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키이이잉.
승강기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차르르르.
굵은 쇠사슬은 위로 또 위로 올라갔다.
아래를 흘깃 내려다보면 지하 수백 미터까지 뻗은 수직 통로가 보였다.
통로 안쪽에도 이 공방 나무의 발광 꽃이 피어 있어 그리 캄캄하지는 않았다.
차르르르.
쇠사슬 올라가는 소리만 끝없이 들려왔다.
제이릴리스가 매 층 늘어선 공방들을 가리켰다.
“그래. 그대여. 불 꺼진 공방 하나 없구나.”
매 층을 지날 때마다 공방 유리문들이 얼핏 보였는데,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왜, 왜 이런 숫자가 나오는 거야?”
“중화 시약 가져와! 빨리!”
“지금 이 위대한 발견을 앞두고 잠이 오니?”
“살려줘.”
“어제 몇 시간 잤어?”
“이번 주에 2시간 정도 잔 거 같아.”
“오늘 일요일이야!”
제국 제일의 인재들인 마법사들이 제 생명을 불태워 피워 올리는 불꽃이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맞대며 기도했다.
제이릴리스가 나를 보고 물었다.
“무슨 기도를 했느냐?”
“광명신의 축복이 저들에게 깃들어, 밤새도록 일해도 병마가 찾아오지 말라고 기도했사옵니다.”
“집에 돌아가 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구나?”
“그건 광명신이 아니라 폐하가 네 기사단의 무구 납품 일정을 얼마나 조정하실지에 걸린 일이옵니다. 저들을 일하게 만든 게 폐하와 저인데, 그런 기도를 올릴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하하하하. 맞노라.”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잠시 죄책감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죄책감을 잊었다는 사실에 더한 죄책감이 찾아올 무렵, 제이릴리스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푹.
“컥!”
뼈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멍이 들지 않았을까 의심될 정도의 힘이었다.
……지금 내 몸에 멍이 들게 하려면 어지간한 덩치의 사내가 쇠망치 정도는 휘둘러야 할 거다.
“쿨럭, 쿨럭! 폐, 폐하?”
나를 허리 숙여 기침을 토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제이릴리스가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안쪽에는 불길 같은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때는 혼자였노라.”
여기서 뛰어내리고 싶어지게 하는 말이었다.
황제가 낭랑히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이곳이 짐의 것이며, 그대가 짐의 곁에 있구나.”
나는 승강기 난간을 잡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제이릴리스가 내 팔뚝을 잡았다.
강철 수갑처럼 단단한 손아귀가 나를 붙들어놓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대의 죄책감을 자극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짐이 그대에게 권하려는 일은, 짐이야말로 그대에게 죄책감을 가져 마땅한 것이야. 그러나 이해하거라. 짐은 예나 지금이나 남겨지는 것이 더 두려운 자이니.”
덜커덩.
그게 무슨 말인지 완전히 이해하지도 전에 승강기가 멈췄다.
* * *
제이릴리스가 나를 잡아끌듯 한 공방으로 향했다.
공방은 중앙 승강기 통로와 가까울수록 작고, 복도 끝일수록 컸는데, 제이릴리스가 도착한 곳은 복도 맨 끝에 있는 공방이었다.
문 주변에 은과 금으로 마법진을 새겨 놓았는데, 무언가를 막아둔 것 같았다.
그것 말고도 마른 꽃이나 신기한 광석 조각, 짐승의 가죽이나 깃털도 놓여 있었다.
나는 이곳에 어떤 마법사들이 모여있을지 직감했다.
제이릴리스가 문을 열었고, 술사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와 제국의 기둥이신 대공 전하를 뵙사옵니다.”
그들은 남녀노소 모두 머리를 길게 길렀고, 그 긴 머리에 색색의 비단을 끼워서 길게 땋은 뒤, 한쪽 어깨 앞으로 늘어트리고 있었다.
“폐하. 이들은 정령술사들이 아니옵니까?”
나는 다소 놀란 기분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정령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 각종 산천초목이나 사물에 깃든 영적 지성체를 의미한다.
