벌벌 떨며 앞으로 나섰다.
* * *
“왜…… 이러십니까? 각하?”
“그건 자기가 더 잘 알지 않나?”
마커스는 제 의안에 떠오르는 경고 문구를 하나하나 읽었다.
[적개심]
[당황감]
[낭패감]
그의 의안에는 다양한 마법이 걸려 있었고, 상대의 얼굴 근육 움직임과 호르몬 분비 등을 측정해서 감정과 생각을 읽는 마법도 그중 하나였다.
‘안 돼? 들킨 건가? 잘못하면 죽는다? 실험실에서 해부될 거야? ……그걸 아는 놈이?’
“황실에서 얼마나 준다고 했나요?”
마커스는 조소하며 에스토크를 뽑았다.
시종은 도망치려 했지만,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배를 파고드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마커스는 검술로 유명한 대영주는 아니었지만, 제 몸 하나 지키기에는 충분한 실력자였다.
“아악!”
“정보를 빼 오라는 건 아니었겠지요. 아마도 요즘 일어나는 그 폭발 사건을 내가 정치적으로 이용할지 안 할지 궁금해한 거 같은데…… 맞나요?”
“가, 각하! 제발.”
시종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고, 마커스는 실실 웃으며 에스터크를 돌렸다.
“알아요? 여기서 조금만 더 찌르며 내장이 뚫려서 몸 안쪽이 찌꺼기로 엉망진창 된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계산이 돌아갔다.
‘나름 몸이 달았나 보네요. 하기야 모양 좋게 충성맹세를 끝내고 싶을 테니까. 대귀족 중에 그게 침식자가 저지르는 짓이라는 걸 모르는 멍청이는 없어요. 그걸 가지고 황실을 물어뜯지 않을지 고민할 뿐.’
마커스는 일단 에스토크를 찔러넣지 않고, 고개를 돌려 한 부관에게 물었다.
“카리오사 후작은 답이 없나요?”
“예. 각하.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미 자기는 먹을 건 다 먹었다 이거군요. ……그런데 나는 이해가 잘 안 돼요. 왜 이걸 안 물려고 하지? 배불러도 먹을 만한 고깃덩이인데? 다들 누가 깃발을 들지 눈치만 보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의원 중에 나랑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싹 약속 잡아봐.”
자기가 무는 게 마커스라는 사내였다.
“그리고 대성당에도 편지 보내봐요. 용찬한 발렌시아누스가 침식자 출몰을 숨기고 있다, 이런 식으로 엮어서요. 지금이야 동맹관계라지만…… 동맹이라는 건 서로 빨아먹는 거니까. 흐흐.”
마커스는 거기까지 명령하고, 다시 자기가 배에 칼을 꽂아 넣은 시종을 바라보았다.
그는 양손으로 에스토크 날을 잡고 몸에서 빼내려 힘을 주고 있었다.
“자자. 이제 내가 이 정보로 뭘 할지 알았겠지요?”
“으, 흐으윽! 죄송합니다! 살려주십시오!”
“그런데 이거 돌아가서 못 보고하겠네요? 돈도 못 받을 거고.”
마커스가 손목에 힘을 주며 내장을 찔렀다.
시종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끄아악!”
“끌고 가요. 치유 포션 연구하는 데에 부상자 하나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조수들이 고개를 숙이며 시종을 바퀴 달린 침대에 묶어 연구실로 데려갔다.
“안 돼! 안 돼!”
마커스는 그 비명을 들으며 콧노래를 불었고, 한참 연구 중인 마법진과 피스톤 구조의 연계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들 가서 자기 일 봐요. 다들 일없어요? 일 줄까요?”
“아닙니다!”
부관들이 허둥지둥 달려 나가고, 마커스는 낄낄 웃으며 구리판 위에 주술 회로를 새기기 시작했다.
