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93)화 (193/340)

(193)

“이제야.”

철혈당주 마커스는 흡족하니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복한 전령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 기사들에게 무장을 명했으며, 오랜 친구 ‘열사암후’에게 전령을 보냈다.

“그래요. 그대들도 언제까지 미루고 미룰 수는 없었겠지요. 직신 대귀족들도 올라올 만큼 올라왔고, 세베릭도 2주 동안 기다리고 있고, 무엇보다 그놈이 미친 마법사 따위가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습니까?”

마커스는 함교 유리창으로 먹구름 낀 수도 안쪽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에서 단발적으로 번갯불이 떨어졌다.

천재 마법사가 제 재능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었다.

침식자 소년을 향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수도 안팍에 모인 대영주들에게 하는 경고처럼 보였다.

봐도 못 본 척하라는 경고.

뇌운을 부리는 건 전기를 다루는 마법사로서 거의 완성된 경지였다.

마커스를 따라온 전투마법사들이 구름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피뢰 마도구는 준비되었나?”

“예. 각하.”

“그래. 잘했어. 그 카리오사조차 저걸 맞고 많이 힘들었다는데, 우리가 저걸 무식하게 맞이할 필요는 없지.”

마커스는 천재 앞에서 압도되기보다는 대항할 방법을 찾아내는 쪽의 인간이었다.

그는 주술 회로가 빼곡하게 새겨진 긴 철사 같은 접지를 받아 착용했다.

한쪽은 정장 목 옆으로 튀어나오게 해 귀 위로 세우고, 반대쪽은 등과 바지 안쪽으로 내려가 신발 옆으로 빠져나오게 했다.

위에서 치는 벼락은 발아래로, 땅에서 올라오는 전격은 허공으로 흘려버릴 수 있는 마도구였다.

마커스는 제 부하들이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끝낸 걸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가 개발한 구릿빛 마갑을 두르고 마도구 망토를 두른 거구의 기계 기사들, 외골격 마도 경갑을 입어 소드 유저의 몸놀림과 마법사의 화력을 겸비한 전투마법사들, 그가 어설프게나마 재현한 마총으로 무장한 5백의 정예병까지…….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영주가 꾸린,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군대였다.

마커스는 유쾌한 얼굴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령 보내.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모였으니, 다들 고깃덩이 하나쯤은 물고 웃으며 돌아가야지.”

마커스는 잠시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샛노란 눈동자와 나른한 미소를.

그가 2년 전 보았던 황제는 괴물이었고, 그가 며칠 전 보았던 황제는 사람 흉내를 내려 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래서 지는 거야. 만약 2년 전의 당신이었다면 나를 죽이거나 내게 손을 내밀었을 거라고. 내 비행선과 마총을 얻기 위해서. 그럼 나는 당신 앞에 엎드리고, 당신과 함께 서쪽으로 나아갔을 텐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나 목을 치던 황제, 언제나 최선을 다하던 제이릴리스는 이제 없다.

가진 게 많다는 걸 깨닫고 지키기 위한 타협을 시작한 자는 결코 괴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귀족들의 세상에서 괴물이 되지 못한 자는 다른 괴물에게 뜯어먹히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지. 서쪽으로는 나 혼자 가겠어.’

마커스는 6백여의 정예들을 이끌고 다시 성문을 향해 진군했다.

경비병들이 그를 막아서고 무장세를 요구했다.

“지난번의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을…….”

“닥치거라.”

거구의 기계 기사들이 팔을 휘둘러 경비병들을 날려 보냈고, 인스트루멘툼의 전령들이 말을 타고 수도 거리를 내달렸다.

* * *

북부 대공 세베릭은 황궁에서 걸어서 5분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고급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가 수도에 도착한 지 2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수도 시민 중 그의 존재를 아는 자는 많지 않았다.

대공인 만큼 알현 1순위였지만, 그는 아직 제이릴리스를 만나지도 않았다.

소드 마스터인 그는 대규모 호위대를 거느리지도 않았고, 이미 올해 초 대규모 식량 지원을 받아냈다.

부동항을 얻어가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충성맹세 후 꺼내도 될 이야기였다.

급할 게 없어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발렌시아누스는 시종을 은밀히 보내 전언했다.

