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06)화 (206/340)

(206)

하늘은 푸르고 날은 화창했다.

정원 잔디밭은 넓었고, 화단에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호호호호.”

“진짜 보기 좋네요.”

“꼭 빼닮았어요.”

귀부인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내 눈높이는 평소보다 훨씬 낮았고, 그제야 나는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빠. 내가 한 말 안 듣고 있었지?”

그때 제이릴리스가 내 손을 잡아당겼고, 살짝 삐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제이릴리스는 아직 소드 마스터가 되기 전이라서 얼굴에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

화사한 백금발도 지금처럼 우아하게 곱슬곱슬한 장발이 아니라, 칼같이 자른 단발이었고, 그 노란 눈동자에도 절대적인 강자의 나른함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아, 아니야.”

나는 반사적으로 부정했고, 그녀는 의심 어린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럼 내가 방금 무슨 이야기 했는지 말해봐.”

솔직히 고백하자면,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때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벌써 40년도 더 지난 일이건만, 도저히 기억 속에서 흐려지지 않았다.

“그 표정 뭐야? 불쌍한 척한다고 안 봐줄 거야!”

“잘 들었다니까? 언젠가 반드시 강력한 마법사가 되어서 이 세상을 좋게 바꾸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했잖아. ……나도 도와주고.”

어린 제이릴리스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스쳤다.

“진짜 잘 들었네. ……미안.”

“미안할 것까지야.”

“아, 아무튼 오빠도 빨리 검술을 배워. 언제까지 맞고 다닐 거야? 약속했잖아. 강해지기로.”

“알았어. 그래. 약속했지. 나야말로 미안하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더욱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붉은 달무리 궁에 장미가 만개했데. 가자.”

“그래. 가자!”

제이릴리스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그대로 따라나섰다.

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리 깨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꿈속 세상의 시간은 현실의 찰나의 지나지 않았다.

새벽마다 우는 빌어먹을 새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꿈속 세상의 행복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별궁 주변에서 아침에 우는 새는 루디가 공포탄으로 죄다 쫓아 버렸으니.

내가 제이릴리스와 같이 장미 정원에 가서 몇 시간 정도 행복을 누리는 걸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아무도 없어야 했다.

“오빠.”

웃으며 달려 나갔던 제이릴리스가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서 본래 이쪽에 올 일 없을 사람들이 다가왔다.

“또, 또!”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신 건가요?”

부채를 펴며 일어선 귀부인들이 제 아이들을 넓은 드레스 자락 뒤로 숨겼다.

제이릴리스가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나 역시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궁무부 관료들과 로브를 입고 고깔모자를 쓴 황립 마도 공방 마법사가 우리를 난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었다.

한없이 화창하던 태양이 가려졌다.

“제이릴리스 대공 전하.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처럼 잔혹한 선고를 내렸다.

“두 분 중 한 명만 오시면 됩니다.”

나는 곧바로 깨어나려 했다.

이건 꿈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그러나 모든 악몽이 그렇듯, 그것은 나를 놓아주지 않고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안 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독한 무력감과 자괴감이 몸을 감쌌다.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40년 전 어린아이의 이기적인 본능이 머릿속에 전해졌다.

내 손을 단단히 잡은 제이릴리스의 손은, 날 붙들어주는 손이 아니라 날 끌고 갈 손처럼 느껴졌다.

제이릴리스가 날 바라보았다.

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괜찮아. 오빠. 내가 지켜줄게.”

그녀가 한 걸음 나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구하려 와줘.”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는 황제의 오만한 나른함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가질 만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에 힘을 주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먼저 손을 놓아버렸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내가 품었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건, 내가 끌려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었다.

내 머리를 터뜨려버리고 싶었다.

시야가 천천히 검게 물들었다.

* * *

곧바로 느껴진 건 끔찍한 격통이었다.