정령술사는 타고난 재능으로 그들과 교감해 그들의 힘을 빌려 사용한다.
고위 정령술사는 하루아침에 숲을 만들거나 옮기는 수준의 힘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옛것들 때문이었다.
영혼만으로 이뤄진 지성과 그 지성을 직접 받아들여 사용하는 술사들은 옛것 침식에 극히 취약했고, 많은 정령과 정령술사가 침식되었다.
세베릭과 내가 죽였던 켈피가 대표적인 예시였다.
“황제 폐하의 은혜 덕에 안전한 곳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두세 살 많아 보이는 여인이 걸어 나와 공손히 머리 숙였다.
땋아 내린 갈색 머리에는 노란 천과 암갈색 천이 끼워져 있었다.
“데니아 누나?”
그녀는 약간 까다로우면서도 총명한 인상에 갈색 머리를 가진, 대귀족을 외가로 둔 황족이었다.
홍등가 카지노들과 황족들을 일소한 ‘대탈출’ 당시 하드리탄, 헬레나와 함께 내 손을 잡았던 다섯 황족 중 한 명이기도 했고.
이 시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대지 정령술사이기도 했다.
그녀는 날 보자 무언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걸 본 듯 화들짝 놀랐고, 이내 자존심을 굽히는 듯한 표정으로 머리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발렌시아누스.”
“왜 그렇게 어렵게 대해? 같은 신하잖아.”
“아하하하.”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정령술사는 일반적인 마법사나 기사보다 상대의 경지를 더 쉽게 파악한다.
나는 뿔이 날 정도로 용찬의 힘을 깊게 끌어 쓰고, 불꽃 정수 화정과 최고급 영약 영생을 빵 먹듯 먹은 황족이었으며, 용언의 불길을 사용하는 마법사였다.
그리고 제이릴리스의 앞잡이로서 친족들을 학살했으니, 그녀가 날 보며 화들짝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물론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과 별개로, 그녀가 날 지레 두려워하는 것까지 신경 써줄 수는 없었다.
제이릴리스가 공방의 정령술사들이 모두 들을 만한 크기로 말했다.
“오늘 그대들을 모이게 한 이유는, 짐의 오라비이자 제국의 대공인 발렌시아누스에게 불꽃 정령의 정수를 이식하기 위해서다. 짐이 집도할 테니 그대들은 짐을 보조하도록.”
* * *
나는 멍한 기분으로 제이릴리스의 선언을 들었다.
정령의 정수를 사람에게 이식한다니, 어지간한 마법사인 나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별일도 아닐 듯했다.
모든 귀족은 이종족의 피가 짙게 섞였으니, 여기서 다른 지성체가 좀 더 들어온다고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다.
그때 한 늙은 정령술사가 한 손을 들었다.
“폐하. 하오나 인간에게 정령의 정수를 이식하는 것은 큰 위험이 따릅니다. 실패와 성공을 떠나,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본질이 변화할 수도 있습니다.”
데니아 역시 불만과 걱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폐하가 선물이라고 주시는 거라면, 거절하는 걸 추천할게. 정령의 정수를 받아들이면 본질 일부가 정령이 되는 거야. 물론 그만큼 회복력도 좋아지고, 잘 죽지도 않을 거고, 불길 하나만큼은 훨씬 더 잘 다룰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선을 넘는 일이라고. 정령술사 중에는 너무 많은 정령을 받아들인 대가로 자아를 잃어버린 술사도 많아. 사람은…… 사람으로만 살아야 해.”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며 제이릴리스를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 선택하거라.”
그녀는 조급해 보였다.
조급함이란 결국 두려움에서 나왔다.
두려움이란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 제국 황제에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눈꺼풀도 뜨기 힘들었던 고통 속에서 내 목에 얹혔던 서늘한 손길을 기억했다.
‘그대가 짐을 어리게 만들고 있노라. 그대가 짐을 약하게 만들고 있노라.’
이번에 만약 내가 마커스에게 졌다면, 그는 내 목숨을 칩 삼아 제이릴리스와의 도박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제국과 세계의 지배인이어야 하지, 테이블에 마주 앉는 선수여서는 안 되었다.
