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철혈당주 마커스는 본래 직계 대귀족이 아니었다.
전대 인스트로멘튬 후작은 친한 동생이 있었고, 그는 그 동생이 노예와 만든 사생아였다.
어린 나이에 마법을 부려 아버지의 눈에 들었고, 저택에서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언제나 반푼이 취급을 받아왔다.
“쟤는 귀족 아니래.”
“그래서 눈동자도 그냥 검은색이고 귀도 안 긴 거야?”
“소드 엑스퍼트까지는 못 오를 거라는데…… 그럼 기사도 못 되는 거잖아.”
“야. 사생아.”
“……네. 아가씨.”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 죽었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했다.
아니,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다.
“오늘은 별일이 없었느냐?”
“예. 좋은 하루였습니다.”
‘멍든 거 다 보이시면서.’
내치지는 못했지만 감싸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순혈 인간인 어머니를 둔 마커스는 이종족 피가 진하게 섞인 친척 또래들과 비교해 인간에 가까웠기에, 그 틈바구니에서 나름 적응할 수 있었다.
“야. 사생아.”
“예. 아가씨.”
“……그 나 마법 좀 가르쳐 줘. 너 잘하잖아.”
“이걸 왜 못……, 아니. 알겠습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요. 아가씨.”
“뭐.”
“천한 사생아 따위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이복동생 마커스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으십니까?”
“어, 어?”
“…….”
“…….”
그는 타고난 머리와 마법의 재능, 단정한 외모와 빼어난 언변을 무기 삼아 그럭저럭 이복 남매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13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인스트로멘툼 후작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반역이다!”
“도련님들을 지켜라!”
“꺄아아악!”
그 과정에서 본가 직계들은 완전히 박살 났고, 부랴부랴 올라온 봉신, 방계들이 본 건 사생아 꼬맹이뿐이었다.
“저런 것에게 충성을 바칠 순 없지요.”
“일단 어디 넣어 놉시다.”
“계승서열은 저놈이 앞서기는 하지만.”
“누가 그걸 인정하겠습니까?”
“…….”
마커스는 한 방에 감금되었고.
“결국 힘이 있어야 하네요.”
은식기를 녹여 만든 은 철사와 커튼 봉 파이프로 고대 마총을 재현했다.
“사, 살려다오.”
“말이 짧다.”
“살려 주십시오!”
“싫은데?”
그리고 그를 비웃던 자들을 모두 쏴 죽였다.
“이제 뭘 하고 살아야 할까요?”
유일하게 남은 가신은 머리 숙여 간언했다.
“각하께서 할 수 있는 걸 하십시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찌어찌 녹아들었던 가족을 잃었다.
내심 믿고 있던 봉신들과 방계들도 없다.
대가문 인스트로멘툼은 오로지 그의 것이 되었다.
마커스의 나이 14살이었다.
* * *
“할 수 있으면 하는 겁니다. 그래요.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겁니다.”
네 명의 기계 기사가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쾅!
철판과 기계장치로 뒤덮인 육중한 몸이 마탄의 탄환처럼 쏘아져 나갔다.
기사는 앞으로 올곧게 검을 겨누고 있었고, 그 검에는 마나 블레이드와 전류, ‘칼바람’ 주문이 고루고루 어려 있었다.
발렌시아누스의 전설을 일격에 끝장내버리기 충분한 일격이었다.
“이런 젠장!”
그는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스텝을 밟으며 첫 번째 기계 기사의 돌진을 피했다.
촤악!
그러나 두 번째 기계 기사가 정확히 그 위치를 향해 ‘전격 그물’을 던질 줄은 몰랐다.
반쯤 무너진 막사 하늘을 격자무늬가 덮었다.
끼이이익!
그리고 세 번째 기사가 땅을 박차며 돌진했다.
첫 번째 기사와 마찬가지로 앞에 검을 겨누고 온갖 마법을 덕지덕지 붙인 거대한 일격이었다.
일순 발렌시아누스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딴 곳에서 죽을 수는 없지!’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는 건 마커스만의 말은 아니었다.
그는 세로로 찢어진 용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제국 검술을 발동시켰다.
제국 검술은 그 이름과 달리 검술과 잘 어울리는 마나 제어법에 가까웠다.
물론 검이 있어야 진가를 발휘했지만, 그 정도 되는 검객이라면 검 없이도 검이 있을 때처럼 마나를 움직일 수 있었다.
“윽!”
