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소년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내 말 제대로 못 들은 모양인데-.”
그럴수록 발렌시아누스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네가 얼마나 강력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몰라.”
소년이 단단히 못을 박듯 말했다.
“네 생각보다는 강할 거야.”
“대귀족들이 애매하게 다치면 치료해준다는 핑계로 가두면 되고, 죽으면 상속에 개입해서 그 후계자들이랑 거래하면 돼. 쉬워. 말 안 들으면 한 10살짜리 사생아를 데려다 놓고 상속권이 있다고 우기면, 그날 밤에 그 가문 애들이 돈이랑 미녀 미남들을 데리고 찾아 오거든. 뭐, 천운이 있어 귀족들이 그 폭발에 손가락 하나 안 다치면 아무 일도 없는 거고.”
발렌시아누스는 이미 수만 개의 못이 박힌 썩은 벽처럼 소년의 못을 가볍게 받아냈다.
“뭐?”
후드 안 어둠이 크게 일렁였다.
“그들의 부하들이 죽은 거에 대해서 조금 아쉬운 소리 해줘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찍어누를 수 있어. 지금도 그 정도 권위는 있다고. 그리고 우리의 권위는 점점 강해지기만 할 거야.”
“너. 미쳤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주먹을 쥐락펴락하고, 손가락을 몇 번 까딱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거 같아.”
소년은 거의 도망치듯 물러섰다.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을 텐데. 아무리 적어도 5천 명은 되지 않을까?”
발렌시아누스는 가볍게 수로 사이를 건너뛰며 소년을 쫓았다.
샛노란 눈동자가 광기에 가까운 신념을 띠고 빛났다.
“그 1백 배, 그 1만 배도 죽여 봤어. 그들의 죽음은 모두 안타까운 일이었지. 슬프게도 누군가는 결단해야 했고, 나는 그 10만 배의 사람들을 살리는 결정을 내렸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그 눈빛도, 그 목소리로 맹렬하게 타오르거나 감정에 젖어 있지 않았다.
“……!”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에서 가운데쯤 끼인 서류를 처리하듯, 사무적이고 나른하기까지 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문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눈을 돌릴 수도 없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지금은 자책하기보다는, 아니. 자책하면서도 나아가야 할 때였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네 죽음은 그리 안타깝지 않으리라는 거야. 아. 말실수였네. 미안해. 너는 절대 안 죽을 텐데. 정정하지. 네 고통은 전혀 안타깝지 않을 거야.”
둘은 난전의 소용돌이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저 뒤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와 루디의 총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발렌시아누스는 멸시의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도 알아. 나는 잔혹하고, 오만하고, 방심이 심하며, 방탕하지. 그리고 싸우기보다 타협하기를 좋아해. 철혈당주 마커스에게 보낼 타협안도 이미 만들어 놨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여야겠지만, 받아들인다면 충분히 같이 가줄 수 있어.”
소년이 손잡이만 남은 검에서 반투명한 칼날을 뽑아내고, 녹색 불꽃을 끌어모았다.
후드 안 어둠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발렌시아누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희는 언제나 그래. 집구석이 마음에 안 들면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깽판을 칠 수도 있어. 집주인인 우리는 그걸 때려잡을 수도 있고, 사과할 수도 있지. 그런데 너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안 줘. 나는 최고의 협상가지만, 집이 마음에 안 드니까 다 불태워버리겠다는 새끼들을 상대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우리는-.”
“닥쳐. 무슨 말 하려는 지 알아. 내가 그딴 소리를 지금 몇십 년 동안 듣고 있는데.”
* * *
“몇십 년?”
소년의 의문에 발렌시아누스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의문스럽게 웃으며, 소년의 혀를 뽑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고 내심 생각할 뿐이었다.
“사신을 섬기는 흑마법사들이 지난 1천 년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아몬 신을 섬기는 애들은 어떻고? 걔들은 사회에 녹아들려고 뼈 빠지게 헌신했어.”
“그래?”
“흑마법사들은 시체의 기억을 되살리는 연구를 해서 미제 살인사건 해결에 공헌했고, 늑대인간들은 한 70년 전까지만 해도 한 번은 북부 최전선에 무장 순례를 가서 3년 이상 싸우고 왔지. 지금 걔들이 이 세상에서 발 뻗고 사는 건 모두 피의 대가야.”
소년이 물었다.
“그럼 너희는? 너희는 무슨 대가를 치렀지?”
발렌시아누스는 맞서 불길을 일으키며 답했다.