* * *
“제국의 지지 않는 태양이자 네 기사단의 레이디, 녹지 않는 바다와 얼지 않는 바다의 주인, 최연소 소드 마스터이자 진리에 가장 가까운 대마법사, 제국을 위해 냉혹한 결단을 내리신 분, 47번째 솔레타라스이신 제이릴리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발렌시아누스도 어지간해서는 내뱉지 않는 긴 인사말이 20대 초반의 여인에게서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드높은’ 프로이하이트의 후작, 시그나인 엘제누스 프로이하이트입니다. 오늘 이 아름다운 정원에 저를 초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개암나무처럼 고급스러운 연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한기가 감도는 하늘색 눈동자를 시원하게 빛내며, 영악하니 올라간 입술을 화려한 머리 장식과 귀걸이, 부채로 가린 대귀족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완고한 매 같은 인상도 있었지만, 화려한 드레스와 화장, 단련을 거듭한 사교계의 눈웃음 앞에서 대부분이 가려졌다.
‘레이디’의 표본 같은 그녀가 올해 연초 한밤중에 발렌시아누스의 방에 단검을 들고 찾아갔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걸 아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인 제이릴리스는, 그녀의 기나긴 인사말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대공이 남기고 온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예. 폐하. 아주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못 구하는 물건이니까요.”
발렌시아누스는 제이릴리스가 죽인 용의 사체를 그대로 동굴 안에 남겨 놓았고, 그 뼈와 피, 비늘과 가죽은 고스란히 시그나인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대가 젊다 하여 방계나 봉신들이 불순한 음모를 꾸미지는 않는가? 언제든 이야기하라. 봉신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는 일은 황제의 의무이니라.”
“폐하의 말씀에 절로 마음이 놓입니다. 다행히 안으로는 가신들이, 밖으로는 오라버니와 언니가 저를 지켜주고 있어 아직 평화롭습니다.”
시그나인은 즉위하자마자 오빠를 교역 도시의 총독으로, 언니를 거대 요새의 사령관으로 보냈다.
겉으로는 좌천을 넘어 유배이나, 전쟁광 언니와 돈 귀신 오라버니에게는 선물이었다.
제이릴리스가 나른하니 웃으며 물었다.
“짐에게 바라는 건 없는가? 그대의 부친은…… 짐의 명령에 죽었을 텐데.”
너무나 직설적인 물음에 동석하던 궁무대신과 외무대신이 눈을 부릅뜨고 헛기침을 했다.
발렌시아누스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뜨렸을 파멸적인 화법이었다.
그러나 시그나인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 저는 저희 가문을 멸문시키지 않은 폐하의 은혜를 여전히 찬미합니다.”
“그게 감정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그녀는 수백만 영민을 지배하는 대귀족답게 웃으며, 반신 제이릴리스의 잔혹한 물음에 정면으로 응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소중한 감정을 잘 지배해, 영지와 가문에 기쁨이 넘치게 하는 건, 귀족의 기본적인 소양이니까요.”
그 대답에 제이릴리스는 흡족하니 웃었다.
“감정을 지배한다, 라.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는가?”
앞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눈을 빛내는 게, 일견 청초하고 호기심 넘치는 소녀 같기도 했다.
시그나인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감정은 행동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귀중한 자원입니다. 우리는 음주가무에 빠질 때 즐거워하기에,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위해 음주가무를 하지요. 하지만 이는 영지의 이익과 가문의 이익에 어긋나고, 따라서 귀족은 음주가무에서 장기적인 슬픔과 괴로움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는 18살 소녀가 아니라, 용맥에서 용을 죽인 황제였다.
그러나 시그나인 역시 20대에 어엿한 대영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인재였다.
“그러니 영지와 가문에 이익이 되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그 반대인 일에 슬픔을 느껴야…….”
그날 만찬은 저녁이 아니라 야식까지 이어졌다.
시종들은 음식을 몇 번이고 다시 데워 왔고, 황제는 친히 새 후작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궁무대신과 외무대신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었다.
“잘된 겁니까?”
“그런 거 같군요.”
“내일 저녁은 누구였지요?”
“그레이스…… 그레모리우스의 새 후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