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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은 아몬드 같은 눈을 영악하게 빛내며 그녀의 파벌에 속한 의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거리에 쏟아지기 시작한 돈을 투자받길 원하는 의원도 있었고, 건설 길드들을 다루고 싶어 하는 의원도 있었고, 재개발 요령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의원도 있었고, 코넬이라는 한 인간을 흠모하는 의원도 있었다.
의원으로서의 탐욕과 인간적인 존경심 사이에서 각기 다른 균형점을 찍고, 각자의 목표를 열여섯 소녀와 함께 이룰 수 있으리라는 믿는 든든한 파벌원들이었다.
“찬조 연설하고 오겠습니다. 물론 다들 동의하겠지만, 중요한 건 만장일치니까요. 교황 성하의 첫 법안에서 만장일치가 안 나오면 그만큼 모양 빠지는 것도 없겠지요.”
그녀의 적들은 시궁쥐 같다고, 그녀의 수하들은 늑대 같다고 평가하는 눈빛이었다.
코넬은 반원형 좌석에서 손을 번쩍 들고, 마지막 찬조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침공받고 있습니다.”
열여섯 소녀의 목소리가 돔 안에 낭랑하게 울렸다.
“적들은 그 수와 강함을 헤아릴 수도 없고, 아군은 찢어져 있습니다.”
의원들은 평민, 성직자, 총독령, 궁정 귀족을 가리지 않고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했다.
코넬은 침식자들과의 싸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저는 제 눈으로 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눈길을 주지 않은, 주고 싶지도 않은 밑바닥에서 기어 나와, 조금씩 차오르다가 결국 흘러넘칠 것입니다.”
지팡이를 짚은 외다리 고아 소녀에게는 상이군인 같은 인상도 있었다.
“그 적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라고 해도, 여러분은 이 더럽고 냄새 나는 진창에 발을 담그기 싫으실 겁니다. ”
의회 소속 포고꾼과 기자들이 일순 숨을 들이켰다.
기자들이 미친 듯 깃펜을 놀리며 그녀의 연설을 써 내려갔다.
시민들이 빈부를 막론하고 분노에 차 있는 시기다.
‘더럽고 냄새나는 진창.’
코넬이 아니라 다른 의원이 이런 말을 했으면 길거리에서 뭇매를 맞을 수도 있었다.
“이해합니다. 사람들이 빛을 쫓는 게 아니라 그림자도 돌아보며 살았다면, 애초에 빈민가 같은 곳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하고 운을 떼며 코넬은 말을 이었다.
“그곳에 손을 내밀어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한 손을 들어 백 명의 성직자와 의원들을 가리켰다.
“교회는 저희의 더러움을 떨쳐주었고, 주린 배를 채워 주었으며,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의 의원 중, 저 고위 성직자들이 궁정 귀족만큼이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평생 빈민가는커녕 자기 발로 거리를 걸어본 적도 없는 대부호들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연설하는 코넬조차도 속으로는 가증스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형식은 본질만큼이나 중요했다.
“그 용기를 광명교회가 전 제국에, 전 대륙에 나누고자 합니다.”
코넬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스스로 이 진창에 들어오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이 진창에 들어오겠다는 고결한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카랑카랑하고도 높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가의 패기와 노련미가 어린 외침이었다.
“……이상으로 아르고스 성하께서 발의한 법안에 관한 찬조 연설을 마치겠습니다. 중간에 감정이 격해진 점 의원님들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코넬은 자리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전하. 대체 어쩌시려는 겁니까?’
그녀가 보기에 이건 완전히 자충수였다.
그녀도 빈민가 재개발을 대영주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마커스의 전령에게 전언을 들었다.
발의 주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궁정 귀족들과 총독령 의원들도 쉽게 거부할 수가 없었다.
“표결 시작하겠습니다.”
찬성 500표. 반대 0표. 기권 0표.
궁정 귀족들도 모두 찬성했다.
만장일치였다.
별도 집계하는 지방 귀족들의 대의원 표도 과반을 넘었다.
이제 교회는 침식 관련 실험에 끼어들 수 있었고, 황족과 귀족들을 교회법으로 심판할 수 있었다.
아마 그 1호는 발렌시아누스가 될 터였다.
그러나 오랜 숙원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의원들의 얼굴에는 기쁨보다 혼란이 앞섰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황실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법인데…….”
성직자 의원들과 귀족 연합에게 매수된 평민 의원들 사이에서 연못에 바위를 던진 듯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훗.”
그 웃음을 보며, 코넬은 지금껏 그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거물급 궁정 귀족이 그녀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걸 보았다.
궁정 귀족은 백금 링에 노란 보석이 박힌 반지를 차고 있었다.
코넬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저쪽도 청탁을 받았다고…… 그럼 왜?’
