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07)화 (207/340)

(207)

제이릴리스가 관절 반지를 달각이며 설명했다.

“마커스가 황실에 영지를 헌납하면, 그대에게 지분을 나누어 주겠다. 그대를 인스트로멘툼에 보내버리겠다는 뜻은 아니니 안심하거라.”

“아.”

“여기부터 여기까지 쓰여 있는 마을, 장원, 호수, 도시, 촌락, 산림, 광산까지. 대가문 인스트로멘툼의 3할이니라. 관리는 짐이 보낸 총독들이 하겠지만, 서류상으로는 모두 다 그대의 것이야.”

어지간한 백작령 하나 규모의 영토였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난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이름뿐인 대공이 아니었다.

그녀가 희고 가지런한 이빨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매년 세금이 올라올 것이다. 현물로 올라오는 게 많겠지. 원한다면 짐이 일괄적으로 매입한 다음 황금으로 주겠노라. 값은 잘 쳐줄 테니 안심하도록.”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수많은 마을, 도시, 광산, 호수, 장원에 대한 권리증을 받았다.

커다란 서류 가방 하나를 다 채우고도 남을 양이었다.

제이릴리스가 씩 웃으며 책상 서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제 그대도 봉토가 생겼으니, 권리 역시 주어야겠지.”

“폐하?”

“왼손을 내밀어라.”

나는 순순히 왼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상자에서 섬세하게 세공된 은반지 하나를 꺼내 내 새끼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살짝 닿은 손끝에서 감전된 듯한 감각이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반지에서는 범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졌다.

마법 인장을 찍을 수 있는 인장 반지였다.

그녀가 유유히 웃으며 말했다.

“만약 언젠가 실력 있는 방랑 기사나 신의 있는 소드 엑스퍼트 급 용병을 만난다면, 그대의 기사로 들여도 좋다.”

기사를 들이려면 돈이나 땅을 주어야 했다.

지금 받은 장원을 내려 줄 권리까지 받았다는 말이었다.

기사를 들이고, 자금을 관리할 행정관을 들이고, 성을 쌓는다.

우리는 그런 걸 ‘영주’라고 부른다.

“폐하?”

이건…… 대놓고 내가 내 세력을 만들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그리고 황위 계승서열 1위에게 땅과 돈과 세력을 내어 주는 건 역사적으로 보아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내 충성심은 지난 40여 년 동안, 내 죄책감은 지난 50년여 년 동안 변하지 않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건 갈대처럼 질기면서도 연약해서, 바람이 불면 휘청거리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제이릴리스는, 그 사람 아닌 듯한 미모를 가진 황제는, 육식동물처럼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내게 몸을 기울였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뾰족한 이가 보였다 사라졌다.

“말했을 텐데, 짐은 그대를 믿노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그녀가 한쪽에 쌓인 서류를 또 내 쪽으로 밀었다.

“그러니…… 이것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이번 서류는 황제가 전리품을 하사해주는 형식이었다.

헬레나가 와해 된 귀족 연맹에게서 노획한 물건이겠지.

다만 그 서류에 쓰인 이름에는 도저히 ‘감사하옵니다’하고 넙죽 받기 어려운 무게가 있었다.

[니벨룽겐]

“아니, 폐하, 이건…… 마커스의 비공정이지 않습니까? 이, 이걸 제게 주신다고 해도…….”

대형 군함보다 거대한 비행선이다.

마커스의 수많은 기술과 인력이 달라붙어야 하는 기물이다.

이걸 내가 받는다고 해도 혼자서는 운용할 수도 없다.

그렇게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지금 내가 짐작하고 있는 게 맞는지 아닌지 고민하고 있으려니, 제이릴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대는 언제나 머리를 굴리는군. 짐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짐이 누군가의 두려움을 사는 존재라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보다 두려워하는 존재를 배신할 때 더 망설이고,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사랑할 수도 없으니. 그래. 확신을 주는 건 짐의 일이지. 그대의 생각이 맞노라.”

그녀가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니벨룽겐, 마커스의 기계 기사들과 마총 부대, 전투 마법사 부대, 그가 키우고 있던 공방의 연구 마법사들…… 모두 그대에게 주겠어.”

