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09)화 (209/340)

(209)

정령 정수 이식이 끝났고, 나는 제이릴리스의 부축을 받아 황궁 마도 공방을 나왔다.

하늘은 푸른빛이었고,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한낮이었다.

“짐은 이제 들어가서 서류와 싸워야겠노라. 신민들에게 오해를 살 만한 모습을 보인 죄로 이틀간의 근신을 명할 테니, 들어가 쉬도록.”

나는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이릴리스를 따라 본궁으로 향했다.

공방은 황궁 동쪽 끝에 있었고, 별궁은 본궁 서쪽에 있었기에, 어차피 본궁까지는 같이 가야 했다.

여름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때때로 구름이 태양을 가려 그리 덥지 않았다.

당연히 제이릴리스가 손을 쓴 것이었다.

모른 척 가볍게 옆으로 붙으니, 제이릴리스의 소매에 피가 튄 게 보였다.

“폐하?”

그곳을 가리키니 그녀가 혀를 찼고,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싹 지워졌다.

“그런데 그대는 손가락이 왜 그 모양인가?”

“제 손가락이 왜…… 어?”

오른손 중지와 약지가 반투명해져 있었다.

손가락 아래로 땅이 내려다보였다.

“!”

나는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원래 손 모습을 떠올렸고, 다행히 손가락은 다시 불투명한 채로 돌아왔다.

“흑마법사들의 영체화와 비슷한 현상인 듯하옵니다. 큰 문제는 없으나, 앞으로는 하얀 장갑을 애용하겠사옵니다.”

“그리하라.”

잠시 후 제이릴리스가 중얼거렸다.

저 앞에 본궁 지붕이 보였다.

“그대를 점점 짐처럼 만들고 있구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영광이옵니다.”

집무실까지 제이릴리스를 배웅하고, 이제 별궁으로 돌아가 근신을 달게 받으려 하던 찰나, 홀에서 한 쌍의 남녀와 마주했다.

“발렌시아누스?”

“무사했군!”

헬레나는 황동색 갑옷을 입고 붉은 눈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는데, 행복해서 죽어버릴 듯한 표정이었다.

기쁨의 기류가 어깨 위로 떠올라 아지랑이처럼 맴돌았다.

근 한 달간 매일 같이 중부 기사, 황동기사단과 숙영지에서 함께 하고, 군사 활동도 여러 번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반면 하드리탄은 다 죽어가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빛을 잃고 뱅뱅 돌았다.

검은 서류 가방과 안경테조차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나는 지난 며칠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둘에게 물었다.

“수도 정세에는 큰 문제 없나?”

* * *

헬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해도 좋다. 발렌시아누스. 마커스가 만든 귀족 연합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다들 수도 안으로 돌아왔다. 물론 호위대는 100명 안팎으로만 거느렸다. 세베릭 대공과 카리오사 후작도 큰 충돌 없이 자기 호텔과 숙영지로 돌아갔다.”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잔당들이 뭉쳐 끝까지 싸우거나, 대귀족들이 이참에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칼을 뽑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교회는 어떻지?”

“교회도 큰 문제는 없었다. 적어도 군사적 행동은 목격되지 않았어. 성기사들만큼은 조용하다. 그건 장담할 수 있어.”

“시민들은?”

일순 헬레나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텐티아 경이 널 업고 황궁에 들어온 뒤로 약간의 소요 사태가 있었지만, 지금은 무사히 진압되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완전히 난리가 났겠군.

어쩌면 지금도 황궁 앞에 모여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군사적 상황을 정리받고, 하드리탄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반쯤 울부짖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죽을 것 같다. 발렌시아누스. 수도 물가가 미친 듯 널뛰기하는 중이다.”

그 정도는 예상했다.

“대영주들끼리 싸워 대니 상단이 겁먹어서 안 들어와 현물이 부족하고, 시민들은 야시장에서 모든 물자를 사재기하고 있다.”

이 정도도 예상했다.

“그래서 물가가 더 오르고, 이참에 한몫 잡으려는 깡패놈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흑철 기사단과 치안감들은 놈들이 대귀족들 눈에 띄지 않게 막는 것도 벅차다.”

……이것도 어찌어찌 예상 범위 내다.

