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04)화 (204/340)

(204)

마커스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파하라!”

“포위하라!”

“전진, 또 전진뿐이다!”

그레모리우스의 황금기사단과 프로이하이트의 창천 기사단이 도망치고, 백상아리 깃발을 든 동부의 기사들이 그의 기함을 노리고 있었으며, 황실과 중부의 기사들이 느리지만 착실하기 그들을 압박해 왔다.

‘언제부터?’

북부 대공이 성벽 위에서 싸늘한 바람을 보내오며 그를 압박했고, 저 높은 구름 위에서는 번개가 번쩍이며 그를 위협했다.

동맹은 사분오열되고 적은 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적을 불러온 건 눈앞의 망나니 대공이었다.

발렌시아누스가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관자놀이에서 흐르는 피를 향유 삼아 그 백발을 쓸어 넘기면서.

“알잖아. 마커스. 이기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위험한 법이야.”

“발렌시아누스.”

“카리오사는 이미 날 반쯤 가졌다고 생각하겠지. 그걸 나눠 먹자고 하면 발작을 일으킬 거야. 세베릭은 본인의 천성과 북부의 형세 상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버리는 모습을 도저히 보일 수 없겠지.”

“지금, 지금 날!”

“교회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모든 힘을 소진했고, 이미 법안을 통과시켰으니 이제 널 볼 일이 없어. 교회가 떨어져 나갈 걸 본 다른 대영주들도 생각하겠지. 교회도 떨어져 나갔는데 우리가 붙어 있어 봐야 뭘 주워 먹을 수 있겠냐고. 차라리 머리 숙이고 황실에 붙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발렌시아누스는 본래 기계 기사가 사용하던 거대한 검을 암적색 비늘 돋친 손으로 들고 있었다.

검은 용언의 불길과 황금색 마나 블레이드가 덧씌워져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막사는 완전히 불타올라 불똥을 날렸고, 동맹과 적들은 고함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며, 군대는 어디 가고 깃발만 나부끼는 가운데.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영주, 철혈당주 마커스는 직감했다.

“날 죽이려 하는 겁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소문의 막 나가는 황족이 아니라 황제의 처형인다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불길을 품고 번들거리는 그 눈동자에서 광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걸 봤지. 전란으로 황폐해진 영지의 신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그걸 또 진압하는 데 피와 금을 흘려야 한다는 걸 배웠어. 그런데 마커스, 넌 너무 똑똑해.”

지독한 기백을 정면에서 마주한 기계 기사들이 무의식적으로 반걸음씩 물러섰다.

“네 마총은 강력한 기사가 아니라 다수의 징집병이나 용병을 쏴 죽이기 위한 무기야. 어느 왕국을 침략하든, 그 나라의 고위층이 아니라 하층민들이 더 많은 피를 흘리겠지.”

“왜 그런지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역겹습니다.”

“그래. 알아. 애초에 침식자가 될 일도 없게 다 죽여버리려는 거 아니야?”

발렌시아누스가 무표정으로 묻고, 마커스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나름대로 침식자 창궐에 대응하기 위해 세운 대책이었습니다만, 썩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런데 언제부터 황실이 그런 자들의 목숨을 신경 쓰셨습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되려 그를 책망해오는 듯한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라도 신경 쓰려고. 결국 뿌리는 대로 거둔다는 걸 배웠거든.”

“희대의 망나니, 황형 발렌시아누스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군요.”

“하지만 제이릴리스에게는 어울릴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애의 치세는 이제 시작이니까.’

뒷말을 속으로만 삼키며, 발렌시아누스는 제 몸에 맞지 않는 검을 늘어트렸다.

“그분의 치세가 이제 막 시작하려 하는데, 선제공격을 통한 초대규모 약탈로 부를 쌓겠다고 지껄이는 대영주를 살려줄 수는 없지.”

말과 다르게 검을 늘어트리는 동작에, 기계 기사들과 마커스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입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비늘 두른 손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대영주는, 말이야.”

“발렌시아누스?”

“넌 살려 두기에도 똑똑하고, 죽이기에도 똑똑해.”

그게 발렌시아누스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온 이유였다.

마커스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나의 폐하께서도 마총이나 마갑 같은 양질의 마도구를 다루는 병단을 원하시지.”

“혓바닥이 깁니다.”

“그러니 제국의 대공으로서 제안하지.”

