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97)화 (197/340)

(197)

세레라지에는 위기의 순간 본성이 드러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생물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외부와 내부의 위협에서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의 본성이 오히려 평소에 나온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두 사람이 있을 때, 사흘을 굶은 사람의 도둑질과 한 끼를 굶은 사람의 도둑질 중 어느 쪽이 더 비난받아 마땅하겠니?’

상아탑은 언젠가 탑 밖에 나갈 수도 있는 생도들이 사회의 상식을 잘 흉내 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도덕 상식을 가르쳐주었다.

‘이해할 필요는 없었지. 그저 외우고 따라 하면 되잖니.’

암기는 자신이 있었고, 세레라지에는 그 덕에 1년간 바깥세상을 떠돌면서도 학살극 수준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세레라지에는 눈앞의 혼란을 담담히 응시했다.

“으아아악!”

“대피, 주민 대피를!”

치안감들이 새된 비명을 지르고.

“발렌 님! 도망치셔야 합니다. 죽지 마세요!.”

루디가 발렌시아누스를 잡아끌고.

“당장 멈추지 않으면 네 목을 치겠다.”

텐티아가 침식자 소년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침식자 소년이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내 입을 강제로 벌린 게 누구였더라?”

세레라지에는 자박자박 다가가 지팡이 끝에 달린 쇠 촉으로 소년의 뒤통수를 때렸다.

딱.

그녀의 힘으로는 소년을 기절시킬 수 없었지만, 고통은 줄 수 있었다.

“이!”

“그냥 한번 때려 봤단다.”

“뭐……?”

“감히 내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거니?”

침식자 소년은 그럼 너는 눈을 세모나게 뜰 수 있느냐, 하고 물으려 했지만, 세레라지에는 다시 한번 소년의 뒤통수를 때렸다.

“잘 안 되잖니. 역시 근력 강화 마법을…….”

퍽!

텐티아가 손날로 소년의 목덜미를 내리치고, 소년이 축 늘어졌다.

“이걸 원하신 겁니까?”

세레라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변수를 줄이는 게 제일 중요하잖니?”

“예?”

세레라지에는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녹색 불길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시전자가 없어지자, 마나가 흩어지는 동시에 폭주하는 거란다. 약간은 시간이 있어. 내가 빨리 움직이면, 하나둘 정도는 디스펠할 수 있지 않겠니?”

그녀는 하늘 전체가 마경에서 새어 나온 뇌기로 뒤덮였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던 마법사였다.

“그래도 남은 다섯이-.”

“일곱이 모두 터지는 것보다는 낫잖니?”

* * *

텐티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나, 그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지요. 전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가 울며 매달리는 루디를 달래고 합류했다.

“운이 좋으면 다 구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세레라지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설령 섬광 점멸 주문으로 몸을 벼락으로 바꿔 하늘을 난다 한들, 일곱 곳을 돌 시간은 없었고, 무엇보다 그럼 디스펠을 할 마나가 남지 않았다.

“무슨 말이니?”

“일단 불꽃이잖아. ‘피어올라 따르는’ 주문으로 간섭할 수 있어. 아까 아래서 싸울 때도 서로 불꽃을 막거나 빼앗았고.”

발렌시아누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다 한데 모을게, 누나가 한 방에 디스펠 해 줘.”

“쉽지 않을 텐데…….”

세레라지에는 입술을 깨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품속에서 붉은 약을 꺼내 마셨다.

“……원래는 정신 파동이나 폭발이 터져도 충성맹세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어. 못 잡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쪽으로도 노력했거든. 침식자랑 엮인 만만한 귀족 하나 골라서 다 뒤집어씌우거나 침식자가 제국의 분열을 바란다, 이런 내용으로 기사를 뿌릴 셈이었으니까. 이미 신문사에 전문을 보내 놨어.”

그걸 보냈던 루디가 딸꾹질했다.

세레라지에는 수인을 맺으며 물었다.

“이제 아니라는 거니?”

“저놈. 누가 봐도 황족이잖아.”

그 순간 천재 마법사의 얼굴이 굳었다.

피로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그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황실의 책임이 더 커지는 거니?”

“그렇지. 똑똑하네.”

“원래 그랬단다. 동생아.”

발렌시아누스가 주변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치안감들은 가능한 한 많은 주민을 대피시켜라.”

치안감들이 결의를 다지며 본분을 준비했다.

“예. 전하.”

“알겠습니다!”

