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철혈당주 마커스의 손이 허리춤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묘하게 색이 다른 검은 눈동자가, 외안 안경 너머에서 사악하게 번뜩였다.
나도 검을 뽑으려 했지만, 내 허리춤에는 흑루가 보이지 않았다.
“!”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드 엑스퍼트를 포로로 잡았을 때 무장을 남겨주는 건 멍청한 짓이며, 마커스는 미친놈이었지만 멍청한 놈은 아니었으니까.
“검도 없으면서!”
마커스가 승리감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흡!”
나는 다급하게 일어서는 동시에 테이블을 힘껏 밀어붙였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밀리고, 마커스의 에스토크 자루가 테이블 아래 걸렸으며, 막 일어나려던 마커스가 몸을 뒤로 젖히다 균형을 잃고 허둥거렸다.
“너!”
마커스가 겨우 균형을 되찾았을 때, 난 이미 일어나서 중심을 잡고 주먹을 말아 쥔 다음이었다.
“검이 없어도 나는 전사다! 너 같은 책상 앞 전사와는 달라!”
난 도발적인 말을 내뱉은 다음, 테이블을 가로질러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지금껏 수천만 번 반복해온 깔끔한 지르기였다.
퍽!
하얀 소매가 그림 같은 궤적을 그렸고, 둔탁한 소리가 막사 안에 울리고, 마커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놈이 쓰고 있던 멋들어진 탑햇이 바닥을 굴렀다.
“큭!”
원래라면 지금 놈 위에 올라타서 얼굴을 내리찍어야 했지만, 지금 나와 놈 사이에는 테이블이 있었다.
지금 난 검도 없고, 놈은 아마도 마법검일 에스토크와 주술 회로가 새겨진 기계 팔, 사점 안경 같은 다양한 기능이 달린 의안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빨리 끝내지 못하면 정말로 난자된 다음 거리에 던져질 게 분명했다.
난 테이블을 훌쩍 뛰어넘으며 다리를 한껏 쳐들었다.
“두 번째 방법을 택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아아아-.
동시에 마나를 끌어올려 본격적인 무위를 떨칠 준비를 했다.
지하수로에서 폭발을 제어하며 많은 힘을 소모했지만, 사흘이나 쉬었으니 거의 대부분 회복되었다.
마나가 체내의 근섬유를 강철 케이블처럼 강인하고 은제 목걸이처럼 섬세하게 감싸며 보조했다.
난 마커스의 배를 발뒤꿈치로 내리찍으려 했다.
성공한다면 일격에 놈을 무력화시킬 자신이 있는 일격이었다.
하늘을 보고 넘어져 있던 마커스가 의안을 번뜩이며 다급하게 옆으로 굴렀다.
쾅!
막사 기둥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일고, 내 발꿈치가 막사 아래 흙을 깊숙하게 파고 들어갔다.
“테이블을 밀어붙여서 균형을 잃게 하고 주먹을 날리는 놈은 처음 본 것 같네.”
막사 안에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고, 마커스가 짐승처럼 몸을 낮추며 일어서며 말했다.
당장이라고 위력적인 찌르기를 날릴 수 있는 자세였다.
나는 고압적으로 턱을 쳐들며 오만하게 답했다.
“앞으로는 많이 보게 될 거다.”
색이 미묘하게 다른 의안이 한없이 내려다보였다.
마커스가 이를 아득 갈더니, 고개를 슬쩍 저었다.
“아니.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조금 느릿하게 보였다.
마커스의 손이 수수한 제복 사이 검집으로 다시 한번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르릉!
송곳 같은 검이 뽑혀 나오고, 그의 의안이 붉게 발광하는 동시에, 그의 검에 새겨진 주술 회로도 똑같이 붉게 발광했다.
아마도 견고함, 예리함, 등의 주문을 새겨놓았을 에스토크가 나를 겨누었다.
놈이 ‘죽어’ 하고 입을 벙긋거리는 게 아득하게 보였다.
타악!
놈이 괘종시계 시곗바늘이 돌아가듯 단숨에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하.”
난 용언의 기운을 단숨에 끌어 올렸다.
단단한 암적색 비늘이 몸을 감싸는 감각, 눈동자가 세로로 바뀌는 감각, 두피를 뚫고 뿔이 자라나는 감각이 선명했다.
제복 소매 아래 손등이 비늘무늬 건틀릿을 낀 듯 보였고, 에스토크가 내 어깨를 향해 날아들 무렵, 나는 그대로 마커스의 가슴팍을 찍어누르듯 밀어 찼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놈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쾅!
다시 한번 폭음이 일었다.