“그래도 들어 줄게.”

“영지를 황실에 바치고 연금 받는 궁정 귀족으로서 살아가. 황립 마도 공방에 자리 하나 내어줄 테니까.”

“!”

마커스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색이 미묘하게 다른 두 눈동자가 좌우 다르게 돌았다.

* * *

발렌시아누스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끼며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도 공학이라는 학문과 산업 자체를 선도할 수 있는 인재였다.

100년,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그런 인재를 함부로 쳐 죽이는 건 황실의 손해였다.

하지만 아무리 인재라고 해도, 언제 옆 영지를 침공하고, 언제 옆 왕국을 침공하고, 언제 제 영지를 약탈할지 모르는 광인이 대영주로 살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마커스와 대영주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영지는 발전 상태에 따라서 값을 제대로 계산해줄게. 네가 개발해놓은 광산이랑 대형 공방들은 당연히 별도로 정산받을 수 있을 거야.”

“하, 하하.”

“원한다면 승작도 시켜줄 수 있어.”

“진심입니까? 제게 제 왕국을, 고향을 팔라고요?”

“너 사생아잖아. 유서 깊은 대귀족인 척하지 마.”

주군을 두 번이나 모욕당한 기계 기사들이 발렌시아누스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과장되게 놀라는 척하며 양손을 들어 보이고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 땅에 별로 미련도 없잖아? 나라도 그럴 거 같아. 부모, 친척, 형제자매 다 죽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마음 붙이려니 힘들지 않아?”

첫 번째 기계 기사는 생각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악마의 주둥아리, 뱀의 혀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진실이라고.

“여기로 올라와. 그레모리우스랑 대규모 거래를 체결해서 질 좋은 금속이랑 광석도 많이 구해줄 수 있어. 상아탑이랑 교류도 시켜줄게. 학문과 마법에 미친, 아니. 열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재미있게 살아 보라고.”

푹,

발렌시아누스가 오른손에 쥔 검을 바닥에 꽂아버리고 왼손을 내밀었다.

“기사들은 계속 호위대로 쓰게 해줄게. 사실 기사급 전력은 한 명 한 명이 협상 대상이라고. 아, 당연히 네 조수들도 그대로일 거야.

여전히 비늘이 돋쳐 있었지만, 정중한 몸동작이었다.

기계 기사는 한순간 마커스가 그 손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영주가 강철 의수로 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스스로 그 침묵을 깼다.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지?”

에스토크에서 보랏빛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그걸 본 발렌시아누스가 인간을 유혹하는 옛것 악마처럼 웃으며 소리쳤다.

“내가 이런 소리까지 했는데, 거절하게 놔둘 것 같냐?!”

팍!

다음 순간 그의 관자놀이 쪽에서 약간 튀어나왔던 뿔이 산양의 그것처럼 길게 자라나며 한 바퀴 꼬였다.

첫 번째 기계 기사는 마커스를 감싸야 할지, 발렌시아누스에게 달려들어야 할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 찰나의 찰나 동안 발렌시아누스는 주문을 외웠다.

“피어올라 따르는 불꽃.”

귀족 연합 군막 일대에 타오르고 있던 불길 전체가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모여들었다.

화르르르륵!

불타는 지옥의 사냥개 수천 마리가 광야를 달려오는 듯했다.

기계 기사들이 이를 악물며 마커스를 감쌌다.

비늘 두른 황형이 극한으로 압축시킨 불길 속에서 웃었다.

콰직!

그가 악수하려 내밀었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황금색 용언의 기운이 불길을 인도하고, 군막 일대를 뒤덮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화르르륵!

화려한 문장과 휘날리던 깃발이 모두 뜨겁게 타올라 사그라들었다.

붉은 아지랑이가 지면을 달리고, 버섯을 닮은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 * *

“세상. 세상.”

나는 반쯤 누더기가 된 제복 소매를 뜯어내고, 새끼 고양이를 옮기듯 기절한 마커스의 제복 목덜미를 잡아끌며, 희고 검은 재 내리는 옛 군막 숙영지 일대를 걸었다.

내 몸은 불에 타지 않았지만, 내 옷은 불에 탔고, 금장 장식 녹은 금물이 몸에 달라붙은 채로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굳어갔다.

일대의 혼란은 거의 가라앉았다.