[친애하는 세베릭. 수도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미친 마법사가 여기저기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중입니다. 그대 같은 대귀족이 거리를 나다니기에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북부의 정세가 시급하지는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급한 안건이 없다면, 우리의 재회가 잠시 미루어질 듯합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발렌시아누스.]

세베릭과 르세나 모두 눈치라는 게 있는 자들이었다.

“전하.”

“알고 있습니다. 침식자겠지요.”

“……배에 머무시는 게 어떠십니까? 저는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좋게 보지는 않지만…… 그는 분명 유능함을 갖춘 자입니다. 그런 그가 2주 동안 잡지 못한 침식자라면, 자칫 대공 전하가 사고에 휘말리실 수도 있습니다.”

세베릭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고요한 회색 눈동자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떠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계약 위반입니다.”

“전하.”

“올해 초 곡식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부동항을 받으러 왔지요. 그를 믿어 봅시다. 질 싸움을 시작할 자가 아니라는 건 르세나도 알지 않습니까?”

르세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전령이 가져온 편지를 펴 보였다.

“읽어 보십시오.”

“서부의 마커스가 보내온 편지로군요.”

[……황실의 미친 마법사 체포에 협조하여…….]

세베릭은 그 편지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했다.

“마커스가 함정을 팠습니다.”

“예. 전하. 미친 마법사 잡는 일을 돕겠다면 대영주들을 모으고, 그 앞에서 사실 미친 마법사가 아니라 침식자였고, 황실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몰아갈 게 뻔합니다.”

르세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르세나는 그 깐깐하고 단정한 얼굴에 감정적인 난색을 표하며 세베릭을 올려다보았다.

“전하. 나가지 마십시오.”

“르세나.”

“전하는 거인처럼 강한 분이지만, 대영주들은 설산 늑대처럼 사납고 위험합니다. 이제 몇 년만 있으면 북부의 숙원이 이루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 전하가 중앙 정계의 혼란에 휘말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세베릭은 잠시 발렌시아누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쾌하니 넘긴 머리와 화려한 겉모습으로 감추려 했던 피폐한 눈매와 핼쑥한 뺨을.

‘이해합니다.’

북부 기사들을 앞에 두고도 그렇게 말하던 초연함을.

“르세나. 미안합니다.”

“전하.”

“그가 나를 믿었으니, 나도 그를 믿어줘야 합니다.”

르세나는 세베릭을 바라보았다.

파도 같은 남색 머리에 그윽한 회색 눈을 가진, 품격 있는 인상의 사내를.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가시죠. 마차를 불러 놓았습니다.”

저 지독한 고결함을 언제나 답답해했지만, 그만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부 대공과 그 부관이 호텔을 나섰다.

* * *

동부 제일의 대영주이자 이제 곧 공작이 될 여인.

카리오사 서머린 아세노르타 역시 마커스의 전령을 받았다.

그녀는 호위대로 데려온 4천 대군을 셋으로 나눠 수도 곳곳에 보냈고, 본인은 2천 대군이 주둔한 넓은 공터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령은 공터 안쪽의 풍경에 다소 당황했다.

사방에 기사들이 물이 찰랑이는 나무통을 가져다 놓고 몸을 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기온이 정점에 달한 8월, 동부의 바다 사나이들은 파도를 갈망했고, 기사들은 너도나도 종자들을 시켜 찬물을 길어와 몸을 담갔다.

그 기사가 사내든 여인이든 셔츠 한 장만 입고 물속에서 희희낙락하는 모습에 전령은 혀를 찼고, 곧이어 혀를 씹었다.

카리오사 본인 역시 거대한 이동식 욕조에 찬물을 가득 채우고 소금을 풀어 바닷물처럼 염도를 맞춘 뒤, 그 단단한 장신을 흠뻑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매가 짧은 블라우스를 입고 팔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비늘처럼 반짝이는 피부에 바닷물이 닿자 더더욱 질겨지고 윤기가 흐르는 게 보였다.

전령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낭독했고, 카리오사는 피식 웃은 뒤, 기사를 시켜 편지와 전령을 모두 옆에 있는 물통에 담갔다 뺐다.

“우우욱!”

“내가 되게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쿨럭!”

“물은 답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

“각…… 아악!”

“많이 마시면 피부도 좋아지고, 살도 빠지고, 옷에 묻은 핏기도 빠지고, 아무리 시끄러운 놈도 물에 담가 두면 조용해진다니까.”

