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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는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를 위해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
“말린 과일은 한 접시에 담고, 치즈는 가능한 한 얇게 자르세요. 생과일은 약간 두께가 있는 편을 선호하십니다.”
물론 그녀는 이제 일개 시녀가 아니라 별궁의 시녀장이었기에, 그녀의 ‘준비’는 평소 아랫사람들을 얼마나 잘 다뤄 놓았는지에서 드러났다.
“포도주 준비되었습니다. 당도와 무게감 모두 별 네 개짜리입니다.”
“백포도주는 당도 별 두 개, 무게감 별 한 개짜리로 준비했습니다.”
“살라미는 기사님 몫만 썰었습니다.”
다그치지 않았는데도 톱니바퀴처럼 착착 움직이는 걸 보며, 루디는 그녀의 준비가 썩 훌륭한 성적표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잘하셨습니다. 지난번에 말한 대로 발렌 님은 고기 안주를 그리 즐기지 않으십니다.”
루디는 칸이 여럿 있는 큰 상자에 바퀴와 손잡이를 단 듯 생긴 수레에 안주와 술을 실었다.
“이제 잠깐 긴장 풀고 있으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부르겠습니다.”
“네. 루디 님.”
“감사합니다. 루디 님.”
별궁의 하인과 하녀들은 신분이 확실하고 전과도 없는 성실한 사람들이었지만, 마나나 이종족 혈통 같은 신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발렌시아누스나 텐티아 같은 초인들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몸이 굳었고, 따라서 루디는 여전히 그를 직접 모실 수 있었다.
“발렌 님. 여기 있습니다.”
루디는 넓은 사각 테이블 위에 안주와 술, 주석 잔과 수정 잔을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발렌시아누스가 포도주를 확인하고 흡족하니 웃었고, 애주가 텐티아는 기대에 차 붉은 눈을 빛냈다.
한 병은 적가면이 보내 준 최고급품이었고, 한 병은 황실 진상품이었다.
‘이제 됐네요.’
루디는 한 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언제나처럼 제 옆자리 의자를 슬쩍 당겼고, 루디는 못 이기는 척 그 자리로 가 앉았다.
‘……벨 님은 너무 많은 걸 베풀어주세요. 제게 과분한 영광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해요. 벨 님은 제게 쓴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니까. 제가 제게 해야 해요. 그래야 주제 모르는, 거만한 시녀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가 주석 잔에 포도주를 철철 따르고 강하게 부딪혔다.
“크으!”
텐티아가 잔을 기울이며 기쁨에 찬 탄성을 내질렀고, 발렌시아누스도 한결 긴장이 풀린 듯 웃었다.
루디는 그 모습을 보며 더더욱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술이 한 잔 두 잔 넘어갔고, 발렌시아누스가 텐티아에게 물었다.
“ -. ……텐티아 경. 솔직히 말해주게. 수도 여론이 어떤가?”
“전하. 이 좋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으십니까? 근신 당하셨으니 근신 당한 사람답게 구셔야 합니다.”
텐티아가 술맛 떨어진다는 듯 역정을 내면서도, 말하기 껄끄럽다는 듯 발렌시아누스의 눈을 피했다.
그러나 세 치 혀를 세 뼘 검처럼 잘 다루는 발렌시아누스는 손쉽게 기사의 얼버무림을 파 해쳤다.
“수도 여론이 괜찮으면 내일은 경과 함께 수도의 고급 주점과 남부 특산품 상단을 순회하려 했는데, 경이 알려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군. 돌 맞을까 두려우니 별궁에 머물러야겠어.”
루디는 저 화법을 당해낼 도리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저 쓰게 웃으며 침묵했다.
텐티아가 망설이고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전하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는 지금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음.”
“이 흉흉한 시기에도 폭동 직전까지…… 아니. 사실상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흑철 기사단이 곧바로 진압했으니 전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들이 뭐라고 외치고 있던가?”
텐티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미친 마법사의 폭발 사건이라는 자작극으로 시민들을 통제하던 망나니 발렌시아누스. 사실이 들통나자 그를 말리려던 세레라지에 대공과 그를 막으려던 마커스 후작 외 대귀족들을 습격했다. ……이런 논조입니다. 전하.”
