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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는 좋으나 싫으나 고용주의 온갖 비밀을 다 알 수밖에 없는 위치고, 제이릴리스의 직속 시녀인 비네아 역시 그랬다.
하나만 터져도 제국의 정세에 폭풍이 불어닥칠 온갖 비밀을 매일같이 본의 아니게 엿보고 있자면 정신이 나갈 거 같을 때도 있었다.
가장 최근에 알게 된 경악할 비밀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폭발 사건이 미친 마법사의 짓이 아니라 침식자의 짓이며,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충성맹세 일정을 예정대로 진행하기 위해 그걸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광명신이시여.’
물론 그녀가 모시는 황제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에 자기 손으로 베어 죽인 선황의 시녀를 그대로 쓰겠다는 게 보통 사람의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목탄화 스케치 속에 그려진 정교한 유화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제이릴리스를 보고 있자면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릴리스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그럴 만하다.’ 하고 생각하게 하는 아우라를 두르고 다녔다.
반면 발렌시아누스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야.’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아우라를 두르고 다녔다.
궁정 귀족 중의 궁정 귀족인 비네아는 그 아우라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아보았다.
최근에 그걸 실감했을 때는, 발렌시아누스가 그레모리우스 후작을 베어 죽이고 그 장손녀를 후작위에 앉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듯 침울하니 보고했고, 제이릴리스는 낭랑하게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짐이 갔으면 수도 인구를 3분의 2로 줄여 놓고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야.’
비네아는 이 세상 모든 게 상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게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광명신께서는 이 세상에 선악을 분별하셨다.
큰 빵을 주는 건 작은 빵을 주는 일보다 좋은 일이지만, 작은 빵을 주는 게 큰 빵을 주는 일보다 나쁜 일은 아니었고.
작은 칼빵을 주는 게 큰 칼빵을 주는 일보다 좋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팔 하나가 날아갈 일을 손끝 살점이 약간 베이는 정도로 끝냈다면, 이만하면 다행이라, 하고 생각해버리는 게 사람이라서.
비네아는 그 그레모리우스의 새 후작 앞에서도 침착하게 황제를 모실 수 있었다.
‘저 분이 그레이스구나.’
키는 보통이었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는 흑단 같은 윤기가 흘렀다.
촛불 빛이 반사되어 주황색 광채가 반짝일 정도였다.
눈동자는 갈색이었는데, 지혜롭고도 선량하지만, 어쩐지 이해하지 못할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분명히 비네아 자신 역시 이종족 혼혈의 대귀족이기에 그럴 터였다.
저 이해하지 못할 기이한 분위기야말로 선대 그레모리우스가 그랬듯, 황금과 흑철, 거대한 요새보다 영민들의 행복을 중요시하게 하는 부분이리라.
얼굴은 희고, 약간 소심한 인상이었지만, 대귀족다운 위엄이 있었다.
흑철로 만든 철관을 쓰고 있었는데, 제이릴리스 앞에서 관을 쓰고 나타난 건 그레이스가 처음이었다.
그 오만하고도 당당한 태도라면, 의복도 무척 화려할 거 같았지만, 예상외로 단정했다.
그레이스는 조화도 보석도 레이스도 없는, 윗단은 검고 아래로 갈수록 희게 물드는 그라데이션의 절제미 있는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버릇처럼 소매를 만지작거렸는데,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싶었다.
비네아는 부디 그 안 좋은 일이 발렌시아누스와 관련된 일이 아니기를 바랐다.
* * *
“솔레타라스의 황제 폐하께 그레모리우스의 후작이 인사 올립니다.”
그레이스 키멜리온 그레모리우스가 제이릴리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그녀에게 의자를 권했고, 둘은 직사각형 테이블 양 끝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대화는 황제와 대귀족의 대화답게 흘러갔다.
“자유 무역 도시를 건설하면 운하를 이용해서 수송해야 하는데, 이 관문에서 황실이 통행세까지 물리면 저희 가문에 손해가 발생합니다. 황실 상단에 관세를 철폐했으니, 관문 통행료도 면제해 주십시오.”
