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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건, 비슷한 얼굴을 한 또래의 친구들이었다.
그 또래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따듯하고도 그리운 기운을 풍기는 사람들이 방에 들이닥쳤다.
“일어났나?”
그들은 높게 솟은 평평한 후드를 뒤집어썼고, 소년과 또래들을 무심하고도 정밀한 손길로 다뤘다.
꼭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닦는 장인 같았다.
아무리 작은 금이 가도, 색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도자기를 깨트려버리는 장인.
“15번은 폐기한다.”
“23번도 못 쓰겠어.”
또래들이 하나둘 줄어갔고, 그럴수록 ‘배식량’은 늘어갔다.
소년과 또래들은 검고 진득한 고기를 먹었다.
한 덩어리를 받아 서른 명이 나누어 먹다가, 이제 열 명이 나누어 먹었다.
소년은 검은 고기를 먹으면 힘이 났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다.
몸에 거대한 종양이 부풀어 오르다 터지고, 몸이 슬라임처럼 녹아내려 죽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녹색 화염에 타올라 죽고…….
그렇게 또래들이 한 명 한 명 줄어갔다.
본래 열 명이서 나누어 먹던 검고 진득한 고기를 혼자서 다 먹게 될 무렵, 소년은 처음으로 얼굴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후드를 쓰지 않았는데, 키가 크고 몸이 단단했으며, 얼굴에 큰 흉터가 있었고, 소년에게 검술과 무술을 가르쳤다.
예전에 ‘용병’이라는 걸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소년이 그와 열 번 싸워 다섯 번 이기게 되었을 무렵, 후드 쓴 따듯한 사람들이 왔다.
그들은 소년에게 몸을 감추는 법과 몸을 바꾸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소년이 그걸 능숙하게 해낼 수 있게 되자, 후드 쓴 사람 중 제일 높은 사람이 소년을 데리고 그곳을 나갔다.
“네가 태어난 사명을 다해라.”
소년은 오래전 버려진 수도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주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날 후드 쓴 제일 높은 사람이 죽었다.
소년은 살아남았고, 후드 쓴 제일 높은 사람의 말을 따를 준비가 되었다.
소년은 침대 위에 누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니야.
곳곳의 지하수로 밑에 준비해둔 녹색 불꽃을 진정시키면서.
* * *
“오늘 우리는 그 녀석을 찢어 죽이고 수도에 안정을 가져올 것이다.”
발렌시아누스가 본궁에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는 오늘도 백금발을 넘기고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평소 같은 경박함이나 유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황금빛 눈동자 역시 평소처럼 위태롭거나, 오만하거나, 피폐한 대신, 악에 받친 황족의 독기가 깃들어 있었다.
쫓을 대로 쫓고, 몰릴 대로 몰린 끝에 눈에 돌아간 그 수려한 사내는, 손등이 하얗게 물들도록 주먹을 쥐며 지도와 칠판을 가리켰다.
‘학생회원들 활동비, 깡패들 고용비, 자경단원 후원비, 의원들 뇌물…… 공식적으로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예산들. 가진 금화를 거의 다 태웠어. 반드시 그 새끼를 잡아다가 눈구멍에 녹인 은을 부어줄 테다.’
여유가 지갑 두께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지금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폭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루디와 텐티아, 세레라지에는 그가 2주째 한숨도 못 자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발렌 님. 안색이 좋아지신 거 같아요. 회광반조는 아니겠지요.’
‘베어 죽인다.’
‘내가 어쩌다 주술 회로를 직접 새기는 신세가 된 거니? 이게 다 그 침식자 때문이야.’
그들 역시 지난 2주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발에 마음 졸이며 살았다.
바르바토스와 치안총감, 경비대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동, 청은, 백금의 기사단장들은 범죄자 한 놈을 2주째 못 잡고 있다는 사실로 흑철기사단장 바르바토스와 그 휘하 치안감들을 신나게 비웃었다.
거인 기사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 분노는 쌓일 대로 쌓여서 되려 서늘해졌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마지막으로 작전을 설명했다.
“이 구역을 치안감들이 삼중으로 포위 중이다. 놈은 이 3층 여관의 꼭대기에 오른쪽 끝 방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영체화로 이동할 수 있는 최대 거리는 50m, 투명화 지속시간은 15분이다.”