루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녀는 꾸임 없는 발렌시아누스의 목소리를, 천사 같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어린 주군은 홀로 아파할 게 분명했다.
발렌시아누스가 단번에 잔을 비웠다.
“사실이지. 그래. 사실이고말고.”
금빛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은 공허보다는 충족감으로 차 있었다.
‘아.’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렇네요. 마커스 후작까지 잡아내셨으니, 이제 곧 충성맹세를……!’
루디는 가슴속을 메워가던 안타까움을 밀어냈다.
발렌시아누스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이 그를 불쌍히 여겨도 오만이었다.
* * *
잔이 한 잔 두 잔 비워지고, 병이 한 병 두 병 쌓여가고, 안주 접시가 두세 번 돌았다.
술을 물처럼 마시던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의 속도도 조금씩 더뎌지고, 둘의 하얀 얼굴에 불콰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둘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루디는 ‘마나를 다루는 초인’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제가 그 앙겔로스의 얼굴을 팔꿈치로 올려 치고!”
“으하하하!”
텐티아는 약간 과음할 때마다 손아귀 힘 조절을 잘못해 주석 잔을 구겨버렸다.
오늘의 발렌시아누스는 그런 텐티아보다도 초인적인, 아니. 비인간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요.’
루디는 새삼스럽게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금빛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애초에 이종족 혼혈이고, 용찬 의식까지 한 그가 비인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했다.
한순간이었지만, 얇은 하얀 장갑을 낀 손안에 손가락이 비춰 보이지 않았다.
“…….”
루디는 사점 안경 없이도 수백m 거리에서 목표를 맞추는 일류 사수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잘못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의 발렌시아누스는 묘하게 존재감이 강하면서도 약했고, 마치 주변 공간에 녹아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셨을 때 황제 폐하가 데리고 가셨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외상이 그리 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사흘간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요?’
불경함이 선이 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루디는 뻗어나가는 상상을 멈추려 했다.
그때 흐릿한 존재감이 거실 곳곳에서 느껴졌다.
“!”
루디는 왼손으로 리볼버 마총 아가테를 뽑아 들며 벌떡 일어섰다.
“전하!”
존재감은 다섯 곳에서 느껴졌다.
앞쪽의 큰 창문, 오른쪽의 대문, 왼쪽의 작은 창문, 식료품 들이는 뒷문, 그리고 천장 샹들리에까지.
루디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사점 안경 너머에서 붉게 충혈된 녹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마총 아가테가 불꽃을 뿜었다.
타아앙!
“!”
천장의 암살자는 온몸을 내달리는 격통보다도, 자신이 들켰다는 사실에 더더욱 큰 충격을 먹었다.
유목민족 대족장의 아들을 암살해 경고했을 때, 황무지 주술사 다섯의 눈도 뚫고 들어갔던 그였다.
‘……황궁 별궁에서 저런 눈을 가진 상대를 만나다니, 이게 무슨 사막의 장난이란 말이냐?’
쿵!
암살자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접시가 깨지고 술잔이 엎어졌다.
그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가면을 썼으며,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있었다.
“이런!”
“세상!”
사악, 그리고 화르르륵!
텐티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발검하고, 발렌시아누스의 손아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쳐라.”
동시에 사방에서 암살자들이 달려들었다.
* * *
루디는 오른손으로 마법 단검 ‘생동’을 뽑았고, 마나를 불어 넣었다.
쩌저저적!
서늘한 기운이 퍼지는 동시에 검푸른 얼음 칼날이 길게 자라났고, 그녀는 생동을 반달처럼 크게 휘둘렀다.
사아악!
이는 적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발렌사아누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거리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크흐흐흐.”
암살자 하나가 그림자와 녹아들며 허공에서 웃었다.
루디의 검술 자체는 형편없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루디는 그걸 굳이 말로 부정하지 않았다.
사악!
한 번 더 생동을 크게 휘둘렀고.
“크흐흐흐흐!”