본래라면 마나 블레이드가 되어야 했을 마나가 손끝에서 꼬이며 충돌했고, 발렌시아누스의 손톱 아래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제국 검술을 발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제국 검술 4단계, 손해자타.
제국 검술 5단계, 아사.
부하를 무릅쓰는 각성과 의식 강화가 동시에 발현되고, 일순 발렌시아누스의 동공이 팽창했다.
쐐애액!
세 번째 기계 기사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칼바람과 전류와 마나 블레이드가 얽힌 칼날이 한없이 서늘했다.
타앗, 발렌시아누스는 되려 기계 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그 두툼한 손목을 잡아채고, 그 강인한 발목을 걸고, 몸을 돌리는 동시에 한껏 허리를 숙였다.
40년간 갈고 닦은 소드 레슬링은 아사와 결합되었을 때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했다.
쾅!
키가 2m를 훌쩍 넘고 체중이 수백 kg에 달하는 기계 기사가 빙그르르 돌아 바닥에 엎어졌다.
발렌시아누스는 그의 흉갑을 짓밟으며 검을 빼앗아 들었다.
“윽!”
장검인 흑루보다도 세 뼘 이상이 길고 무게는 세 배에 달했지만, 일단 검은 검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마나 블레이드를 만들며 베어 올렸다.
사악!
그의 머리에 닿기 직전이었던 전류 그물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하아, 하아.”
발렌시아누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관자놀이에서 흘린 피로 그 찬란한 백금발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고혹적인 얼굴에는 다시 잔혹한 여유가 떠올라 있었다.
마커스는 그의 발밑에 깔린 기계 기사를 서늘하게 응시했고, 기사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강철 주먹을 내질렀다.
발렌시아누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정확히 팔꿈치 관절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마나 블레이드와 용언의 불길이 그 검격에 짙게 어려 있었다.
으직!
일격에 톱니바퀴가 갈라지고 증기가 새어 나왔으며 체인이 끊어졌다.
“아악”
기계 기사가 투구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갑옷 사이로 붉은 피가 흘렀다.
“이제야.”
발렌시아누스가 흐뭇하니 웃고, 마커스가 이를 악물었다.
남은 세 기계 기사가 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강철 주먹에 마법을 둘렀다.
* * *
“과감하다는 평은 취소해야겠습니다.”
“그러든가 말든가.”
마커스가 이를 악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어김없이 중지를 펴 보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욕설은 차마 황족이 한 말이라고는 믿지 못할 만큼 천박했고, 기계 기사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발렌시아누스가 부모님과 일가족의 안부를 고루고루 물으며 검을 휘둘렀다.
“으하하하!”
마나 블레이드라고 같은 마나 블레이드가 아니었다.
그는 40년간 제국 검술을 수련한 검객이었고, 마나의 양을 떠나 질을 극한으로 압축할 줄 알았으며, 하물며 용찬 의식을 통해 양도 대폭 늘려 놓았다.
거기에 특유의 가학성과 잔혹성, 섬세한 검격과 재빠른 스텝이 더해지니, 거구의 기계 기사들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쩍!
첫 번째 기사의 일격이 발렌시아누스의 검을 후려쳤다.
본래라면 검을 부수고 그 검을 쥔 사람까지 베어버렸어야 했으나, 망나니 대공은 너무나 손쉽게 그 검격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히.”
그리고 검을 빙그르르 돌려 다시 앞으로 겨두더니, 정확히 겨드랑이를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첫 번째 기계 기사는 몸을 비틀며 검격을 흘려내려 했다.
발렌시아누스의 검이 자신들의 철판을 가르는 걸 본 탓이었다.
스윽.
그러나 이번에 그의 검은 아무런 힘도 없이 첫 번째 기사의 철판을 타고 흘러나갔다.
“어?”
‘당했다.’
발렌시아누스가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몸을 숙이며 첫 번째 기사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두 번째 기사의 일권과 네 번째 기사의 검격이 작렬했다.
“뭐 하는 거야?”
“못 빠져나가게 막아줬어야지!”
“아니, 그게. 젠장!”
첫 번째 기사는 망나니 대공에게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저 비인간적인 웃음은 허세가 아니라 실력이었다.
‘협공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어렵다. 서로 방해되지 않게 검격을 펼치려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야 해.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호흡을 맞춰 왔다. 저놈은 그걸 단숨에 일그러트렸어.’
엇박자 스텝, 화려하고도 섬세한 검술, 때로는 위력적이고 때로는 허약한 검격, 시야를 가리고 몸을 달구는 불길.