지독한 자괴감의 여파가 머릿속을 뒤흔들었고,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때 제이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속에서와 달리 오만하고 나른한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이렇게 누덕누덕해져서 돌아왔군. 그래. 그래서였어. 생각해 보면 그대는 언제나 짐을 위해서 몸도 마음도 아끼지 않았지.”

그러나 그 내용은 제국의 폭군, 제이릴리스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그대가 이런 처참한 모습이 된 걸 보고 있자면 기분이 이상해져. 짐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완성되었고, 이복 남매들을 짐승처럼 도륙했노라. 짐에서 혈족이란 속세의 통치를 위해 신경 써야 할 것 이상은 아니었는데, 왜 그대만은 다른 것인가?”

그 나른하던 목소리마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한 배에서 나왔다 하여 이런 감정이 만들어졌을 리 없으니, 이는 분명 그대가 지극한 헌신으로 짐을 바꿔 놓은 것이겠지. 그 짧은 사이에 바뀌다니, 짐도 아직 어리구나.”

작지만 차가운 손이 내 목으로 와 닿았다.

“그래. 그대가 짐을 어리게 만들고 있노라. 그대가 짐을 약하게 만들고 있노라.”

검지부터 약지까지 끼고 있는 관절 반지의 감촉이 느껴지는 걸 보면, 분명 제이릴리스의 손이었다.

그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목이 졸렸지만, 반항하지 않았다.

꿈으로 인한 죄책감과 자괴감이 여전히 감정을 들끓게 하고 있었고, 온몸을 내달리는 격통 탓에 눈꺼풀 하나 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제이릴리스가 내 목에서 손을 뗐다.

뺨에 무언가 뜨거운 게 떨어졌다.

그게 무엇인지 얼핏 단어로 떠올랐지만, 지난 40년간 보아 온 그녀와 그것은 도저히 머릿속에서 한 그림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가 카니발리즘에 눈을 떠서 나를 보고 군침을 흘렸다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내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죄책감과 자괴감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더한 자괴감에 빠질 무렵, 무언가 뜨거운 게 내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관절 반지 낀 손이 내 목덜미를 들어올려 액체가 무사히 넘어가도록 도왔고, 또 무언가 따듯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뚜둑, 뚜두둑, 아득.

혈마법?

뼈가 맞춰지고 근육이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눈꺼풀조차 뜰 수 없던 격통이 조금씩 가라앉아 갔다.

“아. 그리고 기억해두거라.”

이번에 찾아온 어둠은 달콤한 어둠이었다.

“오늘 짐이 했던 말을 발설하면 자결을 명하겠다. 짐은 그대가 깨어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언제든 알 수 있노라.”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생각하려 했지만, 달콤한 어둠은 삽시간에 나를 감쌌고, 나는 그대로 추락했다.

* * *

“폐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어, 어어?”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가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기하학적인 붉은 모자이크와 금장 장식으로 치장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그날 텐티아 경이 성기사들에게 패배하고, 나는 성난 민중을 달래기 위한 제물이 된 건 아닌 모양이다.

솔직히 모든 게 화형대에서 불타기 전 마지막으로 본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보니 화려한 금실 커튼과 장식품 하나 없는 방이 보였다.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일어났는가?”

정수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비단 이불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

난 누더기 대신 검은 천으로 만든 빳빳한 바지를 입고 있었고, 복근 도드라진 상체에서는 흉터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손에서도 비늘은 다 빠져 있었다.

침대 머리에 하얀 셔츠가 걸려 있어서 그걸 주워 입고,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 넘겼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이리 와라. 이미 밤이 깊었으니 다른 귀족들에게 셔츠 한 벌만 입은 모습을 보일 일도 없도다.”

창밖은 이미 깊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하늘에 달과 별이 총총했다.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제이릴리스의 집무실 책상 앞으로 향했다.

그녀는 평소 같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관절 반지를 끼고 있었으며, 황금색 눈을 오만하고도 나른하니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

정말로 밤이 깊었는지 주변에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아직도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묘하게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여, 죽을 뻔했느니라.”