내가 구름 위의 황제를 구름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다면, 본말전도다.
……무엇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이릴리스가 실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용찬까지 한 내가 여기서 더 섞인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
오히려 내 몸을 구성하는 다양한 피 중 용찬의 비율이 낮아질 테니, 비룡화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되었지, 방해되지는 않을 거다.
나는 과감하게 셔츠 앞섬을 열며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폐하. 소신은 준비되었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데니아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데니아가 내 곁으로 바싹 다가와 물었다.
“발렌시아누스. 하나만 물어도 돼?”
“물론.”
“넌 왜 그렇게 충성스러워?”
나는 제이릴리스가 다른 정령술사를 거느리고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아까 사람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고,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지?”
“그래.”
“이게 내가 사람으로 사는 법이야.”
“!”
나는 제이릴리스를 위해 한 번 목숨을 바쳤다.
물론 모두가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거리 한가운데 떨어지고, 폭주한 마차가 달려오고 있을 때, 그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위해 반사적으로 몸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회귀 전 세상에서 많은 걸 보았다.
왕공 귀족 중에는 신민을 모두 헌신짝처럼 버리고 제국에 의탁하거나, 모든 자산을 탕진하며 피난용 땅굴을 파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자들도 많았다.
자기 안위만을 위해 사는 삶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제이릴리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잘 부탁드리겠사옵니다. 폐하.”
나는 방긋 웃었고, 그녀는 한없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온몸이 불타는 듯한 열기가 찾아왔다.
* * *
“더, 더, 더!”
“데니아!”
데니아는 실신할 듯한 기분으로 대지와 나무의 정령들을 불러냈다.
이미 다른 술사는 죄다 탈진한 상황이었다.
제이릴리스 황제는 침식으로 소멸한 불의 상급 정령 이프리트의 정수 수십 개를 한데 녹여낸 뒤 발렌시아누스의 몸에 이식했다.
그 과정에서 불의 정수가 발렌시아누스의 몸을 태우려 할 때, 나무와 흙의 정령을 보내 대신 불타도록 하는 게 데니아의 일이었다.
한쪽으로만 장작을 넣어서 불길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쉬웠다.
‘이건 사람이 아냐.’
쌍둥이 모두에게 한 평가였다.
제이릴리스 황제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을 듯한 집중력으로 정수를 심장에 밀어 넣었고,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저항을 의식적으로 억누르며 정수를 받아들였다.
데니아로서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발렌시아누스로서는 한 번 느껴본 감각이었다.
‘선악을 떠나 한 몸에 담을 수 없는 이물이 들어오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 그때 다리에 힘을 빼야 척추의 반사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등에는 힘을 주고 있어 고통을 견딜 수 있어.’
내가 점점 달라지는 기묘한 감각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육신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꾸기 위해서 40년을 돌아왔다.
‘나는 망나니 대공 발렌시아누스고, 세레라지에 누나와 텐티아 경을 비롯해 전생에서 사라진 인재들을 확보할 것이며, 제이릴리스가 칭송받는 황제가 되도록 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정의한 그의 본질이었다.
발렌시아누스에게 있어, 몸에 무슨 피가 흐르고 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데니아는 백금발이 다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을 감내하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 그녀는 그 쌍둥이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헬레나. 하드리탄. 너희도 마찬가지야.’
그녀를 비롯한 셋은 생존을 허락받았고, 적성대로 사는 걸 허락받았다.
하드리탄은 황실 재무관이 되었고, 헬레나는 황동기사단의 기사이자 장교가 되었다.
그녀 역시 정령술사가 되었으나, 세레라지에처럼 일에 열광하지 못하는 건, 그녀가 그 힘을 즐기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힘 자체를 동경하지 않는다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동경해야 한다.
“거의 다 되었느니라.”
“예. 폐하.”
데니아는 코피가 터져 나오는 걸 느끼며 그녀의 모든 여력을 쥐어짜 정령들을 불러냈다.
나무 덩굴과 바위 손이 생겨나고 곧바로 타올라 사라졌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무엇을 위해 열광할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