황금기사단과 창천 기사단과 동부 기사들은 모두 돌아갔고, 헬레나가 이끄는 중부 기사들은 거리를 두고 착실하게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으며, 아직도 남아 있는 마커스의 동맹군은 그 맹주가 누구 손에 붙들려 있는지 보았다.

마커스의 부관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나와 제 주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이 꼴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그의 충성심에 내심 박수를 보내며 말했다.

“니벨룽겐 안에 백발 적안의 소년이 있을 거다. 데려와.”

부관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럼 각하를 살려 주실 겁니까?”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포하려고 이 고생을 했는데, 죽일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아니, 죽이겠다는 놈이 나오면 내가 지켜줘야 할 판이었다.

마커스의 부관이 뭍으로 올라온 동부 상어 떼의 습격으로부터 끝끝내 살아남은 기특한 비공정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얼굴에 자루를 뒤집어씌우고 마도구 수갑으로 묶어놓은 소년 하나를 데리고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자루를 슬쩍 들춰 소년의 얼굴을 보았고, 소년에게서 옛것의 기운이 확실히 느껴지는지도 확인했다.

혹시 놈들이 뭔가 마법으로 손을 써 놓은 게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래. 확실하군.”

“그럼 이제-”.

부관이 내게 뭔가 받을 게 있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 눈은 내가 오른손에 든 마커스를 향해 있었다.

“들어가 보겠다.”

선수를 치자 부관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할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이십니까?”

“내가 살려주겠다고 했지, 돌려준다고 한 적은 없을 텐데?”

솔직히 개소리가 맞다.

하지만 개소리도 대공이 지껄이면 힘이 생기는 법이었다.

처음부터 오해를 유도한 건 아니다.

난 거짓말을 싫어하니까.

……아마도.

“하?”

부관이 기함하며 한 손을 들었다.

그의 등 뒤로는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군막들이 남아 있었고, 그곳에서는 충성스러운 정예병들이 일련의 사태에 이를 갈고 있었다.

척, 척, 척, 척.

그들은 하나같이 은철로 장식한 갈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안쪽에는 근육 구조를 따라 만든 마도구가 들어가 있어 착용자의 힘을 효율적으로 늘려주었다.

허리춤에는 마총을 차고 있었고, 왼손에는 기계 기사들처럼 공격 주문이 새겨진 건틀릿을, 오른손에는 마법 검을 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서른 명은 될 것 같았고, 나는 지켜야 할 짐덩이가 둘이나 있었다.

이거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런데 생각하며 이를 악물던 찰나.

퍼어엉!

하늘에서 익숙한 발포음이 들려왔다.

“발렌 님!”

“전하!”

루디? 텐티아 경?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암적색 와이번이 흩날리는 잿가루보다 높은 고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텐티아 경은 백금 투구를 눌러쓰고 붉은 리본을 휘날리며 와이번을 몰았고, 그 뒤에는 루디가 앉아 있었다.

사점 안경을 낀 녹색 눈의 그녀는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루디가 한 손으로 텐티아 경의 허리를 잡고 몸을 아래쪽으로 기울인 뒤, 남은 한 손으로는 마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겨댔다.

“세상에.”

절로 탄성이 나오는 곡예였다.

퍼어엉!

상하쌍대 마총 카스파가 불을 뿜고, 마커스의 부관이 기겁하며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쏴, 쏴라!”

몇몇은 내게, 대부분은 루디와 텐티아 경을 향해 마총 방아쇠를 당겼다.

텐티아 경은 내가 봐도 훌륭한 곡예비행을 펼치며 급상승해 마탄을 피해냈고, 루디는 그 와중에도 놀라운 기예를 선보였다.

“가짜 따위가!”

이례적으로 단호한 목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마총을 중절하고 마탄 두 발을 채워 넣은 뒤, 빙그르르 돌리며 재장전을 마쳤다.

사점 안경 너머 녹색 눈동자에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퍼어엉!

카스파가 산탄을 뿜었고.

“아아악!”

“큭!”

인스트로멘툼의 정예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갑옷도 고급이었고, 하늘에서 여기까지 온 만큼 위력이 떨어져 죽은 자는 없었지만,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 틈을 타 나는 성문을 향해 달렸고, 루디와 텐티아 경은 고도를 낮춘 뒤 와이번에서 뛰어내려 날 향해 달려왔다.

“전하!”

텐티아 경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기절할 듯한 기분으로 웃었다.

“딱 맞춰 와주었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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