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성벽 밖에서 불과 철과 피가 튀든 말든 성벽 안은 평화롭고 고요했다.
그 고요는 창칼로 만들어낸 고요였다.
대영주들과 그 가신들이 기사들을 날개처럼 거느리고 수도를 쏘다니는 판에 집 밖으로 나오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동부에서 올라온 상어 떼는 겁먹은 시민뿐만 아니라 다른 대영주들까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숙영지 안에 커다란 나무통을 가져다 놓고, 찬물에 소금을 탄 뒤 해수욕을 즐겼다.
물론 대영주인 카리오사까지 그런 방식으로 더위를 피할 필요는 없었다.
몇 그루 되지 않는 가로수로는 태양을 가릴 수 없었지만, 고급 천막과 막사는 불길도 막아낼 수 있었다.
카리오사 정도 되는 대귀족이라면 마법사 한 명을 데려다 놓고 주변 온도, 습도 관리에만 써도 누구 하나 사치라 말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카리오사는 밤낮으로 거친 해풍을 맞고 부하들과 함께 심해에서 올라온 어인족을 회 쳐 먹으며 살아온 전사였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하얀 셔츠 한 벌만 입고, 비늘처럼 반짝이는 피부와 뾰족한 이빨, 세로로 찢어진 검은 동공을 드러내며, 부하들 옆에 나무통을 가져다 놓고 해수욕을 즐겼다.
“각, 아니. 전하. 이 정도로 만족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 기사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카리오사가 눈썹을 치켜세웠고, 주변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거나 몸을 턱 아래까지 물에 담갔다.
카리오사가 피식 웃으며 통 가장자리에 목덜미를 기댔다.
따사로운 햇살에 닿자 물에 젖은 물색 머리와 상어 비늘 같은 피부가 반짝반짝 빛났다.
“난 이미 고깃덩이 하나 물었다. 여기서 입 더 벌리다가는 이미 문 것도 놓쳐.”
“그래도 마커스 후작의 계획이 아주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잖습니까? 전하께서 가세하신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다른 기사가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카리오사는 가볍게 몸을 일으키며 평소 총애하던 기사의 간언에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그래. 그럼 대공 작위나 왕작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쟁취할 수 있는 것과 타협하지 않는 게 카리오사라는 사냥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왕작이 아니라 그 노란 눈에 붉은 입술을 가진 망나니 황형을 노리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를 통해서 뭔가를 얻겠다는 계획 자체도 나쁘지는 않았지. 하지만 그는 이미 내가 반쯤은 물고 있는 고깃덩이야.”
세 군도를 제대로 정복한 다음에는 어떤 억지를 써서라도 물고 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동방 대륙의 왕과 해적들을 제대로 도발해놓아야 했다.
그녀가 동부 바다를 안정시킬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제이릴리스가 그녀의 목을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걸 찢어서 나눠 먹자는 소리를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잘 지키면 다 내게 될 텐데, 왜 그걸 나눠 먹어?”
주변 기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기혼 기사들의 경우 약간 음흉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러실 나이시군요.”
“전하께서도 봄을 맞이하실 줄 알았습니다!”
카리오사는 뻔뻔한 웃음으로 그 도발을 받아주었고, 백상아리답게 눈을 빛냈다.
“게다가 난 마커스 피 맛도 궁금하거든.”
“아.”
“걔들이 가진 기술도 탐나. 그걸 나눠달라고 부탁하느니, 발렌시아누스랑 같이 갈기갈기 찢어서 나눠 먹는 게 낫지.”
“역시 전하이십니다.”
기사들이 연신 고개를 숙였고, 카리오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동쪽 성벽을 바라보았다.
“세베릭?”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 * *
성벽은 영주의 첫 번째 방패이자 제일 중요한 방패였고, 동맹도 아닌 가문의 귀족을 성벽에 올라가게 놔두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물며 그게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편견과 악감정, 각종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던 북부 대공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했다.
“혹시 나중에 남쪽으로 내려올 때 어떻게 뚫어야 할지 보려고 온 거 아니야?”