나는 곧바로 머리를 굽신거렸다.

“송구하옵니다.”

“폭발을 막기 위해 제어력을 한계까지 쥐어짜고,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뿔이 날 때까지 용찬의 힘을 썼으며, 그렇게 변이한 몸을 원래대로 돌리느라 큰 부담이 있었노라. 게다가 몸속에 마탄이 몇 발이나 박혀있어 계속 피가 흘렀어.”

“거듭 송구하옵니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사옵니까?”

“허한다.”

“텐티아 경은 어찌 되었사옵니까?”

제이릴리스가 ‘마땅히 그걸 물어야지’와, ‘죽을 뻔했다는데 그것부터 궁금한가?’가 공존하는 표정을 지었다.

“흑철 기사단이 제때 도착했느니라. 다친 곳은 하나 없고, 교회도 지금 같은 상황에 짐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하니 파문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릴리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손짓했고, 나는 그녀와 마주 앉았다.

“…….”

“…….”

잠시 침묵이 흘렀고, 제이릴리스는 그걸 깼다.

“그대가 할 말이 없어 보이니, 짐이 먼저 말하겠노라.”

“그렇게 하시옵소서.”

“고마울 따름이로다.”

심장에 무언가 얹힌 기분이 들었다.

은은한 어둠이 내린 집무실, 창밖으로 구름 밖으로 나온 환한 달이 휘영청 빛나는 순간이었다.

나의 황제는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황금색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짐이 바라는 모든 걸 그대가 가져와 주었다. 철혈당주 마커스의 궁정 귀족화라니,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구나.”

“아.”

“……하지만 짐은 그대를 지켜주지 못했어. 누덕누덕해져서 돌아온 그대를 치료해주는 게 짐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권능을 얻었건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진정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니. 운명이란 얄궂구나.”

“그리 말씀하시지는 마시옵소서. 소신은-”.

“그래. 짐도 알고 있느니라. 그대의 기꺼운 충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이용하고 보답해 주는 게 황제의 일이지.”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니, 짐은 우선 아주 얄팍하고, 소소한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한쪽에 서 있는 갑옷을 가리켰다.

“아.”

검은 바탕에 황금으로 노란 무늬를 넣은 전신 판금 갑옷이었다.

투구부터 흉갑, 군화 위로 씌우는 보호구 사바톤까지 아름답고 강건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수많은 장인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최적화시킨 형태가 지금의 제국 기사 제식 갑옷인 만큼, 디자인 자체는 제이릴리스의 것도 텐티아 경의 것도 똑같았다.

그러나 오로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갑옷이라는 건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때 검술을 익히는 일도 경계 받았던 내가, 이제 제국 최고의 무구를 하사받았다.

“그대 역시 마법사인 만큼 공격용 주술, 마법 회로는 새기지 않았도다. 그러나 방어와 강화를 위한 부분은 짐이 직접 검수하고 보강했으니, 싸우러 갈 때는 반드시 입도록 해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번에 다친 건 갑옷의 유무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애초에 반쯤 기절한 채로 대영주에게 끌려갔으니, 저 갑옷이 있었다고 해도 벗겨졌을 거다.

하지만 제이릴리스가 말했듯, 그녀 역시 알면서도 준 것이니.

여기서는 고개를 숙이는 게 도리이리라.

“감사하옵니다. 폐하. 저 갑옷을 입고 폐하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그래. 갑옷은 내일 별궁으로 보내 놓겠다.”

그녀가 책상 한쪽에 놓인 서류 한 묶음을 내밀었다.

내가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뭘 그리 보느냐는 듯 눈을 흘겼다.

“저 갑옷은 지난번에 주기로 한 것을 이제야 전달해주었을 뿐이지. 그대는 짐을 은혜도 모르는 황제로 만들려 하는가? 짐은…… 그대가 흘릴 피에 보답해 주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어.”

“아니옵니다. 그럼 이것이?”

“마커스의 영지에 대한 권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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