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와이번에 세 명은 어찌어찌 탈 수 있었지만, 다섯 명은 탈 수 없었다.
“기사님.”
“그래.”
따라서 루디와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와 마커스와 소년을 태우려 애쓰다 귀한 시간을 날려 먹느니, 자신들이 내려 발렌시아누스를 지키는 게 낫다는 결론을 빠르게 내놓았다.
쾅!
붉은 망토를 두른 백금 기사가 유성처럼 떨어졌고, 검은 시녀복을 입은 시녀가 마총을 들고 고양이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섰다.
텐티아는 기사다운 판단력으로 전황을 파악했다.
‘생각보다 좋지 않다.’
헬레나의 병력은 확실히 귀족 동맹군을 압박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가로막혀 있었다.
발렌시아누스의 불꽃 마법 덕에 다리까지 가는 길은 말끔히 트여 있었지만, 꽤 먼 거리를 달려가야 했다.
그리고 등 뒤에는 눈이 돌아간 정예병들과 동부 기사들을 몰아낸 기계 기사들이 제 주군을 되찾고자 달려오고 있었다.
‘피가 끓는구나.’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철처럼.
텐티아는 심장이 아릿한 긴장감과 뜨거운 고양감으로 요동치는 걸 느끼며 보검 화한의 손잡이로 건틀릿 찬 손을 내렸다.
그때 루디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사님. 발렌 님을 대신해서 마커스를 부축해주세요. 후방은 제가 맡겠습니다.”
가장 뒤에서 후퇴하는 영광을 기사도 아닌 자에게 돌린다.
뼛속까지 기사인 텐티아로서는 절대로 받아드릴 수 없는 말이었다.
“네가 소드 유저가 되었다고 해도, 기사는 아니다. 적들은 수가 많고, 그 질도 좋아.”
루디는 텐티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녹색 눈동자를 서늘하게 가라앉히며 몰려오는 적들을 응시했다.
“잡아라!”
“쏴 버려!”
“일제사격!”
“지금 필요한 건 기사님의 방패와 제 창입니다. 추격대를 막을 때는 철벽보다 장창이 필요한 법이에요.”
“네가 창이 어디 있다는 말이지?”
루디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마총은 500m짜리 창입니다. 기사님. 시간이 없어요. 발렌 님은 어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 어떤 마법보다 강한 무적의 주문이었다.
텐티아는 침음성을 흘리며 마커스와 소년을 한 팔로 짊어졌고, 발렌시아누스를 부축하며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향해 달렸다.
루디는 목을 가볍게 꺾고, 구두 굽 상태와 탄띠에 남은 탄환 숫자를 확인하고, 사점 안경을 고쳐 쓴 다음, 씩 웃었다.
‘발렌 님.’
타다다다당!
마커스의 마총 대대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수십 발의 쇠구슬이 소리보다 빠르게 바람을 갈랐다.
루디는 바닥에 배가 닿을 만큼 몸을 낮춰 엄폐했고, 쇠구슬은 텐티아의 등판을 두드렸다.
카가가강!
그러나 황실 기사의 갑옷은 루디의 마총으로도 못 뚫는 기물이었다.
아무리 마커스가 만든 물건이라 해도, 양산형 마총으로는 유효타를 줄 수 없었다.
“저 기사를 포위하고 발렌시아누스를 직접 공격해라!”
마커스의 부관이 방패벽 뒤에서 외쳤다.
남서부에서 온 영주들은 열사암후가 사라진 뒤에도 마커스의 동맹이었다.
“아르르르르르르르!”
공포새 경장 기병들이 끔찍한 함성을 내지르며 텐티아를 향해 달려갔다.
몇 초면 따라잡을 듯한 속도였다.
루디는 왼쪽 팔꿈치와 양쪽 발끝으로 온몸의 체중을 지탱하며, 몸을 낮춘 채로 마총을 어깨에 견착했다.
‘아시나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큼 기쁜 일도 많지 않답니다.’
배워서 남 주냐는 말이 있지만, 배워서 남 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가정교사, 아카데미 교수, 전속 시녀 시종들이 대부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보다 대단한 사람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건 정말 의미 있는 일이거든요.’
루디의 녹색 눈동자가 수축하고, 그녀의 시선이 선두의 공포새 경장 기병에게 닿았다.
퍼어엉!
상하쌍대 마총에서 두 번째 산탄이 뿜어져 나갔고, 선두를 달리던 경장 기병 수 명이 바닥을 굴렀다.
“저기 있다!”
“각하가 말씀하신 마총 시녀다! 생포해!”