“야, 야. 입 다물어. 소드 마스터라고. 우리가 눈알 굴리는 소리까지 다 들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올라오면 안 된다는 말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소위님이 가십쇼. 저는 명령 불복으로 죽고 말지 소드 마스터한테 ‘안 된다’라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동쪽 성벽 위의 병사들은 세베릭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폭풍 치는 바다 같은 짙은 남색 머리와 눈보라 같은 회색 눈동자 때문이기도 했고, 걸음걸음 나아갈 때마다 발자국에 얼음 결정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그가 모든 말을 들었다는 듯 피식 웃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병사들은 오들오들 떨었고, 세베릭은 금방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동쪽 평야에 착륙한 니벨룽겐을 바라보았다.
거대수로 만든 기함만큼 거대한 비공정의 위세는 어마어마했고, 그 주변에 모여든 깃발과 군막들의 위세는 그 이상이었지만, 북부 64 백작의 충성을 받는 대귀족은 끝끝내 그들의 부담마저도 이겨냈다.
“전하.”
흑발을 단정하게 넘겨 묶은 기사, 르세나가 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 중에도 우리 북부와 많은 곡식을 거래하는 대영주들이 있습니다. 가볍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수도 시민들은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기름에 튀겨 죽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고 부추긴 건 교회입니다. 교황과 성자는 제이릴리스 치세 아래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황실을 압박할 필요가 있었고, 황형 발렌시아누스를 그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저희 북부는 이물, 침식자, 각종 마수와 싸우고 있고,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는 생계를 넘어 생존에 필수적입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이런 결정을 하십니까?”
르세나가 마지막으로 못을 박듯 물었다.
알고도 묻는 말이었다.
세베릭이 그윽한 슬픔을 담아 말했다.
“우정은 고난 속에서 보이는 법입니다. 내가 그에게 진심을 보여야, 그가 내게 진심을 보이겠지요.”
르세나는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그는 진심이 없는 인간입니다. 그에게 가치 있는 거라고는 제 목숨과 제 쌍둥이 여동생의 목숨뿐입니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라는 인간의 본질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으로 인해 한 인간을 자신만의 절대자로 삼고, 그의 곁에서 지극한 충성을 바치며, 신뢰라는 권력을 누리는 자.
이 세상 모든 걸 그 절대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잣대로 판단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그 잣대로 재며, 언제나 자신이 1번에 서 있어야 하는 자.
“왜 이번에도 전하가 먼저 믿으셔야 하는 겁니까? 왜 전하가 먼저 우정과 신뢰를 보내야 하는 겁니까?”
북부는 황실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곳과 거래 중이고, 대귀족 사회에서는 가는 말이 고우면 호구로 보며, 황실은 충성스러운 영주보다 땅을 더 달라고 발광하는 영주를 달래는 데 더 많은 금화를 소비했다.
“왜 전하가 배신당하고 손해 볼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겁니까?”
르세나가 물었다.
세베릭은 눈이 굳어 만들어진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태양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친구니까요.”
“멋진 말 한마디로 넘기려 하지 마십시오!”
“그대 말이 맞습니다. 르세나. 북부는 많은 지방과 교역하고 있지요. 그들에게 북부와의 교역은 이윤이 달린 문제지만, 우리에게 그들과의 교역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세베릭의 목소리에는 제국 제일의 대귀족다운 판단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 우리가 먼저 배신하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나는 믿을 겁니다. 르세나.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내 도움을 잊을 자가 아닙니다.”
함박눈처럼 포근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세베릭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며 연합의 군막을 바라보았다.
휘오오오오-.
르세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세베릭 옆에 붙었다.
“아.”
한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찬 바람이었다.
* * *
이름 높은 가문들의 깃발이 휘날리는 군막 한가운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화려한 천막이 있었다.
붉은 실로 덩굴무늬를 장식한, 멋들어진 천막이었다.