그 모든 게 발렌시아누스의 계산 아래서 이뤄졌다.
“안 되겠습니다.”
마커스가 에스토크에 보라색 마나 블레이드를 두르며 합류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생아 하나 더 끼어든다고 뭐가 바뀌겠어?”
그러나 그는 내심 탄식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파괴술이다. 저걸 마도구로 만들 정도면 진짜 대단한 건데.’
파괴술은 순수한 힘을 다루는 마법의 한 갈래로, 염동력을 기반으로 역장이나 힘의 창 등의 주문을 다뤘다.
제이릴리스가 좋아하는 마법인 진노의 창도 파괴술 주문이었다.
사악!
마커스가 허공에 에스토크를 내질렀고, 거대한 찌르기가 보랏빛으로 일렁이며 뿜어져 나왔다.
발렌시아누스는 한껏 긴장하며 대검을 내리쳐 보랏빛 기운을 베어냈다.
“젠장!”
쾅!
나름 강하게 내리쳤지만, 보랏빛 기운은 그대로 발렌시아누스의 몸을 파고들었다.
“!”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눈과 코에서 동시에 피가 터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파괴술은 마나 소모가 심한 만큼 극강한 위력을 자랑했고, 그만큼 막기도 힘들었다.
온몸에 갑옷처럼 두른 비늘이 죄다 뽑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몰아붙이십시오!”
다시 기계 기사들이 검을 들었고, 처음 쓰러졌던 기사도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으로 싸움을 보조했다.
발렌시아누스가 스텝을 밟아 공격을 피하려 할 때마다 마커스의 찌르기가 작렬했다.
“윽!”
“하하하하!”
그때 한 시종이 달려와 마커스에게 외쳤다.
“각하! 급보입니다!”
마커스는 그 단정한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외쳤다.
“지금 상황이 안 보이는 겁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데 왜 아무도 안 오는 겁니까? 긴장한 것 티 안 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압니까?”
“그런 거였…… 으아악!”
발렌시아누스가 중간에 비명을 질렀지만 시종은 무시하고 보고를 올렸다.
“대영주들이 회군하고 있습니다. 일단 어찌어찌 붙들어놓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
마커스가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기계 기사들의 검을 피하면서도 광소했다.
“넌 이판사판이지만, 쟤들은 아니거든.”
“발렌시아누스!”
“너만 절박했어. 교회와 협상할 때도, 대영주들과 협상할 때도. 윈-윈이라고 생각했을 거고, 객관적으로도 그랬지만, 넌 네가 이득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잖아. 그걸 다른 영주들이 모를 것 같았어?”
* * *
아름다운 검은 머리에 흑철관을 쓴 중부 외곽의 대영주, 그레이스 키멜리온 그레모리우스는 담담하게 명령했다.
“황금기사단을 회군시키세요.”
그녀의 충실한 부관은 명령을 받들었고, 전서구를 받은 베너렛 나이트는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레이스는 푹신한 의자에 등을 묻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쌍둥이에게, 그 간악하고 비인간적인 쌍둥이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모든 걸 걸 수는 없었다.
그녀는 20만 시민과 수백만 영민을 다스리는 대영주였고, 먹여 살리고, 자식들을 가르치고, 짝을 찾아줘야 할 가신들이 있었다.
복수심 따위에 그들을 죄다 태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되면 좋을 일과, 실제로 될 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연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한기가 감도는 하늘색 눈동자를 시원하게 빛내는 서부의 대영주, 시그나인 엘제누스 프로이하이트는 영악하게 웃으며 명령했다.
“황금기사단 따라서 돌아오라고 명령하세요. 선두에서 길 뚫지는 말고, 치열하게 싸우기도 마요. 우리가 먼저 빠져나갔다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녀는 강자와 싸우기보다 친해지는 걸 미덕이라 여겼고, 지금 수도에는 강자가 우글우글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고의 강자는 제이릴리스였다.
그리고 시그나인이 보기에 그 나른한 반신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은 발렌시아누스였다.
‘당연히 그쪽이랑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유혹할 생각이었는데, 카리오사가 너무 강하네요. 물론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요!’
물론 중간에서 간을 보지 않고 있던 영주들도 있었다.
남서부 영주들이 데려온 공포새 경장 기병들과 인스트로멘튬의 기계 기사들이 회군하는 병력을 막아섰다.
그때 동부의 상어 떼가 그들의 옆구리를 물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