동시에 마커스의 부관과 마총 대대가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
루디는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기에, 한 발을 쏜 순간 곧바로 일어나 내달렸다.
이런 평야에서 은폐 상태로 쏠 수 있는 건 첫발뿐이었다.
“발사!”
아득한 목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타다다다다당!
아무리 초기형이라 해도 마총은 마총이었다.
시녀복에 액체 금속 갑옷 아콰테그를 두르고 ‘돌피부’ 주문 걸린 가죽 갑옷을 입었지만, 다리나 손에 한 발이라도 맞으면 그대로 무력화되었다.
따라서 루디는 마총을 빙그르르 돌려 중절하고 재장전하는 동시에, 발렌시아누스가 준 굵은 역장 반지를 사용했다.
번쩍!
반투명한 푸른 막이 사냥개처럼 도약한 그녀의 몸을 감싸고, 별똥별처럼 날아온 쇠구슬이 튕겨 나갔다.
캉!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별똥별에는 다른 사람의 소원이 들어 있었기에, 루디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그녀의 별똥별을 준비했다.
파지지직!
전류를 통해 근육을 인위적으로 수축시키고 이완시키며 신체 능력을 보조하는 마법, ‘생조 전림’이 새겨진 반지.
휘이이잉!
바람으로 몸을 감싸고 이동하는 바람 축복의 반지.
타앗!
두 개의 신체 강화 반지를 동시에 사용한 일류 시녀는 공포새 경장 기병들이 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내달렸다.
루디가 하늘로 뛰어오르며 마총 대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퍼어엉!
수백 조각으로 나눠진 산탄 마총탄이 유성우처럼 바람을 갈랐다.
* * *
“……궁정 귀족들과 대영주 대의원들, 그 외 친 황실파 평민 의원들까지 모두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지시가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사제가 성자 앞에서 보고를 마쳤다.
그 역시 적잖은 배분을 가진 고위 성직자였지만, 그 방에는 검은 성자 마테오스와 법복 교황 아르고스가 있었기에, 노사제의 태도를 극히 공손했다.
깐깐한 인상의 교황, 아르고스는 손짓으로 노사제를 내보냈다.
철컥, 성자 마테오스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탄식했다.
선이 굵고 그윽한 남자다운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렸다.
“이게,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완전히 놀아났습니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성자님.”
그렇게 말하는 아르고스 역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군.’
마테오스는 큰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커스는 귀족 연합을 이뤘고, 대귀족 대의원들의 표와 평민 의원들의 표를 우리에게 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궁정 귀족들의 만장 일치로 그들의 표에 의미가 사라졌지요.”
“우리가 마커스 편을 들어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동시에 궁정 귀족들이 섬기는 황실을 압박할 근거도 없어졌습니다.”
물론 수도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발렌시아누스의 화형을 노래하겠지만, 그들의 대표인 평민 의원들의 찬성표도 빛바랜 상황이다.
궁정 귀족들이 ‘우리가 이런 꼴 보려고 찬성해준 줄 아시오?’라고 나오면 교회는 할 말이 없었다.
법안을 만드는 데 찬성한 황실을 그 법안으로 밀어붙이는 건,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억지스러운 그림이었다.
“원래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목숨으로 제이릴리스 황제와 협상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처벌은 헌금이나 고행, 몇 년의 봉쇄수도원 감금 정도겠지요.”
“발렌시아누스 대공이라면 그 정도야 달게 받을지도 모릅니다. 되레 우리가 면죄부를 내려주는 꼴이 되겠지요. 봉쇄수도원에 보내 봐야 똑같습니다. 그 안에서 젊은 수사와 수녀들을 죄다 그 죄 많은 몸뚱이로 유혹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성자님.”
“게다가 그는 분명히 황제의 묵인 또는 지시를 통해 움직였을 겁니다! 제이릴리스 역시 우리가 그녀를 압박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럼-”.
마테오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아르고스 역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흠칫했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운석을 떨어트리겠노라!’
황제의 비웃음 소리가 호화로운 방 안에 환청처럼 울렸다.
“…….”
아르고스는 무거운 침묵을 깼다.
“법학자인 제가 말하기는 송구하지만, 법조문 자체보다 중요한 건 실권과 그로 인해 조정되는 판례입니다.”
마테오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일단 인정하겠습니다. 현실을 인정해야 바꿀 수도 있겠지요.”
“제이릴리스가 발렌시아누스에게 모든 악역을 떠맡겼지요.”
진상은 발렌시아누스의 자처였지만, 교회가 보기에는 그리 보였다.