그 안에는 원탁이 있었고, 원탁에는 한 노인이 가면으로 눈을 가린 수하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수하들은 하나같이 품이 넓은 옷을 입었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천을 빙빙 둘러 양파처럼 만든 모자, 터번을 쓰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 수하들은 입술을 조금도 달싹이지 않고도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각하. 날씨가 완전히 미쳤습니다.”
“한여름에 눈발이 날려오고 있습니다.”
“북부 대공 세베릭입니다. 처리할까요?”
마지막 말은 사막 부족들의 말로, 수도 사람 중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자가 손에 꼽는 말이었다.
그리고 사막의 왕, 암살자들의 후작, 유민 민족들의 재앙, 그림자 없는 귀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대영주.
열사암후 체사르는 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 부하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얼어 죽고 싶으냐?”
“그가 아니라 그의 부관을 노려도 충분한 경고가 될 것입니다.”
한여름에 이 정도 냉기를 불러올 수 있는 건 살아 숨 쉬는 신비인 세베릭뿐이었다.
그가 대놓고 성벽 위에 서서 모습을 드러냈음은, 체사르와 마커스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귀족 연합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발렌시아누스의 목숨으로 황제와 협상하지 않겠다는 공언이었다.
“그랬다가는 소드 마스터가 우리 영지로 달려와서 모든 저수지와 지하 농장을 때려 부수는 꼴을 보게 될 거다. 발렌시아누스와 깊은 친분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군.”
열사암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판에, 그 오라비와 친구까지 적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동쪽 바다의 상어 떼가 입맛을 다시고 있구나.”
암살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 밖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아아아악!”
“카리오사가 배신했다!”
“그레모리우스의 황금기사단과 프로이하이트가 군막을 이탈했습니다!”
“마총 대대 사격 준비!”
“동부의 기사들이 니벨룽겐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라!”
체사르는 주름살 자글자글한 얼굴에서 보라색 눈을 빛냈다.
“우리가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가라앉는 배에서는 쥐가 먼저 떠나는 법이니까.”
가면 쓴 암살자들이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이종족이 세상을 지배할 때부터 그 지방에서 살며, 약탈과 배신을 빵 먹듯 하는 유목 민족들과 싸워 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적과 싸운 끝에 적을 닮아버린 자들이기도 했다.
“체사르 님! 전황이-”.
마커스의 부관이 막사 앞에 드리워진 천을 박차고 들어왔다.
“!”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원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방금까지 사람들이 있던 듯 차와 다과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하!”
“아라라라라라라라라!”
약탈자들의 웃음소리 같은 소리만이 막사 안에 끝없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부관은 이를 악물며 막사 밖으로 나왔다.
“출세할 기회다! 나를 따르라!”
“절대로 선공격하지 마라. 우리는 어디까지나 대귀족간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왔다.”
“감질나는가? 나도 그렇다! 그러나 좋은 군인은 명령을 따른다!”
저 남동쪽에서 금발 적안의 황족이 중부 기사, 황실 황동기사단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레모리우스의 황금기사단과 프로이하이트의 창천기사단은 언제 옆에 있었냐는 듯 도망치고 있었다.
특히 창천기사단은 조금의 피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황금기사단 뒤를 얄밉게 따르고 있어서 부관의 속을 더더욱 부글부글 끓게 했다.
열사암후 체사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남부 백작들은 우왕좌왕했다.
공포새 경장 기병들은 도망치는 기사들을 쫓았지만 차마 먼저 공격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제일 든든하던 기사들, 왕이 되고 싶다던 후작을 섬기는 동부의 상어 떼가 마커스의 비공정 니벨룽겐을 공격했다.
부관은 서부 기사들이 동부의 기사들을 막아서고, 단 한 차례의 충돌로 돌파되는 걸 보았다.
“아.”
신이 몸소 드리워준 장막처럼 화려하던 깃발과 문장들이 불타오르고, 천군만마 같은 동맹군이 흩어지는 걸 보며, 부관은 그 모든 게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 * *
불길을 먹어 치우며 발렌시아누스는 웃었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