“인류를 네 이종족의 폭압에서 해방한 게 우리 솔레타라스의 초대 황제야.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한 끝에 권리와 자유를 얻었지. 나는 피로 그 권리와 의무를 이어받았고.”
“의무?”
소년이 별 이상한 소리 다 들었다는 듯 되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천 년 전 우리 가문의 선조는 이종족들과 맞섰고, 천 년 후 우리는 옛것들과 맞서. 그래. 너 같은 침식자를 잡아다가 갈가리 찢어서 정보를 뽑아내는 거. 그게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야.”
그러니까, 하고 운을 떼며 발렌시아누스는 말했다.
“황궁으로 들어가자. 더러운 죄인아. 내가 널 불태워 반쯤 재로 만들기 전에.”
소년 역시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럼 제일 더러운 죄인은 네 쌍둥이 동생이겠네. 그래. 황궁은 언젠가 들어갈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건 오늘은 아니야.”
그 말이 끝난 순간, 발렌시아누스가 화산 같은 분노를 토했다.
그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고, 사무적인 살의가 화산 같은 분노로 화했다.
“그 애의 이름을 미천한 입에 담았으니, 이빨에 구멍을 뚫고 철사를 박아 넣어서 신경에 전기 충격을 가할 거다! 혓바닥을 길게 늘인 다음 압정을 박아 넣고 그 위에서 뜸을 뜰 거다. 사지는 바로 잘라 주려고 했건만, 내 생각을 바꿔 놓는구나. 너는! 내게 죽음을 간원하게 될 것이야!”
발렌시아누스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 * *
소년의 등 뒤에서 녹색 화염이 일렁이고, 녹색 불꽃으로 만들어진 불꽃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흐하하하!”
발렌시아누스는 그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은은한 어둠 내린 통로를 나아갔다.
펑! 펑! 펑!
녹색 불꽃이 하얀 제복으로 덥힌 몸을 두드렸다.
“영혼이 불살라지는 고통은 어때? 형?”
그 한 발 한 발이 스치기만 해도 몸속으로 번져 들어가 살가죽 아래를 불태우는 끔찍한 마법이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흑루를 뽑아 용언의 불꽃과 마나 블레이드가 뒤섞인 주황색 마나 블레이드로 덮었다.
‘형?’
“너는 고통을 몰라.”
용찬 의식에 화정, 영생까지 먹은 몸이었다.
이제 불이나 열 계열의 마법에 유효타를 먹으면 슬슬 부끄러워해야 할 때였다.
“그럼 이건!”
소년이 손을 휘두르고, 녹색 불꽃 화살 세 발이 모여 뱀이 휘감긴 창의 형태를 이루었다.
쐐애애애액!
불길하게 일렁이는 불의 창이 어둠을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콰득!
이에 발렌시아누스는 암적색 비늘 덮인 왼손으로 그 창족과 가장 가까운 창대를 움켜쥐어서 막아냈다.
돌진하던 대공의 장신이 일순 멈춰 서고, 창의 추진력과 대공의 각력이 대칭을 이뤘다.
찌지직!
그 대칭은 결국 발렌시아누스 쪽으로 기울었다.
펑!
발렌시아누스는 손아귀 안에서 녹색 불꽃을 흩어 버리고, 허공에 ‘불의 창’ 여섯 발을 불러냈다.
소년의 후드 안 어둠에 균열이 일었다.
“!”
“이 정도는 되어야 고통이지!”
쐐애애액!
불꽃의 창이 소년을 덮쳤다.
본래 관통 후 폭발하는 성질을 가진 창이었으나, 소년의 주변에 떨어진 창들은 폭발하는 대신 몇 배로 커지며 소년의 몸을 감싸려 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었고, 불꽃은 사악한 웃음소리처럼 타오르며 소년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침식자를 상대로 한 번 성공했다. 이제 다시 쓸 수 있어.’
눈구멍, 귓구멍, 입, 콧구멍, 땀구멍, 모공……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다가 불길에 밀어 넣고 체내의 지방에 불을 붙여 안에서부터 태워 죽이는 화염 제어법으로, 그가 회귀 이전 침식자들을 고통스럽게 처리하기 위해 사용하던 섬세한 기술이었다.
어느 정도 불꽃에 면역이 있는지, 꿋꿋하게 버티던 소년의 어깨가 일순 뻣뻣하게 굳었다.
* * *
발렌시아누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나아갔다.
“이제 뭐가 잘못됐다는 게 느껴지나 보네?”
“끄아아악!”
“이 도시에 들어올 때부터 알았어야지! 감히 네놈 따위가 내 원대한 인생에 훼방을 놓으려 해!”
발렌시아누스가 불길에 휩싸인 소년을 향해 검을 쳐들었다.