“텐티아 경, 경과 루디는 저 침식자를 안전하게 황립 마도 공방까지 옮겨 주게. ……만약 습격이 있다면, 그대들의 안전을 이자의 이송보다 중요시하게.”

기사와 시녀가 주먹 쥔 오른손을 심장에 가져다 댔다.

“예. 전하.”

“네. 발렌 님.”

“누나. 같이 내려가자. 다 끌어모을 테니 디스펠 해 줘.”

천재 마법사가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한 손으로는 로브 자락을 쥐고 몸을 우아하게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 동생아. 대폭발이 일어날지, 아무 일도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꾸나. 시도는 천재의 권리이자 의무잖니.”

* * *

발렌시아누스는 세레라지에의 인도에 따라 일곱 폭발 마법의 중심지 쪽으로 향했다.

“제일 가까운 곳에서 끌어들이는 게 좋지 않겠니?”

“여기야?”

“그래. 여기란다.”

슬슬 마법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는지, 저 멀리서 시리고도 뜨거운 열기와 희미한 녹색광이 어른거렸다.

치안감들에게 하수구에서 연기가 올라온다는 신고가 들어가기 시작할 거 같았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용언의 기운과 마나를 모두 끌어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피어올라 따르는 불꽃.”

사아아아-.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고, 양손이 암적색 비늘로 뒤덮이고, 목까지 비늘이 차올랐다.

본래 무언가를 지배하는 계열의 마법은 잘 보이고 가까울수록 효과가 좋았다.

조금만 멀어져도 아예 발현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어찌어찌 발현해도 효율이 바다 깊은 줄 모르듯 뚝뚝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드넓은 수도 곳곳에 심어진 폭발 마법을 폭발하는 순간에 맞춰 끌어들인다는 건, 보통 마법사라면 시도 이전에 발상조차 하지 않을 짓이었다.

‘다 끝내 놓고 세베릭을 만날 거야. 중부는 본래 황실의 손안에 있다. 동부와 북부의 협상이 끝나면, 제국 5분의 3이 안정돼. 그럼 서부와 남부도 자연스럽게 머리 숙일 수밖에 없어.’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에게는 이 기적조차 목표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었다.

‘하나 된 제국을 제이릴리스에게 안겨 주겠다. 그렇게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겠어. 영지전은 끝날 거고, 침식자들은 불탈 거고, 나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거야. 무해해진 황형 발렌시아누스로서!’

그의 의지가, 마나가 미로 같은 지하수로 끝으로 달려 나갔다.

녹색 화염이 뱀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저항했지만, 피로 물려받고 용찬으로 깨워냈으며 노력으로 키운 권능은 그 뱀의 목덜미를 휘어잡고 질질 끌어냈다.

사아아아아-.

지하수로 안을 녹색 화염이 뻗어나갔다.

‘와라.’

밀려오던 화염이 모퉁이에서 만나며 한 줄기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모퉁이에서 녹색 화염이 밀려왔다.

“누나.”

“준비는 끝났단다. 한데 모이면 바로 디스펠할 수 있잖니.”

세레라지에가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감 넘치게 내뱉었다.

막대한 열기가 밀고 온 열풍에 모자와 머리카락, 로브가 흐트러졌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발렌시아누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콰콰콰콰콰콰콰!!

파도처럼 밀려온 녹색 불꽃이 주황색과 붉은색으로 변하고, 한 덩어리로 뭉치며 구의 형태를 이루었다.

폭발한 녹색 불꽃을 끌고 와서, 그의 권능으로 물들여 제어권을 빼앗아 온 다음, 다시 잠재우는 과정이었다.

폭발한 불꽃을 곧바로 여기까지 끌고 와야 하는 만큼 속도가 느려져서도 안 되었고, 그의 색으로 물들여야 하는 만큼 마나와 권능이 모자라서도 안 되었다.

“크윽!”

발렌시아누스가 처음으로 신음했다.

거대해진 화염의 구가 지하수로를 메울 듯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위쪽 돌 천장이 열기에 녹아내리고, 아래쪽 수면에서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올라 둘을 덮쳤다.

수증기도 수백 도에 달하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세레라지에가 다급하게 망토로 몸을 가리고, 발렌시아누스 역시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아아아아!”

그가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며 양손을 천천히 모았다.

지하수로 통로를 메울 만큼 커졌던 불덩어리가 사람 머리 정도 크기로 압축되고, 발렌시아누스의 머리에서 굽은 암적색 뿔이 솟았다.

