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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금엉금 기어 온 소년이 발렌시아누스의 발치에 매달렸다.
발렌시아누스는 무자비와 잔혹함의 대명사였지만, 그 자신과 빼다 박은 듯 생긴 얼굴을 반으로 잘라버리는 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일단 황족은 황족인 모양이구나.”
그는 검을 내리치는 대신 다리 뒤쪽으로 돌리며, 그의 다리에 매달리려는 소년의 손목을 반쯤 베어냈다.
“아악!”
소년이 비명을 지르고, 찢어진 소매 안에서 손잡이만 있는 검이 툭 하고 떨어졌다.
“어, 어떻게 알았-!”
발렌시아누스는 일그러진 얼굴을 여유만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나도 많이 해 봤거든. 발치에 매달린 다음에 무릎 뒤쪽을 찌르고, 그대로 양다리를 잡아서 뒤로 넘어트리고, 목 아래 찌르는 거.”
“이런 젠장!”
“너 같은 황족이 커서 된 게 나다.”
발렌시아누스는 하얀 구두로 소년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루디의 산탄 마탄을 맞았을 때부터 누덕누덕했던 후드가 결국 길게 찢어지며 소년의 상반신을 어둠 속에서 드러냈다.
발렌시아누스는 소년의 몸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또 무슨 괴물이냐?”
소년이 반사적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인상부터 찌푸려질 만큼 민감한 부분이라는 뜻이었으나, 발렌시아누스는 성자를 납치하고 딸 앞에서 아비를 죽인 냉혈한이었다.
“난 사람이야!”
“사람은 배꼽이 있어. 너는 알에서 태어났나 보지?”
소년의 복근 아래쪽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깔끔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모습에서 여러 사실을 유추했다.
하나.
‘황족의 피를 이용해 만든 호문쿨루스다. 피를 확보하는 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겠지만, 어지간한 혈마법사도 호문쿨루스는 만들기 힘들어. 아무리 생조술과 혈마법에 능한 옛것에게 지식과 힘을 받았다고 해도, 많은 설비와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걸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둘.
‘아무리 봐도 인간이다. 녹색 화염을 쓰고 있는데도 침식의 기운은 거의 느껴지지 않아. 수도원에서 얻은…… 성물의 지식이 확실해. 아예 몸 안에 이식하는 경지까지 올랐나 보군. 힘든 싸움이 되겠어.’
셋.
‘제아무리 제국이 넓어도 저 정도 설비와 공간을 완전히 비밀리에 가지고 있는 건 힘들다. 백작급 대귀족의 후원 정도는 받아야 할 거다. ……차라리 잘됐어. 놈들이 인간 세상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싹 다 쳐냈을 때 입는 피해도 커지겠지.’
넷.
‘사회에 녹아든 침식자가 여럿 존재한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으로만 힘을 받는 거야. 아무 옛것에게나 힘을 받고 변이해서 날뛰는 게 아니라, 제대로 조직화 되어 정신이 육체를 잠식하게 않게 체계적으로 제어하고 있다.’
다섯.
‘회귀 전에도…… 이 정도였나?’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회상에 빠졌다.
물론 버둥거리는 소년에게 검을 겨누는 건 잊지 않고서.
‘이 정도 지식과 힘이 회귀 전에도 있었다면…… 훨씬 강했어야 해. 하지만 우리가 상대한 침식자들은 괴물일 뿐이었다. 회귀 전 세상이 내전과 전쟁으로 더 혼란스러웠으니, 침식자 세력이 강하면 강했지, 약했을 리는 없는데?’
떠오르는 건 두 가지였다.
첫 번째 가설은, 대영주들의 전쟁에 침식자들도 휘말려서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차용증 한 장 끊어주고 재산과 사람을 징발했지. 소위 사제급이나 주교급만 빼고 다 전쟁에 끌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외로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영지를 뛰어넘어 활동하려면 결국 상인 같은 걸로 위장해야 하는데, 그때는 전선 근처를 오가는 상단이 보이면 그냥 잡아다가 사람은 병사로, 짐은 군수품으로, 마차와 말은 전선으로 보냈지.’
