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설 만큼 더운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슬슬 태양이 기울기 시작한 오후 6시, 제국의 수도 솔레타라온의 안팎에 불온하고 불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르르르르르르-!”
공포새를 탄 남부의 경장 기병들이 수도 곳곳을 내달리고.
치이이익!
증기 뿜는 거대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운하 옆 동쪽 대문을 확보했다.
치안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그 빈자리는 각지에서 올라온 대영주들의 가병들이 채웠다.
“이 거리를 확보해라!”
“중부군의 움직임은 어떻지?”
거리마다 각기 다른 깃발과 문장을 단 기사들이 활보했고.
“무서워요.”
“들어가자. 다 끝날 때까지 숨어 있는 거야. 1년 반 전처럼.”
거리의 주인이었던 시민들은 집 안으로 숨어들거나.
“망나니 발렌시아누스를 죽여라!”
“침식자 발렌시아누스를 죽여라!”
분노에 차 달려 나왔다.
마법사의 예민한 감각은 그 모든 불길함의 전조를 잡아냈으나.
“그 갑옷도 피뢰 주술이 새겨져 있니?”
“전하.”
“카리오사도 이건 못 버텼잖니? 너희는 다른지 확인해볼 수 있겠니?”
그녀는 사람들이 엇갈리며 살아가는 세상을 몰랐고.
쿠르르르릉!
겁먹은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웠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발톱은 고양이보다는 훨씬 날카로워 어지간한 대영주의 배도 갈라 버릴 수 있었다.
노을이 차오르는 하늘에 흩어져가던 먹구름이 다시 모여들고, 그녀의 노란 눈에서 노란 전격이 번뜩였다.
지하수로로 내려왔던 기계 기사 둘이 잠시 멈칫했다.
휘오오오오-.
폭풍전야 같은 습기 찬 바람이 불고, 세레라지에의 긴 남색 생머리가 정전기와 함께 나부꼈다.
분노에 차 당장 철혈당주의 군대를 헤치고 달려들 기세였던 시민들도, 심상찮은 기운이 맴도는 하늘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또 발렌시아누스가?”
“이번에는 무슨 짓을 하려고!”
그들은 세레라지에가 강력한 마법사임은 알았지만, 설마 인간이 뇌운을 부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영주는 세레라지에의 발톱을 손쉽게 피했다.
“전하.”
“…….”
“사람들이 더욱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 역시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마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제 병사들도 막을 수 없는 폭동이 일어날 거 같습니다.”
“…….”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거겠지요? 그래도 동생이니까? 하하.”
세레라지에는 마법의 천재였지만, 그 마법을 언제 사용해야 가장 효과적일지는 몰랐다.
매일 공방에서 먹고 자며 세속의 일에 거의 끼어들지 않았던 만큼, 지금 제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다.
잘 모르는 건 함부로 건들면 안 되는 법이었지만.
“빌어먹을 발렌시아누스!”
“세레라지에 전하! 그 침식자 놈에게 사형을 내려주십시오.”
시대와 상황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마커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따라와.”
세레라지에는 기계 기사에게 안겨 올라가 마커스의 기계 마차에 탔다.
발렌시아누스가 함께 실리는 걸 본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기계 기사들과 마커스의 정예병들은 기이한 소리를 내는 마도구를 통해 그들을 밀어냈다.
* * *
세레라지에는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마차는 지붕이 높아서 그녀의 고깔모자를 벗지 않고도 탈 수 있었다.
“저도 탑햇을 즐겨 쓰니까요.”
보통 사람은 화려한 벨벳과 톱니바퀴 장식을 보며 마커스의 특이한 취향을 감상하겠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 너머의 것들이 보였다.
마나 수용성이 좋은 그레모리우스의 흑철로 만든 골조, 바퀴와 축에 새겨진 복잡한 주술, 스프링을 이용한 충격 완화 구조, 사역마의 심장과 지배 술식을 이용한 조종간…….
마커스는 그녀가 그 모든 걸 알아보았음을 알아챘다.
‘보석 같은 사람이군요. 그래요. 상아탑은 인재를 놓친 겁니다.’
언젠가 제국 최고의 전격 마법사가 될 여인과 이미 제국 최고의 마도공학자라 불리는 사내가 수십 cm 정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마커스였다.
“세레라지에 전하. 지금 저희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세레라지에는 앞쪽 의자에 눕혀둔 발렌시아누스를 흘깃 바라보고 답했다.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는 네게 유리한 곳 아니겠니?”
“하하. 소문대로 새침하시군요. 그러지 말고 창문 밖을 한 번만 확인해 주십시오.”