쩍, 쩌저적!

그러나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천장은 더 이상 하중을 버티지 못했다.

돌과 모래와 자갈과 흙이 무너져 내렸고, 세레라지에는 한 걸음 물러서 피했다.

“이게 무슨 야단이니!”

다행히 그 위쪽에 바로 건물이 있어서, 무너진 건물 잔해가 발렌시아누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집채만큼 크게 뚫린 구멍으로 밖을 내다본 발렌시아누스는 차라리 그게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서 있던 곳 위쪽은 대로 한복판이었다.

* * *

말이 히히힝, 하고 울부짖으며 마차들이 멈춰 섰고, 거리를 오가던 시민들은 비명을 질렀다.

“바닥이 무너진다! 피해!”

“마법이다!”

“저, 저 안에 불덩어리 좀 봐요!”

“누가 있는데?”

발렌시아누스는 곧바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세상!”

그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세레라지에에게 말했다.

“물러나! 저 모퉁이 뒤까지라도.”

세레라지에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몰랐다.

“왜니?”

“내가 이 폭발 일으키려는 줄 알 거야! 이제 거의 다 모았어! 녹색 불꽃 더 이상 안 모이면, 그때 뛰쳐나와서 디스펠하고 나를 쓰러트려!”

세레라지에는 방금까지는 거대한 시서펜트처럼 몰려들던 녹색 불길이 이제 어른 팔뚝보다 조금 더 두꺼운 정도만 남아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녀는 구멍 가장자리로 사람들이 모이는 걸 보며 황급히 지하수로 모퉁이 뒤까지 물러섰다.

구멍 가장자리로 모인 시민들은 끔찍한 광경을 보았다.

근 2주간 수도를 공포에 몰아넣은 미친 마법사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머리에 악마같이 굽은 뿔이 솟은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끝없이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세로로 갈라져 있었고, 음영 진 얼굴과 핼쑥한 뺨은 아주 단호하고 잔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기에 특유의 수려한 외견이 더해지니, 마치 무시무시한 의식을 치르는 신비하고 사악한 고위 침식자 같았다.

“녹색 불꽃…….”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두가 발렌시아누스가 녹색 불꽃을 ‘모으는’ 걸 보았다.

부서진 벽돌 조각이 날아들기 시작한 건 한순간이었다.

“치안감님들! 대귀족님들! XX 아무나 이리 좀 와 보십시오!”

“머리, 머리를 맞춰! 머리!”

“여보, 도망쳐!”

“얘들아! 엄마 손 꽉 잡아!”

“지가 직접 저지른 거였어? 처음부터 자기가 한 짓이면서, 그걸 잡겠다고 깡패들 풀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거였냐고?”

“……왜? 대체 왜?”

“우리 기강을 그렇게 잡고 싶었냐? 높으신 분들 수도에 모이는데, 우리 같은 평민들이 거리에 보이면 안 되니까?”

“내 친구랑 내 아들 살려내라! 이 빌어먹을 망나니 새끼야!”

발렌시아누스는 분노에 찬 면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대영주들이 데려온 군대들의 기세 싸움 때문에 수도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식료품 물가도 오르는 중이었다.

그가 대귀족들의 병사들 주둔지를 최대한 외곽으로 잡고, 하드리탄이 최선을 다해 물가를 잡았지만, 늦출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미친 마법사의 연쇄 폭발 사건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죽고, 황실은 깡패들을 풀어 사람들이 감시하니, 불만이 쌓이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퍽!

빠르게 날아온 벽돌이 발렌시아누스의 관자놀이를 쳤다.

그러나 그는 휘청이기는커녕, 세로로 갈라진 눈을 부릅뜨며 구멍 주변에 보인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저 개자식!”

“여기입니다, 여기.”

“우리를 다 죽이려는 건가?”

“독한 새끼! 야. 더 가져와. 아예 묻어버린다.”

비처럼 쏟아지는 벽돌과 자갈 세례를 묵묵히 받아내며, 수도 제일의 망나니 대공은 마지막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스르륵.

지하수로 모퉁이 너머에서 마지막 녹색 불길이 뱀의 꼬리처럼 기어와 주황색으로 달아오른 구 안으로 들어갔다.

야유와 비난과 공격의 한 가운데 서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 제복만큼이나 찬란하게 웃으며, 발렌시아누스는 중얼거렸다.

“해냈어.”

그 직후 세레라지에가 모퉁이 뒤에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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