“다른 세 기사단은 대영주들을 견제 중이기에 그들의 지원을 받기는 힘들다. 워록들도 지금 황제 폐하와 황궁의 방비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놈의 능력을 알고 있다. 영체화는 전격이 부여된 무기로 끊을 수 있고, 투명화는 추적 마법으로 쫓을 수 있다.”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말을 멈췄고, 세레라지에가 도도하니 웃으며 말했다.
“전격 부여는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 내가 해 줄 거란다. 스크롤도 인당 두 장씩 배부했잖니.”
치안감들이 전격 마법 스크롤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흑요석 기둥이 흡음 결계란다. 정신 파동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한 번 한 번을 소모시키는 데에는 충분하잖니. 실력 있는 고참들 위주로 배분하자꾸나.”
발렌시아누스는 한 뼘짜리 기둥을 소드 유저급 치안감들이 받아 드는 걸 보며 내심 눈물을 삼켰다.
상아탑에서 물량을 끌어오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가격이 가격이었다.
그는 비밀 방을 가득 채우던 돈주머니들이 하나둘 없어지다 이제 텅텅 비어버린 걸 보며 한탄했다.
‘반드시 잡아다가 그만큼 뽑아먹고 말겠다.’
* * *
“영체화는 전격으로, 투명화는 추적 마법과 포위로, 정신 파동은 마도구로, 놈의 불꽃은 내가 막는다. 작전 중 생기는 모든 피해는 내가 책임진다. 모두 놈을 잡는 데에만 집중해라.”
텐티아는 ‘책임’이라는 말을 듣고 미묘하게 얼굴을 굳혔다.
남의 피해를 진정 책임진다는 게 저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반면 세레라지에는 옅게 웃으며 지팡이를 꼭 쥐었다.
책임지는 방법은 각자 살아갈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었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가 말하는 책임은 세상이 아니라 제이릴리스에게 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저 아래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성당의 첨탑을 흘깃하며 요 며칠간 들었던 의문을 회상했다.
‘놈이 미친 마법사가 아니라 침식자라는 사실을 교회가 모를 리가 없다. 지금쯤 합동 작전을 제안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왜 움직이지 않지?’
그것도 잠시, 그는 작렬하는 8월 태양 아래에서 그 태양보다 더더욱 뜨거운 열기가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자. 반역자를 죽이러 가자. 황제 폐하를 위하여.”
그는 제복을 갑옷처럼 입고 움직이는 벽처럼 나아갔다.
그는 오늘 경박하지도 능글맞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사고 치는 망나니가 아니라, 황제의 처형인으로서의 망나니였다.
* * *
사복 치안감들과 흑철 기사들은 거리의 그림자 속에 흩어졌다.
발렌시아누스는 혹시 침식자가 낌새를 눈치챌까 두려워 거리 통제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불태워버릴 듯한 기세로 여관에 들어서자 여관 주인은 그대로 기절했고, 루디는 금화 한 닢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준 뒤 발렌시아누스의 뒤를 따랐다.
발렌시아누스는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3층 오른쪽 끝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누구세요?”
긴장감 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듣자 하니 변성기가 이제 막 지난 거 같았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침식에는 남녀노소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이는 자아가 약한 만큼 순식간에 침식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정도로 망설이기에 그는 지금 너무 가난했고, 너무 악에 받쳐 있었다.
‘15일을 뜬눈으로 지새웠지. 이 포위망 구축하려고!’
발렌시아누스는 그대로 흑루를 뽑아 문 나무판자 사이로 찔러 넣었다.
상대가 문 앞에 서 있다면, 정확하게 옆구리를 갈랐을 일격이었다.
푸욱!
“!”
손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난 순간, 그는 검을 뽑는 대신 어깨로 문을 들이받으며 방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콰지직!
나무 문이 그대로 부서지고, 이를 악문 발렌시아누스가 섬세한 악당이 아니라 폭주한 마수처럼 돌진했다.
루디는 전례 없던 발렌시아누스의 과감함에 감탄하며, 상하쌍대 마총 ‘카스파’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였다.
‘발렌 님. 흥분하셨네요.’
그녀는 침착하게 돌입해 혹시 모를 동료가 없는지 방 곳곳에 총구를 겨누며 확인했고, 그 다음에야 발렌시아누스와 침식자의 싸움을 확인했다.
그건 싸움이라고 하기 힘들 만큼 일방적이었다.
쿵, 쿵, 쿵, 쿵!