그렇게 전국적인 조직망이 무너지고 점조직화된 다음, 결국 소수의 거물만 살아남고 침식 교단 조직은 붕괴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째 가설은, 애초에 그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대영주들이 알아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지. 전쟁 때문에 마경을 닫는 데 쓰일 병력이 없자 사방에서 마경이 범람해서 난리가 났었어. 손 안 대고 코 푼 건지도 모르겠네.’
그와 제이릴리스가 간신히 안정을 얻고 침식자들과 적대하기 시작했을 무렵, 유스티아누스가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가 죽고 시간이 되돌아왔다. 어쩌면 걔들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다 끝난 건지도 모르겠군. 허무하겠어.’
거기까지 생각한 발렌시아누스는 소년에게 거두었던 검을 겨누었다.
‘꼭 살려서 데려간다.’
“넌 네가 황족이라고 생각하냐?”
* * *
소년은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표정만 지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흑루를 납병하며 물었다.
“너는 네가 황족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대답해.”
소년이 찢어진 후드를 주섬주섬 걸치며 답했다.
“그분들은 내가…… 언젠가는 황궁에 들어가리라고 말했어.”
“그래.”
“내 몸에는 너하고 같은 피가 흐르지.”
“그렇지. 인정하기는 싫다만.”
“가족의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가 혈족은 맞는 거 같아.”
“그래서.”
“맞아. 나는 황족이야. 썩어빠진 친족들은 모두 죽이고 제국을 개혁할 황족.”
소년이 삐딱하니 말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오락가락하는 태도에 짜증을 느끼며 답했다.
“딱히 살고 싶지는 않나 보군. 내 신발 바닥이라고 핥아야 할 텐데?”
“잊은 모양인데, 내가 이 지하수로에 숨겨 둔 폭발 마법이 6개야. 이미 캐스팅이 다 끝나서, 언제든 터뜨릴 수 있다고.”
“그럼 너는 황족이 아닌 모양이군.”
소년의 눈빛에 의문이 어렸다.
대공은 싸움으로 흐트러진 제복을 가다듬더니, 멋들어지게 말했다.
“황족이라면 모름지기 신민들을 아껴야 한다.”
소년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몇만 명을 버렸다면서?”
발렌시아누스는 담담히 답했다.
“몇십만 명, 몇백만 명을 위해서였지. 다 죽일 수 없었기에 도장을 찍었지만, 그 과정을 즐긴 건 아니었어.”
“웃기지 마.”
“반면 너는 어떻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이 짓을 저지르는 건가? 아니지. 너는 그저 충성맹세를 방해하고 제국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서 이 짓을 저지르는 것뿐이야. 그래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비정한 선택을 한 대공이고, 너는 추한 범죄자인 거다.”
소년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발렌시아누스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지 않았다.
“너랑 나밖에 없는데, 네가 말해 줄 거 같지는 않으니 내가 말해야지.”
“나는 지금의 황실이 싫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어째서지? 네 부모를 죽였을 거 같지는 않은데? 세뇌 교육이라도 받았나? 우리가 썩어빠졌다고? 근거는?”
“…….”
“우리가 딱히 대흉년에 축제를 벌였다거나 하지는 않았어. 숙청으로 즉위한 건 솔레타라스 역사에서 흔한 일이지. 제이릴리스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 같은 헛소리도 안 했어. 애초에 너는 한 살도 안 된 거 같은데…… 썩어빠졌다는 이야기는 어디의 누구에게 들었지?”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소년은 고개를 숙였고, 발렌시아누스는 의기양양해졌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알아.”
“그래도 귀족이나 황족은 안 죽었어.”
“그래…….”
“그럼 돌아갈 수 있지.”
발렌시아누스는 약간의 거부감을 찍어 누르며 말했다.
기사와 병사의 목숨값이 같을 수는 없다 해도, 위에 선 자가 그걸 대놓고 인정해버리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논리가 아니라 궤변이 필요했다.
“소년이여. 황족답게 굴어라.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그분을 위해 희생해. 제국 전체를 사랑하고, 눈에 보이는 걸 마음의 기둥으로 삼아라.”
“…….”
“그럼 네게도 황족 대접을 해주지.”
소년이 한 걸음 물러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는 침식자야.”
발렌시아누스는 그 자리에서 눈을 빛내며 손을 내밀었다.
“제어할 수 있지 않나?”
“정신 파동을 터뜨릴 수도 있어.”
“그럼 수백 명쯤 죽겠군. 마법 한 번에 수백 명쯤 죽일 수 있는 건 나도 똑같다.”