나는 순간 눈앞의 제이릴리스가 셋으로 늘어났다가 다시 합쳐지는 환각을 보았다.

* * *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엄청난 돈과 엄청난 군대가 내 손에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어지간한 왕국 하나는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낭랑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끝없이 울렸다.

“지난번에 말했던 그대의 시녀 역시 계속 그대 곁에 두도록 하지. 작위 역시 마음대로 내리도록.”

“짐은 이번 충성맹세를 준비하며 확신했노라. 짐이 사무에 힘써서는 안 돼. 짐의 일은 인재를 뽑아 적당한 자리에 앉히고, 그 인재를 믿어주는 것이야.”

“짐은…… 사사건건 개입하며 지배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존재가 되어 버렸어. 짐이 친히 나섰다는 일 자체가 상대의 영광이 되어 버리니 말이야.”

카리오사가 황궁에 쳐들어왔을 때, 제이릴리스가 나섰다면 순식간에 제압했을 것이다.

그럼 카리오사는 제이릴리스가 직접 나서야 할 만큼 대단한 대영주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동쪽 바다를 방비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톱니바퀴가 그녀인 만큼, 제이릴리스는 카리오사를 죽이지 못한다.

괜히 정적의 권위만 올려준 꼴이 되어 버리는 거다.

제이릴리스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순수한 마법 연구는 상아탑에게 맡기겠노라. 그들이 지난 천 년간 바라던 게 그것이었으니, 들어주도록 하겠어. 짐의 황립 마도 공방은 마법 기술의 도구화에 집중하겠다. 그리고 그대는…… 마커스의 목줄을 쥐고, 세레라지에와의 관계를 조율하도록.”

나는 은하수를 들이킨 듯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소신에게…… 마커스 후작이 만들어낸 마도 공학 부대를 맡긴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사옵니까?”

“정확하도다. 짐은 이제 그대가 혼자서 피 흘리는 꼴을 못 봐주겠으니 말이야. 게다가 이런 일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철혈당주 마커스를 손에 쥘 만큼의 명성과 권위가 있는 인물은 흔치 않아. 수도의 궁정 귀족들로는 부족하지. 악명으로라도 그 위세를 떨쳐야 해.”

“반드시 믿음에 보답하겠사옵니다.”

그러나 그녀가 보내준 신뢰에 취해서 허우적거리기도 잠시, 40년 차 행정관료로서의 본능이 나를 깨웠다.

“폐하.”

“말하도록.”

“어째 제가 포상이 아니라 일을 받은 기분이옵니다.”

나는 세레라지에와 친한 만큼, 마법이 제대로 연구하기 시작하면 돈이 밑도 끝도 없이 나가는 학문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돈은 기계 기사들의 유지비와 마도 공학 연구비로 죄다 나갈 게 분명했다.

즉, 달리 말하자면 돈은 남는 게 없는데 일만 늘어난 상황이었다!

서부에서 제일 위험하던 대영주의 목줄을 쥐었다.

그리고…… 목줄 메인 개가 사고를 치면 그건 주인 잘못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제이릴리스의 얼굴에 보조개가 파였다.

웃음을 참는 듯 보이기도 했다.

“월급을 올려주겠노라.”

“!”

나는 감히 불경을 저지르기로 했다.

“고문 월급이 올라 봐야 고문 월급이잖습니까! 제 시녀가 궁의 관리인으로서 받는 돈이 그것보다 많을 것이옵니다.”

“발렌 대공. 지금 감히 황명을 거스르려 드는가?”

제이릴리스가 무적의 논리를 꺼내 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손 들어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솔레타라스와 자비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에, 지고한 황명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키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만큼 적기제독이 남방 토후국의 아미르들에게서 약탈한 금을 보내올 것이다. 그것 역시 황실의 지분에 따라 나누어야겠지.”

“!”

“3할은 그대 몫이다. 연구비도 유지비도 충당되고도 남을 것이야.”

나는 연거푸 머리를 굽신거렸다.

“삼가 황제 폐하의 은혜가 태산과 같사옵니다.”