이 시국에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깡패들이라면 의원들이나 궁정 귀족들과 연관된 놈들일 게 뻔했다.

바르바토스 단장에게 편지 한 통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드리탄의 말을 마저 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마커스 후작이 바친 영지의 가치를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그게?”

하드리탄은 궁정 귀족화에 대한 절차를 대충 설명해 주었다.

호수, 산림, 마을, 도시 등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기고 이에 따라 연금을 책정해주는 방식이라고 했다.

“놈이 데려온 행정관들은 어떻게든 한 닢이라도 더 받으려 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한 닢이라도 깎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쪽 지방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놈들이 달라는 대로 줄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니 아직은 그 방식을 쓸 때였다.

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 말했다.

“그냥 매년 놈의 영지에서 나오는 평균 수입과 놈의 순수익을 확인한 다음, 그 순수입의 몇 %로 주면 안 되나?”

하드리탄이 마테오스를 영접한 광명신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넌 천재다! 발렌시아누스!”

“뭘 이런 걸 가지고.”

* * *

하드리탄과 행정관들의 인사를 받으며 본궁을 나왔다.

본궁 옆에 마차 한 대와 짐마차 한 대가 멈춰 섰는데, 마차에서 참 반가운 얼굴이 내렸다.

긴 남색 머리에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 세레라지에였다.

“누나?”

“발렌시아누스! 무사했잖니. 회복해서 다행이구나.”

그녀의 노란 눈은 환하게 웃었고, 그녀의 남색 눈은 나를 위아래로 쓸었다.

그녀도 경지에 오른 마법사인 만큼 내게 다른 기운이 섞인 걸 알아챈 거겠지.

“살려 줘서 고마워. 마커스의 군막에서 많이 긴장되었을 텐데.”

“괜찮잖니. 이 몸은 천재 마법사라 금방 나올 수 있었단다. 아, 혹시 두고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니?”

그녀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어렸다.

“자의식 과잉이야. 누나. 빨리 고쳐. 그거 심해지면 불치병 된다.”

세레라지에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새소리가 참 좋잖니.”

“행정관들 비명밖에 안 들리는데.”

그녀가 피식 웃었고, 나는 그녀가 든 서류 가방을 눈짓했다.

“평소에 그런 가방도 들었어?”

세레라지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대감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명단이잖니. 마커스에게 당장 받아올 수 있는 건 다 받아왔단다. 황제 폐하께 뭘 가져왔다고 보고는 해야 하잖니.”

“아.”

“특히 중력 쪽 마법은 정말 신기했단다. 하루빨리 연구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잖니! 카리오사가 준 이카리스 진주랑 결합하면 정말 최고의 비행계 마도구가 나올 거란다.”

적잖이 흥분한 모양이었다.

새침하고 서늘한 미모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기까지 했다.

나는 차분한 남색 장발과의 갭에 전율하며 말했다.

“잘됐네.”

그녀가 고양이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어? 무슨 음모라도 있니?”

아…… 이래서 눈치 빠른 마법사는 싫다니까.

“음모는 무슨 얼어 죽을 음모.”

“네가 나 좋은 일 생겼다는 소식에, 잘됐다고 말해 줄 애가 아니잖니?”

나는 제이릴리스에게 들은 말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제국 백작급 영지를 하사받고 마커스의 마도 공학 부대를 통째로 흡수하게 되었는데, 놈에게 그걸 그대로 맡겨 놓을 수는 없는 거잖아. 놈도 다른 걸 배워야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거고.”

“왜, 왜 그걸 나 보고 말하니?”

“누나만이 마커스를 상아탑과 이어주는 동시에, 놈의 마도 공학 기술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을 테니까?”

순간 세레라지에가 얼음 동상처럼 굳었다.

“…….”

눈빛만 봐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계산이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마도 공학처럼 마법사가 제조업에 종신하게 되는 학문이 발전하면, 그 옛날 마총을 만들었을 때처럼 마법사들이 갈려나갈 것 같은데, 아니니?”

색이 다른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일류 전격 마법사의 긴장이 전해져 왔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뭐, 지금보다 더 많이 뽑아야겠지. 수도 마법 아카데미 입학 정원도 늘리고. 누나 제자들 고용할 지원금도 늘려주고, 대형 공방 지을 부지도 더 구해주고. 물론 그 과정에서 마법사 개개인이 학자보다 장인으로 취급받게 될 수도 있겠지만, 미래는 알 수 없는 거잖아?”