세레라지에는 못 이기는 척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마차는 이미 동문 밖으로 나왔고, 거대한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저 남쪽으로는 황실을 따르는 중부군의 깃발과 천막들이 보였고, 정면의 동쪽으로는 그보다 1.5배는 되는 듯한 수의 깃발과 천막들이 보였다.
그 한가운데 즈음에는 비공정 니벨룽겐이 있었다.
어디선가 본 수많은 문장이 있었지만, 세레라지에는 그 문장들을 몰랐고, 마커스는 어른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일단 저 깃발이 저희 인스트루멘툼 가문의 문장입니다. 그 옆 깃발과 옆의 옆 깃발은 프로이하이트와 그레모리우스의 깃발이지요. 저 백상아리 깃발은 아세노르타의 카리오사에게 권한을 받은 베너렛 나이트(Knight Banneret)가 들고 온 겁니다. 그 옆으로 솟은 높은 깃대 네 개는 저희 서부의 후작들이고, 그 옆을 둘러싼 깃대 아홉 개는 서부의 백작들이죠.”
“그러니?”
“저 공포새 기병들은 남서부의 세 후작과 열여섯 백작에 더해 열사암후 체사르가 몰고 온 것입니다.”
“그렇구나.”
“남부에서는 많이 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적기제독이 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백작 3명이 직접 왔고, 베너렛 나이트 5명이 군대를 데려왔습니다. ”
세레라지에는 그 말들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빡였다.
조각 같은 얼굴로 아기새처럼 가볍게 턱을 갸웃거리는 그 몸동작은, 새침하다 못해 무심해 보였다.
‘알 바 아니라는 겁니까?’
마커스는 세레라지에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고 있다고 이해했고, 그녀의 대범함에 손뼉을 쳤다.
“하하. 그깟 백작위 가진 제독 하나가 오든 말든, 백작이 몇 명이 모이든 상관없다는 겁니까?”
“……?”
“역시 황족은 황족입니다. 하기야…… 우리가 저렇게 모여 봐야 결국 황제 폐하 앞에서는 며칠도 못 버티겠지요. 며칠이 뭡니까. 그분이 하늘로 날아올라 진노의 창을 몇 번 던져 보이면 다들 어린애처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겁니다. 아니면 대귀족의 체면을 던져 버리고 무릎 꿇고 황궁으로 기어들어가 자비를 구하던지요.”
세레라지에는 마커스의 그 말만큼은 이해했다.
“그래. 그분은 사람이 아니잖니? 신에게 기도하듯 머리를 조아려도 부끄럽지 않단다.”
마커스가 호쾌하게 인정했다.
“하하.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를 적대하려고 하면…… 답이 없어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소드 마스터 겸 대마법사를 이길 방법이 안 떠오르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럼-.”
“그분이 가진 제일 만만한 직위가 황제입니다. 하하. 웃기지 않아요? 소드 엑스퍼트 기사 이백 명과 전투마법사 백여 명을 거느린 ‘황제’가 제일 만만하다니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사실인데. 그러니 황제로서의 책임감에 걸어 봐야지요. 저는 영토를 확장하고 싶거든요.”
세레라지에는 진심으로 물었다.
“발렌시아누스와 저 침식자를 잡아가는 게 네 영토 확장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이니?”
마커스는 통치자인 동시에 마법사였고, 자신의 전문 분야를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이게 폐하에 올릴 협상안입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침식자로 몰아 교회 법정에 세운 뒤, 사형 판결을 면해 주겠다고 제안해드리는 거지요.”
세레라지에는 대체 대귀족들이 어떻게 교회 법정에 개입할 수 있는지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자신도 없었다.
마커스는 그걸 당황으로 받아들였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평민 의원들을 매수했고, 대귀족 대의원으로서 교회가 새로 발의할 법안에 찬성해주기로 했습니다. 교회의 감시를 약간 받아들여야겠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궁정 귀족 일파가 아무리 반대해도 통과될 겁니다.”
“…….”
“우리 연합은 영토 확장, 타국에 대한 선제공격권, 감세 등을 비롯한 각자의 목표를 이룰 겁니다. 상아탑은 침묵할 겁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자유를 얻었고, 속세에는 진절머리가 날 테니까요.”
마커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세로줄 정장과 썩 잘 어울리는, 군림하는 대귀족, 쟁취하는 부르주아, 몰두하는 탐구가로서의 승리감이 뒤섞인 미소였다.
“우리 대영주들은 연합을 이뤘고, 교회가 우리 편이지. 의회도 반은 넘어왔고, 상아탑은 침묵할 거야. 제이릴리스께서는 지고한 분이지만, 지금은 황제라는 입장에 갇힌 분이지.”