“그래. 허한다.”
그레이스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할 요구들을 했고, 제이릴리스는 행정관들에게 물어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자리가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황제는 제 앞에서 굽신거리지 않는 상대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레이스는 제 조부를 죽이라고 발렌시아누스에게 명령한 게 황제임을 알고 있었다.
비네아는 궁무대신과 외무대신이 어제보다 훨씬 더 안절부절못하며 둘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았다.
수십 년 동안 황실을 섬기고, 엘리트 관료 귀족들을 손짓만으로도 벌벌 떨게 하는 노신들이, 손톱을 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어깨를 떨고 있었다.
이러다 먹고 탈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에서 식사가 흘러가고, 결국 제이릴리스가 가학적인 웃음을 띠었다.
“폐하!”
“아이고 맙소사.”
비네아는 두 대신이 넋 놓은 표정을 짓는 걸 보았다.
지금까지 저 눈빛을 한 황제를 막을 수 있는 건 읍소하며 애원하는 발렌시아누스 뿐이었다.
“후작. 황형이 그대에게 무례한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그레이스가 대놓고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사실 여부를 떠나 참으로 무례한 이야기였습니다.”
“내용을 들어 보고 짐이 대신 사과해줄 수도 있는데, 말해 보겠는가?”
그레이스가 제이릴리스를 바라보았다.
백금발부터 훑어 내려간 그녀의 눈빛이 관절반지 낀 황제의 긴 손가락에 닿을 무렵, 그레이스는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감정을 절제하고 감추려 하십니까?”
“아니다. 짐은 언제나 짐이 내키는 대로 했도다.”
“저 역시 그리하고 싶습니다.”
“그런가?”
제이릴리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대귀족이 ‘원하는 대로’라면 대부분 사치와 향락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옷차림은 사치 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미망인의 단정함에 가까웠다.
“해야 하는 일만 하며 산다면,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고 참고 또 참기만 한다면, 이 잘난 혈통과 권위와 재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으음.”
“저 아래의 농노들과 우리 왕공 귀족의 가장 다른 점은,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지극히 존중하며 살 수 있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건조한 목소리에는 조금씩 열기가 깃들고 있었다.
“제게는 그 감정이 슬픔이었을 뿐입니다.”
제이릴리스가 한 방 먹었다는 듯 숨을 토했다.
“슬픔에 젖고 싶고, 지쳐 쓰러질 만큼 울고 싶고, 요새가 울리도록 소리치고 싶습니다. 제가 얼마나 슬픈지 알고, 모두 인정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고 운을 떼며 흑철관의 대귀족이 말을 이었다.
“슬픔이 나쁜 감정은 아니나 슬픔이 분노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지요. 대귀족은 전쟁을 일으킨다 한들 분노가 아니라 이해타산에 따라 일으켜야 하니, 제가 어찌 울 수 있겠습니까?”
“…….”
“황형은……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필요할 때 분노하고 원할 때 기뻐했습니다. 그 역시 어떤 의미로는 지독하게 솔직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 * *
비네아는 그레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비굴한 웃음을 두 가지로 해석했다.
솔직함.
방금 그녀의 말은 발렌시아누스의 충성심과 발렌시아누스의 패악질 모두에 해당했다.
어느 쪽이 본성인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본성을 바꾼다는 말이었다.
“폐하께서는 언제나 내키는 대로 행하신다니…… 슬퍼하실 수 있음이 부러울 뿐입니다.”
그레이스에게 비꼬는 기색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형의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논점을 이탈한 걸 용서하소서.”
그러나 감히 황제에게 하기에는 너무나 무례한 말이었다.
외무대신의 얼굴색이 초 단위로 바뀌는 와중에, 제이릴리스가 고고하니 웃으며 답했다.
“그래. 용서하마. 그대가 이미 자괴감에 미쳐 가고 있는 듯한데, 짐이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비네아는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제아무리 황제라도 충성을 맹세하려고 온 봉신에게 하기에는 너무 무례한 말이었다.