숙영지 한가운데일 텐데, 누구 하나 달려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폭음이었다.
“으으윽!”
마커스가 그대로 막사 바닥을 굴렀다.
아래로 내리찍는 각도로 차서 막사 밖으로 튕겨 나가지는 않았지만, 바닥이 깊게 파여 있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어 주었다.
“왜. 신기해?”
* * *
철혈당주의 검은 눈동자가 폭풍 앞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발렌시아누스가 이렇게 강한 전사라는 말은 못 들어 봤는데.”
“옆에 보이는 비교 대상이 텐티아 경하고 황제 폐하라 그럴 거야.”
발렌시아누스의 노란 눈동자에는 웃음기까지 어려 있었다.
그가 붉은 입술을 뱀처럼 놀려 말했다.
“널 보면 누나가 생각나.”
“누나?”
“세레라지에 누나. 기본적으로 자연에 이해가 깊은 천재 마법사고, 위력적인 주문과 마도구, 기계를 만들었고, 탐나는 사람들이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 같은데.”
“맞아.”
그는 선선히 인정했고, 말을 이었다.
“대단한 걸 만드는 사람들이지만, 싸움꾼은 아니거든. 기사는 전사의 상위호환이지만, 마법사와 전사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지. 너도 마찬가지야. 마커스.”
철혈당주는 황형을 올려다보았다.
새삼 거대한 그림자가 하얀 정장 차림으로 그를 덮었다.
“네가 만든 무기를 병사들에게 들리고, 네가 만든 갑옷을 병사들에게 입히면 최고의 군대가 탄생하지, 아니. 탄생하겠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강한 전사는 아니잖아?”
발렌시아누스의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자연스러운 자세를 보아하니 뼈와 힘줄은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 몸을 찌르는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몸 안에 주술 회로 새겨진 갑옷이라도 두른 것 같아요. 아. 그래요. 용찬 의식을 했다고 하니 비늘이겠군요.’
“난 달라. 매일같이 최고의 기사와 대련하며 굴렀고, 영약이라는 영약은 다 처먹었거든. 검이 없이도 너는 날 못 이겨.”
‘그 정도는 어찌어찌해 볼 만 합니다.’
“널 인질로 잡으면 여기를 무사히 나갈 수 있겠지?”
발렌시아누스가 가학적으로 웃으며 비늘 돋친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마커스의 얼굴에 잠시 떠올랐던 좌절감은 이미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그의 본성은 텐티아보다 발렌시아누스에 가까웠고,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1대 1로 싸우는 걸 영광보다는 고생으로 여겼다.
파지지직!
그의 왼손에 노란 전격이 번뜩였고, 살색 껍질이 검게 타올랐다.
“그래요. 분명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최고급 마도 의수가 드러나고, 마커스가 일권을 내질렀다.
발렌시아누스는 이미 승리했다는 듯 웃으며 비늘 두른 주먹으로 맞받아쳤다.
한쪽은 경험으로, 한쪽은 기술로 쌓아 올린 정확도의 합은 어마어마했고, 황족과 대귀족의 주먹은 정확히 한 점에서 마주쳤다.
쩍!
파지지직!
악랄하리만큼 강력한 전류가 발렌시아누스의 비늘 사이를 내달렸지만, 망나니 대공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반면 의수의 손가락 관절은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렀고, 톱니바퀴와 체인이 흔들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마커스가 필요했던 건 그 찰나의 시간이었다.
“하, 하하하하!”
그는 에스토크를 막사 천장으로 내질렀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신호임을 알아보았고, 다음 순간 충격에 대비했다.
휙!
막사 사방의 천이 단숨에 걷혀 올라가고, 거구의 기계 기사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이이잉, 치익, 차르르르.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판금 사이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체인이 회전했다.
시야 확장 마법과 조준 마법이 새겨진 투구를 눌러 쓴 그 모습은 인간보다는 최고급 강철 골렘에 가까워 보였다.
“처음부터 다 보고 있던 건가?”
“그럼 제가 대공 같은 괴물이랑 진짜로 단둘이 있을 줄 알았습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쓰게 웃었고, 마커스는 바닥에 떨어진 탑햇을 탁탁 털어 다시 썼다.
그는 에스토크를 한쪽으로 늘어트리고,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방긋 웃었다.
“대공 말이 맞습니다. 전 전사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학자고, 명백한 귀족이죠.”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은 너무나 세련되어 보였다.
“그래도 쓸데없는 자존심이 불을 붙여서 한번 칼춤 춰 봤는데, 이거 만만하지는 않네요.”
발렌시아누스는 중지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마도 공학으로 덤볐으면, 네 기분이 딱 지금 내 기분일 거다. 어딜 감히.”