도대체 발렌시아누스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
“아니. 왜 다들 대공 전하가 이걸 반대하시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별궁, 루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헤실헤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멈추려고 노력하면서.
“광명교회에서 침식 관련 실험과 연구들을 관리해주고,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성기사도 보내 주고, 처음부터 공방에 사제 한 명쯤 상주하게 해서 문제가 생길 여지조차 없게 관리해주겠다는 거잖아요? 물론 세레라지에 전하는 싫어하실지도 모르지만요.”
그녀는 텐티아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가 사 준 차였다.
“그렇게…… 되는 건가?”
텐티아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붉은 눈이 좌우 다른 방향으로 요동쳤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끝내 납득했다.
“하긴. 이걸 황실이 하려고 했다고 생각해보면 도저히 무리군.”
“맞아요. 제국이 좀 넓어요? 전하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행정력이 딸려서 직할령을 늘리지도 못하고, 있는 총독령도 찢어서 귀족들에게 나눠주고 있다고. 하물며 전 대륙적 감시 체제를 만드는 건 황실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루디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을 이었다.
“이건 돈도 많이 들고, 인력도 많이 들고, 자치권 침범이라면서 대영주들이 죄다 들고일어날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교회에서 법까지 만들어가면서 공짜로 해주겠다는데, 자기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 거라고 하셨어요”
텐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소년을 지키는 데 그리 열중하지 않으셨군. 저들이 침식자의 존재를 핑계 삼아 법안을 밀어붙이게 해야 하니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에 불안감과 의문이 어렸다.
사흘 전 발렌시아누스는 귀족 연합의 숙영지로 들어갔고,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전하! 이 텐티아가 그 독사들의 틈바구니에서 구해 드리겠습니다.’
텐티아는 당장 동문으로 뛰쳐나가 발렌시아누스를 구해올 생각이었고, 루디는 그녀를 말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교회는 결국 민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온 수도의 신민들이 전하의 화형을 바라는데, 교회가 망설이겠나?”
검술만큼이나 날카로운 판단력이었다.
신실한 신도인 텐티아이기에 포착할 수 있던 지점이었다.
“화형이 아니라 평생 봉쇄수도원 감금 정도로 합의를 볼 수도 있겠지. 그렇게 하면 교회는 폐하께 빚을 지울 수도 있다. 전하를 살려주었으니까.”
루디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기사님. 발렌 님이 궁정 귀족들을 움직이고, 거기에다가 성직자들 표랑 총독령 의원들 표를 더하면 300표죠.”
“그렇지.”
“성직자 의원들은 어차피 동의할 거예요. 즉, 이건 마커스 후작이 매수한 평민 의원들과 발렌 님이 청탁한 궁정 귀족들 의원들 사이의 대결 아닌 대결이에요.”
루디가 굳이 대결 아닌 대결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었다.
“양쪽 다 찬성했는데, 교회가 왜 마커스의 말을 들어줘야 할까요?”
“!”
“평민 의원들의 찬성은 궁정 귀족들이 반대할 때 의미가 생겨요. 만장일치에서는 누가 왜 찬성했든 아무 의미도 없잖아요. 교회는 마커스에게 받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텐티아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돌이표군. 결국 여론은…….”
늠름한 얼굴에 죽음을 각오한 기사의 결의가 어렸다.
루디는 고개를 저으며 텐티아의 잔에 차를 다시 따랐다.
그녀의 손이 떨리는 걸 보며, 텐티아는 루디 역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 상냥한 얼굴과 녹색 눈동자에는, 살아서 섬기는 시녀의 긍지가 어려 있었다.
“내가 죽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텐티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
“발렌 님은 이제 열여덟 살이세요. 봉쇄수도원에 오 년 정도 있다가 나와도 스물세 살이시죠. 기사님도 아시잖아요. 결투를 너무 많이 해서 적이 많은 방랑 기사가 일부러 작은 불경을 저지르고, 반성한답시고 한 삼 년쯤 수도원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거.”
“그럼.”
“사람들의 분노는 쉽게 식고 휘발된다고 하셨어요. 계속 분노하는 건 계속 기뻐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라고요. 물론 발렌 님을 미칠 듯 미워하는 사람도 많으리라고 하셨어요.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도요.”
텐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죽이고’, 호위 기사로서 절대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게 다 상관없다고도 하셨어요.”
텐티아가 헛숨을 내쉬고, 루디는 말을 이었다.
“죄다 거리로 뛰쳐나와서, 나를 죽일 수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그렇게 황궁 담을 넘다가 결국 죄다 목이 베이는…… 그런 상황만 안 일어나면 돼. 마음껏 죽이고 싶어 하라고 해. 아무리 내가 망나니라고 해도 생각만으로 죄를 묻지는 않으니까.”