세레라지에가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게 마법사 세상의 표준이 되지 않게 막으려면, 황제 폐하가 마도 공학 부대의 힘을 양이 아니라 질에서 찾으실 만큼 대단한 결과가 필요하겠구나.”

마도 공학 부대가 생각보다는 약하다.

그렇다면 쓸모를 위해서 마도 공학 부대의 수를 늘린다.

관련 업종에 세금이 투자되고, 더 많은 마법사가 장인으로서의 마법사로 변하리라.

반대로 마도 공학 부대가 충분히 강하면, 머릿수는 유지만 해도 된다.

업종에 추가 투자는 일어나지 않을 거고, 마법사들의 장인화도 없다.

이제 세레라지에도 그런 계산을 척척 하는 걸 보니 기특하면서도 씁쓸했다.

“그렇지!”

“그리고 공동 투자니, 상아탑 교류니 해도, 마커스를 통제하는 동시에 결과를 내야 하는 건 결국-”.

“누나지.”

“나잖니!”

우리는 동시에 말했고, 쓰게 웃었다.

세레라지에가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에 푸른 전류를 쓸어모았다.

“이, 이, 이 빌어먹을 망나니 동생아! 연구는 환영이지만, 도대체 왜 이런 짐 덩어리까지 던져주는 거니?”

“으아아악!”

“거기 서려무나! 대답 안 하니?”

“나도 최대한 나눠질게! 나도 같이 진다고!”

“……그걸 아니 아무런 말도 못 하겠잖니. 그래.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잖니.”

“한 번만 다시 말해줄-”.

“그래. 이렇게 말하면 멈출 줄 알았단다. 이제 잡았잖니?”

“세상!”

* * *

별궁으로 돌아왔다.

잘 다듬어진 커다란 상록수들을 보고 있으니 퇴근도 못 하고 본궁에서 먹고 자고 했던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잔디밭 위로 판석 깔린 정원을 천천히 걸어 별궁에 들어서니, 문이 화들짝 열리고 루디가 달려 나왔다.

“발렌 님!”

주름 하나 없이 정갈한 시녀복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붉은 실핏줄이 한가득 서 있었다.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펑펑 운 흔적이었다.

나는 진짜로 살아 돌아왔다는 걸 느끼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래. 나 돌아왔어. 걱정했지.”

“발렌 님. 발렌 님.”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돌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별궁 거실 소파에 누워 루디가 가져다준 차를 마셨다.

온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손끝 발끝이 조금 투명해지는 감각에, 루디에게 장갑을 부탁했다.

“발렌 전하.”

오래지 않아 내 기사가 들어섰다.

“텐티아 경.”

그녀 역시 근신 중인지, 평소와 달리 사복 차림이었다.

물론 텐티아 경의 사복은 갑옷만큼이나 기사다웠다.

짧고 약간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는 기름을 발라 정갈하게 정리했고, 자잘한 생채기가 난 얼굴은 동화 속 왕자님처럼 늠름했다.

하얀색에 길고 뻣뻣한 블라우스를 입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높은 부츠를 신었으며, 완벽하게 다려진 붉은 제복을 걸쳤다.

허리춤에는 당연히 혁대를 두르고 있었고, 보검 화한과 단검을 차고 있었다.

100m 앞에서 봐도 평복 기사임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날 위해 많은 걸 걸었다고 들었네. 경. 너무나 고맙고, 또 미안하네.”

그녀가 신실한 신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성기사들과 싸우게 되었으니, 본의 아니게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텐티아 경은 언제나처럼, 아니. 언제보다도 늠름한 태도로 내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전하. 기사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언젠가 치러야 할 시험이었습니다.”

내 마음까지도 편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그리고 전 스스로 그 답안지에 만족합니다. 전하께서 제게 죄의식을 품으실 필요는, 포도주 한 병만큼만 있습니다.”

“하하하하. 그래. 내가 가진 최고의 보물을 내오겠네.”

충성이 기사의 의무라면, 그 충성을 기꺼이 받고 또 보답해 주는 게 주군의 의무다.

나는 텐티아 경의 충성을 기꺼이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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