카리오사는 가벼운 눈웃음을 지우고,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시 제대로 말해 봐. 네 주인이 뭘 원하는지.”

그 사나운 기세 앞에서, 전령은 모든 사실을 실토했다.

“실은…….”

그 역시 이 정도는 각오하고 왔고, 카리오사 같은 성격의 귀족에게는 이편이 더 잘 먹히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를 침식자 내통으로 몰아 보겠다?”

“왕위를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카리오사가 히죽 웃으며 상어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조금만 더 자세하게 말해 볼 수 있을까?”

* * *

성자 마테오스와 홍의주교 아르고스는 대성당 웅장한 홀을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아르고스는 홀에서 대기 중인 성기사들을 바라보고는, 정중히 말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희생양으로, 또는 구제해주며 법안을 통과시키면 될 듯합니다. 어느 쪽이든 저희에게 이득이 된다는 건 똑같습니다. ”

“……마커스를 견제할 방법을 준비해 두세요. 만약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가장 먼저 성기사단을 보낼 곳이 그자의 영지입니다.”

“알겠습니다.”

“의원들에게는 법안을 전달했나요?”

“다중 투표권을 가진 궁정 귀족들은 절반 정도 회유가 끝났고, 평민 의원들은 거의 다 넘어왔습니다. 코넬 의원이 바람잡이가 되어 준다니 시민들의 지지도 좋을 겁니다.”

마테오스는 그 이름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코넬이 발렌시아누스의 후원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었다.

‘무슨 끙끙이라도 있나?’

“……알겠습니다. 일단 다녀오도록 하지요.”

“예. 성자님.”

성자가 성기사들과 함께 대성당을 나섰다.

아르고스는 그 넓은 등을 보며 성호를 긋고 기도했다.

부디 성자의 앞을 광명이 비추기를.

그분의 선택에 신의 뜻이 깃들기를.

그의 선의가 선한 결과를 낳기를.

* * *

마커스는 수도에 올라온 거의 모든 직신에게 전령을 보냈다.

북부에서 한 명, 동부도 사실상 한 명이 되었지만, 남부와 서부, 남서부에서 올라온 직신만 해도 수십을 헤아렸다.

그들이 호위대를 150명씩만 데리고 와도 1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먹구름 낀 하늘 아래 수도에 불온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두 소녀 대영주 역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이용해 제이릴리스를 압박하겠다……? 그 쌍둥이는 여론 같은 걸 신경 쓸 수 있는 인종이 아닐 텐데?”

“내 복수심을 자극하는 게 목적이라면, 성공했다고 답해.”

연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한기가 감도는 하늘색 눈동자를 빛내는, 완고한 매 같은 인상의 대귀족 시그나인.

흑철관을 쓰고, 검은 머리를 길게 풀어 내렸으며, 지혜롭고도 기이한 인상의 갈색 눈동자를 가진, 신비로운 인상의 대귀족 그레이스.

두 소녀 영주는 자신의 자리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둘 모두 발렌시아누스에게 하늘 같은 아버지와 사랑하는 조부를 잃은 기억이 있었다.

시그나인은 감정을 지배했고, 그레이스는 감정에게 지배당했지만, 둘 다 이 제안이 성공할 확률이 높음은 알고 있었다.

‘제이릴리스가 보통 황제라면.’

자존심과 명분을 중히 여기고, 권위로부터 권력을 만드는 황제라면 반드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대면 협상에서 실패한 마커스만이 내지를 수 있는 한 수였다.

이 수를 위해 일부러 협상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성공한다면 나는 자유야. 하지만…… 실패한다면? 과연 제이릴리스가 우리를 다 죽이지 않을까? 이미 친족들을 그렇게 숙청했는데, 우리라고 죽이지 말라는 법이 없어.’

‘기사 한둘 보내는 정도라면 할 수 있어요. 문제는 실패했을 때입니다. 우리 생각보다 보복이 크게 들어올 경우엔 문제가 심각해져요. 차라리 다들 저쪽에 거리라 생각하는 것도…….’

‘자유…… 라.’

‘되면 좋을 것과 될 것.’

시민들이 문과 창문을 닫아걸고 집안에 틀어박히는 와중에, 먹구름이 광명신의 눈길을 가린 수도에서, 폭군과 망나니와 굶주린 대영주들이 서로의 목을 노리고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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