분노한 대공은 처음 검을 찔러 넣은 기세 그대로 돌진해 침식자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박제된 곤충처럼 벽에 박아 고정해버릴 기세였다.
침식자가 몸을 영체화하며 벗어나려 했지만, 발렌시아누스가 비늘 두른 왼손으로 침식자의 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용언이 깃든 손아귀는 영체화된 침식자의 몸도 만질 수 있고.
치이이이이익!
지질 수 있었다.
강철 검도 녹여버릴 정도로 달아오른 손아귀가 소년의 영체를 지글지글 태웠다.
반투명해진 소년이 이를 악물고, 다음 순간 후드티 옆구리가 갈라지며 반투명한 녹색 뱀 네 마리가 창처럼 튀어나와 발렌시아누스의 몸을 두드리고 물어뜯었다.
돌벽도 뚫어버릴 위력의 뱀들이 발렌시아누스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러나 그 중 제복을 뚫고 대공의 몸을 찢은 뱀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소년이 어깨를 떨고, 발렌시아누스는 강건한 포식자처럼 웃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드득, 드드드득!
길게 밀려났던 그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흑루를 빙그르르 휘둘러 팔다리에 엉켜 오는 뱀들을 끊어냈다.
뼈마디 사이를 노리는 섬세한 검격이 아니라, 뼈를 부수고 가죽을 찢어발기는 험악한 검격이었다.
소년이 고통에 흠칫하고, 루디는 방아쇠를 당겼다.
퍼어엉!
산탄 마탄이 쏘아져 나가고, 후드에 수백 개의 구멍이 났다.
영체화 덕에 쇠 구슬에 실려 온 힘은 소년의 몸을 허무하게 지나칠 뿐이었으나, 마총에 담긴 마력은 영체의 뱀들과 소년의 몸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저게 뭐야?’
소년은 고통을 참으며 좁은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퍼어엉!
‘아무것도 안 보이는…… 나처럼?’
루디 역시 지금 아콰테그 먹인 시녀복을 입고 있었고, 그 아콰테그에는 세레라지에가 새긴 흐릿함 술식과 난반사 술식이 걸려 있었다.
낮이라고는 하나 창문 작은 어두침침한 여관에서 알아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년은 침음성을 삼키며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고개를 내민 순간, 소년은 바닥에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우르릉!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먹구름이 수도 하늘에 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은 그 구름이 품은 뇌기를 읽고 놀라워했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반대편 거리의 고층 호텔을 바라보았다.
남색 머리의 마법사가 넓은 챙의 모자를 쓰고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그녀의 남색 로브가 화려하게 휘날렸다.
“안 돼.”
거리와 넓은 모자챙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분명 악몽처럼 울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번쩍!
구름처럼 나뭇가지처럼 뻗어 내려온 번개가 영체화한 소년의 몸을 쳤다.
하늘을 날던 소년이 길바닥에 추락하고, 그의 육신에 다시 색채가 돌아왔다.
“어, 어?”
난데없이 떨어진 벼락에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훈련받은 소년은 그 시민들 사이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칼잡이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어떻게 미친 마법사 하나를 이 주간 못 잡을 수가 있냐는 말에 시달린 끝에 눈이 돌아가 버린 치안감들이었다.
“오지 마!”
후드 아래 소년의 눈이 녹색으로 일렁이고, 녹색 불꽃이 소년의 손에서 타올랐다.
근래 도시를 공포에 떨게 한 그 색채를 본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항복해라!”
그때 우렁찬 외침이 소년의 시선을 돌렸다.
하얀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가 소년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소년의 반대편으로 달리는 와중에 홀로 군중을 역행하는 붉은 기사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소년은 기사가 얼마나 강한지 알았고, 반사적으로 녹색 불꽃을 쏘아냈다.
시체룡의 불꽃처럼 쏘아진 불길이 기사의 몸을 감쌌다.
그러나 텐티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제국 검술 제 6단계, 자성분별.
말 그대로 베는 행위에만 집중한 검.
츠카아아악!
마나 블레이드를 만들면 속성 마법을 막을 수 있었지만, 마법 그 자체를 베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길게 쏘아진 불꽃이 검격을 따라 길게 갈라지고, 결국 소년의 손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 때, 세레라지에조차 텐티아가 바람 마법이 새겨진 마법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14살에 소드 마스터가 된 황제의 그림자를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는 붉은 기사가, 무방비한 침식자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