분위기가 다소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마음 한쪽을 자극하는 덩어리가 있었다.

그녀는 내게 무력과 재화와 그것을 유지할 권리를 나누어 주었다.

충성을 보답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내게 너무 많은 게 주어진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회귀 전 정적에게 분에 넘치는 권한을 쥐여 주고, 실수를 트집 삼아 숙청해 본 나다.

물론 제이릴리스가 내게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있다.

손가락으로 짓눌러 버릴 수 있는 상대에게 계략을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나 내가 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한참 복잡해졌을 무렵, 제이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는 잘할 거야. 나랑 약속했잖아? 강해지겠다고.”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고, 제이릴리스는 언제나처럼 오만하고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

왜 그러냐는 듯 아리송한 눈빛이 나를 향해 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착각이었사옵니다.”

그때 들려온 가학적인 장난기 어린 목소리는, 또 수십 년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을 텐데?”

* * *

모든 서류를 건네받고, 충성맹세가 끝난 후에도 마냥 놀지는 못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일이 이렇게까지 쏟아지니 어깨가 무거웠다.

그러나 마커스와 그의 기사들을 손에 쥔 건 분명 막대한 소득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그들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고, 마도 공학의 중요성도 알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기존 병력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나만큼 그들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하니, 또 책임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창밖 별들을 보니 한두 시간 뒤면 동이 틀 것 같았다.

슬슬 별궁으로 돌아가겠노라 말하던 순간, 제이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숄을 걸쳤다.

“따라오라.”

“예. 폐하.”

아직도 뭐가 남았는지 궁금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기에, 군말 없이 따랐다.

제이릴리스의 입가는 굳어있었고, 눈빛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그러나 그녀가 본궁 뒤에서 마차까지 타자, 가벼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폐하.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지 물어도 되겠사옵니까?”

“황궁 마도 공방이니라. 그곳 사람들은 언제 가든 깨어 있노라.”

“…….”

나는 지난 40년의 경험으로, 그게 그녀가 그녀 나름대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던진 농담임을 알고 있었다.

“폐하. 그건 추모를 해야 할 일이옵니다!”

……바꿔 말하자면, 방금 말은 그녀 역시 지레 어색함을 느낄 정도로 큰 울림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황궁 마도 공방은 수많은 군주가 설립한 수많은 마법 공방 중, 유일하게 상아탑의 발밑까지나마 치고 올라간 곳이다.

막대한 자금을 먹어 치우는 코끼리들이며, 황실이 다른 대영주들에게 우세를 점하게 해주는 원천 기술의 탄생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쌍둥이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도 있었다.

“…….”

“…….”

깊은 밤, 마차 안에서는 바퀴 덜커덩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나와 제이릴리스는 대공과 황제였고, 회귀 전에도 지금도 황립 마도 공방에 방문할 일이 많았다.

난 그 거대한 나무 속에서 매일 같이 세레라지에 누나를 만났고, 제이릴리스도 매주 직접 찾아서 마법사들의 보고를 받고는 그들을 꾸짖거나, 아이디어를 내거나, 치하하고 추가 예산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황궁 마도 공방에 같이 가지 않았다.

마법사들을 본궁으로 부르거나, 내가 가서 듣고 제이릴리스에게 보고할지언정, 같이 가지는 않았다.

지난 1년 수개월 동안은 물론이요, 회귀 전 40년 동안도 그랬다.

“…….”

황궁 마도 공방은 나와 제이릴리스에게 지식과 힘의 원천이었지만, 우리 쌍둥이에게는 한 가지 의미가 더해졌다.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죄책감과 자괴감을 지우려고.

‘언젠가 구하러 와줘.’

그러나 그건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생각나는 종류였기에, 나는 제이릴리스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하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리를 터뜨려버리고 싶었다.

저 멀리 술통처럼 생긴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제이릴리스 옆에서 보는 그 나무는 내 죄악을 전시해둔 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그녀의 말은 나를 더더욱 흔들어놓았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야겠구나.”

“!”

……그 실험이 있던 곳은 최하층 쪽이었다.

나는 얼굴이 시시각각 핼쑥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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