말하는 루디의 얼굴에 오만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텐티아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언제 들은 거지?”
“침식자 잡으려고 나간 날 아침이요.”
* * *
나는 마커스와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본래 차보다는 포도주를 즐겼지만, 오늘은 차향이 달았다.
“마커스 후작. 그대의 전략은 내가 폐하께 울며불며 살고 싶다고 매달릴 때 설립되는 거였어.”
1년 반 전, 회귀한 그 순간부터, 내가 사랑받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수도 제일의 망나니 발렌시아누스, 본래라면 제이릴리스보다 계승 서열도 앞서는 황형이니까.
“좋은 전략이었다고 생각해. 나는 위로는 폐하, 아래로 신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니까. 내가 신민들을 조금이라도 신경 썼으면 이렇게는 못 나오지.”
그래도 세레라지에가 있으니 신민들의 불만이 황실 전체를 향하지는 않는다.
이참에 몇 년 정도 수도원에서 수련하며 살아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목숨만 건질 수 있으면 남는 거래라고 생각했어. 그 애는 수백 년을 사는 소드 마스터고,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잊지 않거든.”
이번 충성맹세가 앞으로 수백 년을 좌우한다.
“이깟 조리돌림 몇 번으로, 세계 최강의 검객 겸 마법사이자 세계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야.”
이 정도는 희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많은 무리수를 두었다.
사람들을 쫓아내고, 몰아내고, 통제했고, 진짜 침식자의 존재도 숨겼다.
그 탓에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망나니 발렌시아누스를 죽여라!’
‘침식자 발렌시아누스를 죽여라!’
나를 원망하는 목소리는 모두 들었다.
그 목소리에서는 내가 침식자였으니, 이제 곧 처형당하리라는 기쁨이 생생히 느껴졌다.
내 목적을 위해 남의 가슴에 칼을 꽂고 불을 질렀으니 그 정도 미움은 받아 마땅했다.
유유히 웃으며 찻잔을 거세게 내려놓았다.
파삭.
값비싼 도자기 찻잔이 부서지고, 마커스의 얼굴에 파편이 튀었다.
“자. 법은 만들어졌고, 의회는 무력화되었지. 상아탑은 처음부터 침묵했고, 교회 역시 목표를 이뤘어. 이제 남은 건 너희 귀족 연합뿐이야. 아니. ‘너희’라고 하기에도 뭣하지.”
진정시킬 때는 말을 정확하게, 화를 돋울 때는 말을 아주 정확하게 해야 한다.
“카리오사는 중간에서 기회를 보고 있었고, 세베릭은 너희가 정치적으로 묶어둔 것뿐이지. 같잖은 놈들에게 놀아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거야. 축하해. 북부 대공과 척지게 되었네. 이제 소드 마스터 둘이 적이야.”
마커스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유쾌하니 웃었다.
온 세상을 가진 듯 웃었다.
“너희도 진짜로 군대를 움직일 생각은 없었겠지. 하지만 군대를 움직일 수도 있다! 는 분위기로 우리를 압박했어. 그 카드는 이제 못 쓰게 된 거 같아. 그러니-.”
그때 마커스가 내 말을 끊었다.
“일을 벌이다 보면 가끔 내 손아귀 밖으로 벗어날 때가 있죠. 입장이 일치해서 손을 잡았는데, 한쪽이 먼저 뜻을 이루고 빠져 버리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아주 짜증 나는 상황이다.
“원래는 상대의 보복이 두려워 한번 손을 잡은 이상 같이 가게 되지만…… 그 상대가 애초에 보복할 마음이 없었으니 말이죠. 이걸……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다시 마커스의 말을 끊었다.
“망했지.”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마커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방법이 세 가지 정도 남은 거 같습니다.”
나는 연극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세 가지나?”
“일단 영지로 도망칠 수도 있죠. 비공정이 있잖습니까? 간신히 충성맹세를 받고 제국이 안정되어 가는데, 바로 대규모 원정군을 꾸려 제 영지까지 오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나쁘지 않네. 두 번째는?”
“폐하 앞에 엎드려서 살려만 달라고 비는 겁니다.”
나는 슬그머니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 세 번째는?”
마커스가 그걸 눈치챈 듯 의안을 빛냈다.
“아직은 신민들의 분노가 멸족을 각오하고 전하를 찢어 죽일 만큼 극에 달해 있는 듯합니다.”
“아.”
그가 서늘하게 웃으며 에스토크 자루에 손을 얹었다.
“지금 널 반죽음으로 만들어서 신민들 사이에 던지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황제에게 선제공격권을 받는 건 어떨까 싶어.”
나는 동공을 세로로 바꿔 뜨며 물었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마커스가 답했다.
“확인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