“그래요. 어딜 감히.”
마커스가 말을 이었다.
“귀족은 발로 뛰는 사람이 아니라 인재를 찾아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이런 건 전문가들에게 맡기겠어요.”
진짜 눈동자가 의안보다 무심하게 빛났다.
“반 죽여서 수도 안에 던져요. 아니다. 혹시 이겨내고 어디로 숨을 수도 있겠군요. 으음.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죽이세요. 그리고 시체만 시민들에게 던져주면, 그들이 알아서 짓뭉개 놓을 겁니다.”
거구의 기사들이 발렌시아누스를 내려다보았다.
망나니 대공은 차마 기억하는 것도 불경스러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용언의 불길을 끌어 올렸다.
쾅!
동시에 네 기계 기사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 * *
‘텐티아 경 네 명하고 싸우는 기분이군.’
발렌시아누스는 죽을 것 같은 기분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네 기사는 일신의 검술과 갑옷에 새겨진 마법을 자유롭게 다루며 발렌시아누스를 몰아붙였다.
‘빈틈.’
발렌시아누스는 땅을 박차며 첫 번째 기사 뒤에 선 마커스를 향해 돌진했다.
치이이잉!
두 번째 기사가 허리를 크게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사악!
전류를 두른 날 선 장검이 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는 용언의 불길을 한껏 끌어모으며 첫 번째 기사의 가슴팍에 장저를 내질렀다.
쾅!
거센 불길이 일고, 막사가 반쯤 불타올랐지만, 첫 번째 기계 기사는 단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아.”
발렌시아누스는 어울리지 않게 억울한 눈빛으로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준수한 얼굴에 일순 낭패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술 회로, 마법 회로 등을 이용한 부여 마법이 활성화되며 마법사들은 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마법은 여전히 마법이었지만, 기사들의 갑옷은 마법 갑옷이 되었으니까.
발렌시아누스에게 검이 있었다면 그 불길을 한 점으로 모아 검기와 함께 내지를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는 맨손이었다.
치이이익!
첫 번째 기사가 증기를 뿜으며 검을 내리쳤다.
동시에 두 번째 기사가 발을 구르며 다리 쪽 갑옷에 새겨진 ‘수렁늪’ 주문을 발동시켰다.
질퍽!
일순 발렌시아누스의 발이 묶이고,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양손을 교차했다.
“세상!”
전류 흐르는 대검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쾅!
대검을 받아낸 발렌시아누스가 무릎까지 땅에 파묻혔다.
하지만 그의 팔과 눈빛은 꺾이지 않았고, 되려 불길을 모아 기계 기사의 갑옷 틈으로 밀어 넣으며 반격하려고까지 했다.
마커스는 그 모습을 보며 손뼉을 쳤다.
“생긴 건 세련된 도련님 같은데, 싸우는 방법은 거친 용병처럼 대담하군요. 대공.”
“언젠가 네놈은 뇌수를 빨아 먹히고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대공. 슬슬 궁금해졌어요. 제게 선제공격권을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
발렌시아누스의 눈빛이 흔들리고, 마커스는 손을 들어 기계 기사들을 잠시 멈추게 했다.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어. 알잖아. 이 세상은 이대로라면 무너져. 마경이 점점 더 많이 열리고 있다고. 언제 수도에 이물과 옛것이 기어 나올지 모른다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마커스의 목소리에 열기가 어렸다.
“우리가 나서서 저 우매한 신민들을 이끌어야 해. 발전된 기술과 뛰어난 기사들, 현명한 마법사들을 데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 외의 나라가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지? 내가 그 돈으로 내 배나 불리겠다는 게 아니잖아?”
발렌시아누스는 눈을 지긋하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으로 아버지랑 남편이랑 아들을 죄다 잃은 유족들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옛것들에게 몸을 던지겠지. 침식자를 더 만들 생각이라고 알아듣겠어.”
“실망인데.”
“네 말대로야. 저들을 이끄는 게 우리의 일이지. 그러니 저들이 여전히 우매하다는 건, 우리의 부족함을 자백하는 것이기도 해.”
“!”
마커스가 일순 입술을 깨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숙영지 바깥쪽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슬슬 시작이네.’
아득한 함성과 혼란은 그의 벗이었다.
마커스가 고개를 돌리려 했고, 발렌시아누스는 재차 불길을 일으키며 시선을 끌어왔다.
“사생아 주제에 귀족다움을 논하는 것도 웃기고 말이야.”
말로 된 불길을 얻어맞은 마커스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
“끝까지 가 보자. 물론 네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