그는 의수와 진짜 손을 깍지 끼며, 앞쪽 의자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그분이 우리를 다 죽이고 너를 구하려 할까? 아니면 우리에게 권리와 의무를 조금씩 지워 주고 너를 구하려 할까. 아니면 그냥 네가 시민들에게 찢겨 죽게 내버려 두고, 우리에게 더 굵은 목줄을 채우려 할까?”
발렌시아누스는 답이 없었다.
그러나 마커스의 의안은 발렌시아누스가 기절한 척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발렌시아누스.”
“…….”
“넌 망했어. 너는 네 목숨을 잃거나, 목숨 걸고 얻으려던 걸 잃을 거야. 전자면 좋겠어. 난 네게 개인적으로는 아무 감정 없거든.”
* * *
수도 동쪽에 진을 친 대영주 연합은 광장에서 공식적인 발표를 했다.
“‘침식자’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규탄한다. 우리는 침식자가 나온 황실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없다!”
그 발표가 끝나자마자 대성당 앞에서 아르고스가 교황으로 즉위했고, 아르고스는 교황의 거대한 권위를 빌어 제국 의회에 법안을 올렸다.
황제의 이름으로 통과될 그 법은, 제국 전체를 넘어 광명교를 믿는 모든 곳에 적용될 법이었다.
많은 조항이 있었지만, 그중 골자는 이 두 조항이었다.
[옛것과 관련된 모든 연구를 할 때는 교회의 허가와 관리 감독을 받는다.]
[침식의 죄에 대한 집행권은 황실과 교회가 동등하다.]
이제 교회도 황족, 왕족, 대귀족 침식자를 자체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제국의 궁정 귀족들은 지방 귀족들과 교회가 하나 되어 찔러 온 이 공격에 순순히 당해줄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외무대신이 서랍에서 온갖 약점과 비밀을 꺼내 귀족 연합 간 이간질을 시작하고, 하드리탄이 황실에서 봉신들에게 의례적으로 내려주던 마경 피해 복구 예산을 삭감하고, 청은기사단과 황동기사단, 헬레나는 대규모 회전을 준비했다.
물론 귀족 연합도 그 정도 압박은 견딜 자신이 있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황실의 충신, 적기제독 슈브유가티오는 수도로 올라오지 않는다!”
“적기제독도 침식자 황제에게는 충성맹세를 거부했다.”
해전 때문에 바다에 남은 적기제독을 끌어들이고.
“세베릭 대공. 수많은 침식자를 베어 죽인 제국의 기둥이여!”
“가장 침식자와 옛것을 경계하고 증오해야 할 황족이 침식되고, 침식자와 손을 잡고, 수도에서 폭발을 일으키고 다닌 작금의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렌시아누스과 사적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세베릭의 발을 묶었다.
중부에서 입지가 작은 북부 대공이다.
온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발렌시아누스에 대한 분노를 토하는 판에, 황실은 몰라도 발렌시아누스 개인을 대놓고 옹호할 수는 없었다.
‘미안합니다. 친구여.’
백발 적안의 소년에 대한 사실은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소년은 니벨룽겐 제일 깊은 연구실로 들어갔고, 마커스는 다시는 소년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아직 발렌시아누스가 침식자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는 교회의 검증을 받지 않았고, 그저 ‘미친 마법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에 뿔이 나 있는 걸 모두가 보았다.
게다가 수도의 개망나니라는 평판은 확실하게 그의 다리를 잡았다.
망나니 행세를 하며 황제에게 무해함을 간증한 대가로, 발렌시아누스는 신민들에게 유해함을 입증했다.
“황제 폐하께 그대를 직접 처벌하라는 이야기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아시나요?”
막사 안, 마커스는 발렌시아누스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주변인들에게 속내를 알 수 없다는 평가를 듣는 둘은, 정장을 입는다는 기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분의 진노가 두려워서겠지. 후작은 내가 그분께 어떤 존재일지 모르니까.”
“그래요. 우리가 직접 그대의 목을 치는 건 너무 위험하지요. 그래서 바깥에 일을 맡겼습니다. 지금쯤이면 의회가 열렸을 거예요. 궁정 귀족들이 난리를 치겠지만, 결국 법안은 통과될 겁니다.”
마커스가 의안과 멀쩡한 눈을 빛내며, 생글생글 사람 좋게 웃었다.
“축하합니다. 발렌시아누스.”
“…….”
“이제 목줄을 잡혔네?”
웃음과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목소리였다.
발렌시아누스는 피식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향유를 바르지 못해 약간 흐트러진 백금발 아래, 샛노란 눈동자에 경박한 웃음이 어렸다.
“궁정 귀족들은 난리 안 칠 텐데.”
“응?”
“내가 그렇게 부탁했으니까.”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가지런한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내가 이겼다. 철혈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