“그레이스 후작. 슬픔이란…… 언제나 느껴지는 게 아니야. 미식을 즐기던 중, 검을 휘두르던 중, 국정을 논하던 중,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보이지 않는 단검처럼 심장을 찔러 오는 법이지. 그 순간은 고통스럽지만…… 결국 지나가지.”
황제가 흑백 스케치 안에서 홀로 완성된 유화처럼 웃었다.
“보고는 들었어. 형제자매들을 모두 숙청했더군. 조부의 사후 모든 혈육을 숙청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러나 못 할 일도 아니야. 해봐서 아네.”
“폐하.”
“하루에 1시간 정도 슬픔에 시달려도, 남은 23시간은 가문의 영광과 꿈을 위해 심장이 뛸 거야. 그리고 그 1시간 동안 23시간의 자신을 증오하겠지.”
“그것도…… 해봐서 아십니까?”
황제는 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좋은 말이지. 하지만 인간이란 복잡하여…… 뱀 뿔 잎을 먹으면 팔을 자르는 동안에도 웃고, 검은 점 가시 나무즙을 먹으면 아침에 좋아하는 사람과 이어지고 저녁에 금광을 찾아도 우울함에 빠져 죽고 싶어지지.”
언젠가 그녀의 반쪽이 했던 말이었다.
“귀족답게 굴어라. 감정을 틀어쥐고 만찬 회장에서 이 음식 저 음식을 맛보듯 즐겨. 자책하지 마라. 그대는 대귀족이고, 짐과 광명신 앞에서만 책임을 진다. 그대 역시…… 그대를 심판할 자격이 없음이야.”
그 뒤로 무거운 침묵이 어렸다.
비네아는 두 대신과 함께 오들오들 떨며 만찬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황제의 말을 다소 거칠게 해석하자면, 결국은 ‘충성이나 바치라’였다.
시간은 흐르고,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요?”
“그러하다. 사라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고, 변하기 마련이니.”
“그러나 지나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럼 반으로 쪼개면 되겠구나.”
황제가 나른히 웃으며 답했다.
그레이스가 목례하며 몸을 돌렸다.
비네아는 그 표정이, 이상하리만큼 홀가분하다고 느껴졌다.
마치 마음을 정했다는 듯.
* * *
홍의주교 아르고스의 집무실에서 성자와 아르고스는 긴 대화를 나눴다.
“아르고스. 세속의 정치에 우리가 끼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오로지 우리가 광명신 앞에서 의분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테오스가 강직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반발을 표했지만, 깐깐한 인상의 노인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성자님. 적의 적은 친구입니다.”
“저는 황실이 아니라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위험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그를 없애야 할 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성자님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교단의 최고위 성직자인 둘이 언쟁을 나누고 있는 이유는,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성자님.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침식자의 존재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황제 폐하의 눈을 가리고, 제 실수를 덮기 위해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미 신문사들과 의원들도 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신실한 교도인 저 마커스는 수도에 올라온 지방 귀족들과 50만 시민을 위험에 빠트리는 행동을 좌시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나설 때, 교회에서는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비난하고, 저희를 지원하는 성명을 내주십시오. 수도 시민들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마커스는 광명교회에 손을 내밀었고, 교회는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아르고스는 성자에게 애원하듯 간언했다.
“그 망나니에게 협박당한 의원들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있답니다. 성자님. 법안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언제까지 세속 군주들이 침식의 힘을 멋대로 시험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습니다.”
“그건…….”
“저도 철혈당주가 어떤 자인지 알고 있습니다. 성자님이 그의 손을 잡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뿐입니다.”
아르고스의 열변에 마테오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런 힘을 가지고도…… 세상을 바꾸려면 타협해야 하는군요.”
“…….”
이윽고 그는 ‘검은 성자’답게 얼굴을 굳혔다.
“예. 하겠습니다. 그를 미사에 불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