“네 말대로 나는 호문쿨루스야. 아비도 어미도 없다고.”
“나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태어났고, 쌍둥이 동생이 아버지를 죽이는 걸 봤지. 내 손으로 이복 남매들을 송당송당 썰어 불태웠고 말이야. 우리가 혈족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가족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노력으로 변하는 거야.”
“…….”
“가자. 조카야.”
발렌시아누스는 몸을 돌렸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그는 잠시 벽에 손을 짚고 구역질을 참았다.
역시 거짓말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 * *
발렌시아누스는 아무도 없는 나선 계단 앞에 섰다.
수로 곳곳에서 구울들을 쳐 죽이는 흑철기사단의 함성이 들려왔다.
소년은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먼저 올라간다.”
“아니. 내가 먼저 갈게.”
소년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저 앞 문틈에서 환한 햇살이 보였다.
소년이 천천히 지하실 문을 열었다.
새로운 인생이 다시 시작한다는 묘한 설렘과 두려움으로 손이 떨리고 있었다.
파아앙!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마탄이 날아와 문을 뚫고 소년의 어깨를 정통으로 꿰뚫었다.
“아악!”
그리고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쑥 들어와 소년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 입을 틀어막고 끌고 나갔다.
발렌시아누스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여유만만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오를 뿐이었다.
“됐어?”
“됐잖니.”
지하실 밖에서는 루디, 텐티아, 세레라지에와 고참 치안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세레라지에가 희열에 찬 눈빛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텐티아에게 눈짓했다.
“걱정하지 말려무나. 너는 이 천재의 업적에 공헌하게 될 거잖니? 조금 아프겠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란다.”
텐티아가 소년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세레라지에가 품속에서 파란 약을 꺼내 소년의 목구멍에 부어 넣었다.
소년은 몸속에서 힘이 흩어지는 걸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발렌시아누스!”
“왜 그렇게 화났지?”
발렌시아누스는 유유한 걸음걸이로 지하실을 나섰다.
뻔뻔하고 단단한 미소가 걸린 그 얼굴은 마치 먼 옛날 인간을 농락하던 초월적인 이종족 같았다.
“날 속였어…….”
“제국법은 사람도 아닌 걸 속였다고 처벌하지 않아. 또, 나는 함정수사와 유도신문을 할 권리를 제국의 지지 않는 태양이신 황제 폐하게 하사받은 치안감이기도 하지.”
“황족답게 살라며! 그럼 황족 대접을 해주겠다며!”
소년이 붉은 눈을 부릅뜨며 포효했고, 발렌시아누스가 포식자처럼 웃었다.
“그래. 지금 그럴 기회를 주지 않나? 황제 폐하를 위해서 희생할 기회다. 명예롭게 헌신하도록!”
“날 속였어!”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날 속였지. 폭발을 6개 준비해 놨다고 했잖아? 사실 7개 아니었어?”
“!”
발버둥 치던 소년이 몸에 힘을 뺐다.
치안감들이 소년의 팔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입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일순 소년의 눈에 승리감이 어리고, 발렌시아누스는 한 손을 들어 재갈을 풀게 했다.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소년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힘을 묶어두는 걸 멈추면 바로 터져. 이제 이 도시는 불바다가 될 거야. 지옥이 이 땅에 강림하고, 너희는 모두 저주받으리라!”
“거짓말.”
세레라지에가 딱 잘라 끼어들었다.
그녀는 치안감들에게 다시 손짓해 소년에게 재갈을 물리게 하고, 남색 고깔모자 챙을 내려 오후의 햇볕을 피하며 말했다.
“발렌. 듣지 말렴. 거짓말이란다.”
“그래?”
“너도 시간 차이를 둔 폭발을 해 봤으니 알겠지만, 그렇게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이미 일어난 폭발을 마나로 억누르는 일이잖니.”
“그렇지.”
“일곱 개의 폭발을 며칠 동안 유지하는 건, 황제 폐하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실 거란다. 캐스팅 정도는 마쳐 둘 수 있겠지만, 시동어는 외우지 않았을 거고, 지금 저놈이 무기력해졌으니…….”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세레라지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파란 눈과 노란 눈이 다른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지금 당장 터질 수도 있잖니……?”
쿠구구구구구구-!
굉음과 함께 지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