“본인은 무결한 황제로 충성맹세를 받고, 제국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 우리의 법과 뜻은 유명무실해집니다. 이미 말씀하신 대로 귀족 의원들이 동의한 만큼 우리가 그들을 압박하기도 뭣해지지요.”
마테오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의 성흔에서는 언제나처럼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소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육신과 수천 명을 불사를 신성력, 그의 명령이라면 웃으면서 사지에 몸을 던질 전투 사제와 성기사들이 넘쳐나건만.
송곳 꽂을 땅도 없는 이름뿐인 대공이 그를 농락해 버렸다.
그는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하다고 말하기에는 음습하고, 악하다고 말하기에는 열정 넘치는,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황형을.
“일단 그를 확보하도록 하지요.”
황제가 발렌시아누스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다는 건 이미 파악했다.
카리오사가 황궁에 쳐들어갔을 때도 반응하지 않았던 황제다.
그러니 힘으로 끌고 올 수 있었다.
“지금쯤 동문으로 들어왔을 테니, 성기사들을 보내세요.”
마테오스는 그렇게 명령했다.
묘한 죄책감과 패배감을 느끼면서.
* * *
발렌시아누스는 루디의 분투와 텐티아의 헌신에 힘입어 무사히 솔레타라온 성벽 안으로 들어섰다.
완전히 탈진한 그는 반쯤 기절한 채로 막 무덤에서 일어난 언데드처럼 비틀비틀 걸었다.
“죽겠군.”
근 며칠간 미친 듯 긴장하며 살았고, 이제 막 그 긴장이 풀려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불러일으켰던 비늘이 몸에서 뚝뚝 떨어지고, 바닥에 닿을 때마다 파삭, 부서지며 잿가루로 돌아갔다.
텐티아는 여전히 면갑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녀가 보내오는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전하. 참으로-”.
“참으로?”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엄청난 일갈을 얻어맞을 각오를 했다.
교회에게 거대한 엿을 먹여버린 셈이니, 신실한 기사인 텐티아로서는 경악할 만도 했다.
그러나 텐티아는 지극한 감정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발렌시아누스의 무용을 찬미했다.
“참으로 기사다우셨습니다.”
“?!”
발렌시아누스가 귀를 의심하고, 텐티아는 투구 아래서 흐뭇하게 웃었다.
“도시를 구하기 위해 자작극이라는 오욕을 감내하시는 태도,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적의 수좌를 대면하는 행보, 끝끝내 승리하신 무용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게 없습니다.”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감탄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진심입니다. 전하.”
텐티아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걸 느끼며 말을 이었다.
“섬기는 자로서, 본이 되는 모습이었사옵니다.”
발렌시아누스가 피워 올린 불꽃이, 버섯 같은 거대한 구름이 눈에 선했다.
주군을 위해 적진에 홀로 파고들어 무쌍을 선보이고 적의 수좌를 생포해 탈출한다.
기사 중의 기사 텐티아가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척, 척, 척, 척.
저 앞에서 하얀 신성력이 아득하게 일렁였고, 판금 갑옷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루디가 입술을 깨물며 마탄을 재장전하려 했지만, 텐티아는 한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고, 두 포로를 루디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네가 챙겨라.”
“기사님. 이런 건-”.
루디의 녹색 눈동자가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녀 역시 텐티아가 얼마나 신실한지 알고 있었다.
“텐티아 경!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넘기시오. 성자님의 명령이오!”
은색 판금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수십 명의 성기사가 대로로 걸어왔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신성력이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성기사는 기사보다 힘을 끌어내는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러나 한 번 기도를 마치고 본격적인 축복이 시작되면, 지치지 않는 체력과 미친 듯한 회복력으로 비슷한 경력의 기사를 가볍게 뛰어넘는 무용을 뽐낸다.
선두에 선 성기사는 앙겔로스.
약 1년 전 텐티아, 발렌시아누스와 함께 홍의주교 바오로안을 납치 감금한 전우였다.
그가 면갑을 올리며 텐티아를 향해 안타까움 어린 시선을 보냈다.
또 다른 성기사가 외쳤다.
“텐티아 경. 무얼 망설이는 것이오!”
텐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얼굴에 초연한 미소를 지었다.
“서임 받을 때 맹세했지. 주군을 충성으로 받들고, 사랑으로 신을 섬기며, 검으로 정의만을 수호하라.”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하겠어.”
보검 화한이 뽑혀 나오고, 피처럼 진득한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타올랐다.
대로 한가운데에서 기사와 성기사가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