“네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 손에 끌려갈 것이고! 황제 폐하는 충성맹세를 받을 것이며! 하나 된 제국은 세상과 삶이 너무너무 싫은 네놈들을 죄다 저세상으로 보내줄 것이다!!”
타앗, 반쯤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그 순간 뛰어올랐다.
발렌시아누스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소년은 일순 녹색 불꽃을 피워 올려 주황색 불꽃을 흡수하고 또 밀어냈다.
소년이 소검 길이로 뽑아낸 반투명 검을 대공의 눈을 향해 찔러 넣었다.
이대로 즉사시키거나, 바닥에 눕힌 뒤 연속으로 찔러 절명 시킬 생각이었다.
카드득!
발렌시아누스의 왼손이 녹색 불꽃의 검을 으깨는 소리였다.
“!”
그는 그대로 왼손을 뻗어 소년의 멱살을 잡았고, 번쩍 들어 올렸다.
“놀랐냐?”
그는 소년을 힘껏 휘둘러 옆 돌벽에 박아넣었다.
쾅!
소년은 의식을 잡으려 노력하며 똑같이 왼손을 휘둘러 발렌시아누스의 옆구리를 노렸다.
카앙!
녹색 기운이 타오르는 손톱이 암적색 비늘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소리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소년을 바닥에 거세게 내팽개쳤고, 다시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소년이 벼락처럼 발차기를 내질러 발렌시아누스의 무릎 아래를 노렸고, 발렌시아누스는 그대로 맞아준 뒤 비늘 두른 왼손으로 소년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퍽!
“일어나.”
“이익!”
화르르르륵!
소년이 녹색 불꽃을 뿜어내 발렌시아누스의 몸을 태웠고, 발렌시아누스는 그 불길 속에서 무시무시하게 웃어 재꼈다.
“더 강한 건 없어?”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가 어두침침한 지하수로 안에서 번뜩였다.
소년은 이를 악물었고, 양쪽 옆구리에서 반투명한 녹색 기운으로 이뤄진 뱀 세 마리를 불러내 발렌시아누스의 얼굴과 어깨를 물어뜯었다.
대공은 가볍게 발을 굴렀고, 용언의 황금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그의 몸을 감쌌다.
사르르르…….
녹색 기운이 금색 기운에 닿자마자 녹아내리고 흩어졌다.
그제야 소년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어렸다.
“너…… 어떻게?”
발렌시아누스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성의 성주처럼 웃으며 답했다.
“용찬 의식을 했지. 화정도 먹었고, 영생도 먹었어. 길 가는 빈민 중 아무나 잡아다 이렇게 먹여도 초인이 되는데, 초대 황제와 전대 황제를 꼭 닮은 나는 오죽할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다고?”
방어력은 공격력보다 키우기 힘들다.
모든 공격을 여유롭게 받아낼 정도라면, 실제 실력은 몇 배의 격차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 처먹었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해. 원래는 몸 때문에 조금 사렸는데, 이제 사리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라서.”
발렌시아누스는 흑루를 들어 소년의 후드를 베었다.
‘나도 절박하거든.’
약자의 절박함도 무서운데, 강자의 절박함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그 잘난 얼굴부터 보…… 너 뭐야?”
* * *
황족의 상징이 백발에 가까운 백금발과 금색 눈동자라고는 하나, 모든 황족이 백발 금안을 가진 건 아니었고, 백발 금안이 황족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그래서 발렌시아누스는 그날 황궁에서 백발의 소년을 보았을 때도 정체에 관해서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번 침식된 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고, 좋은 침식자는 죽거나 죽을 날을 기다리는 침식자뿐이었다.
‘죽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년은 백발에 가까운 백금발과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얼굴형은 동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발렌시아누스를 닮아 있었다.
물론 진짜로 사촌 동생이나, 조카일 가능성도 있었다.
‘사생아를 납치해서…… 기억을 지우거나 손을 대고, 황족의 피로 물려받은 재능으로…….’
그럼 변이하지 않고도 이 정도 힘을 내는 걸 설명할 수 있었다.
옛것의 힘을 제대로 받은 황족은 악몽처럼 강했으니까.
물론 소년에게 황실의 피가 섞였다면 더더욱 살려줄 수 없었다.
혈통으로 빼어난 감응력을 물려받은, 훈련된 침식자.
제이릴리스와 발렌시아누스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된 상황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흑루를 쳐들었고, 소년은 손잡이만 남은 단검을 내려놓고 무릎으로 기어 왔다.
“살려주세요. 삼촌.”
“죽어주려무나. 조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