암살자가 허공을 박차고 달려들었을 때.
“잡았다.”
오른손 아래로 왼손을 교차시키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
바람처럼 달려들었던 암살자는 안개처럼 은밀하게 겨눠진 총구를 보지 못했다.
“크악!”
암살자로 뒤로 나자빠지고, 루디는 씩 웃으며 다음 상대를 향해 눈을 돌렸다.
‘나쁘지 않습니다.’
텐티아가 두 명을 상대로 난투를 벌이고 있었고, 발렌시아누스가 또 한 명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때 테이블 아래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푹!
예리한 유리질 단검 한 자루가 그녀의 발등 급소 혈을 관통하고 바닥에 고정했다.
“윽-!”
루디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비명을 참아냈고,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머리로 마총을 조준했다.
타아앙!
어지간한 판금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는 마도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테이블 밑에서 솟아오른 암살자의 몸은 마치 안개와 같아서, 마총은 그저 마룻바닥을 꿰뚫고 나무 조각만 튀겼다.
“너!”
루디는 발렌시아누스가 그녀와 암살자를 향해 눈을 돌리는 걸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분노가 빛을 발하고, 비늘 돋은 손아귀에서 용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타앗!
그때 암살자가 용수철처럼 땅을 박찼다.
유리질 단검을 정직하게 내질러 발렌시아누스의 목을 노렸다.
“하.”
발렌시아누스는 같잖다는 듯 그대로 손바닥을 펴며 불길을 방사했다.
루디는 발렌시아누스의 비늘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았다.
단검 따위야 맥없이 튕겨 나가리라 생각했지만, 유리질 단검은 그의 손바닥을 그대로 관통했다.
푹!
“윽!”
암살자가 발렌시아누스를 몰아붙였고, 손바닥을 관통한 칼날이 그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안 돼.”
일순 루디는 머릿속이 하얗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오늘 돌아온 그녀의 대공 전하였다.
그녀는 고통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발등을 꿰뚫은 유리질 단검을 뽑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멈춰!”
순간 별궁에 정적이 흘렀다.
“하아, 하아.”
텐티아가 암살자 넷을 달고 있었는데, 두 명은 텐티아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고, 한 명은 텐티아에게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었으며, 한 명은 텐티아의 검을 몸으로 붙들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한 암살자의 칼에 손바닥이 뚫렸고, 그대로 불길을 방사하려 하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의 손을 꿰뚫은 암살자는 형태가 검은 연기를 두른 듯 흐릿했다.
루디는 그의 목덜미에 유리질 단검을 겨누었다.
“사막 샌드웜의 이빨로 만든 단검. 온갖 걸 다 벨 수 있다는 말이 진짜였네요.”
“발등 급소를 찔렀는데도 서 있을 수 있을 줄은 몰랐군.”
암살자의 목소리가 뱀처럼 쉭쉭거렸다.
루디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답했다.
“열사후작 체사르 님 맞으시죠? 발렌 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제 검을 거두시는 게 어떨까요?”
“시녀 주제에 무례하구나.”
무례하다.
오만하다.
자신을 앞세운다.
이왕이면 피하려 노력했던 평가였다.
발렌시아누스를 욕하던 다른 귀족 가문의 시녀 시종들에게 결투를 걸었을 때도, 발렌시아누스를 위해서라는 명분만은 지켰다.
그녀가 잘못하면 그녀가 아니라 발렌시아누스가 욕먹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디는 그녀가 누구의 시녀인지 알았다.
‘망나니 대공, 친족살해자, 폭군의 앞잡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겠다 맹세했다.
스스로 움츠릴 필요는 없었다.
“후작께서는 불청객이며, 저는 발렌 님을 대신해 축객령을 내릴 수 있는 이 궁의 관리인입니다. 이승에서 축객 당하기 싫으시다면, 검을 거두세요.”
* * *
텐티아가 기사단에서 회복 포션을 가져오고 상주 사제를 끌고 와 루디의 발을 치료했고, 열사암후의 암살자들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옮겼으며, 발렌시아누스는 체사르와 마주 앉았다.
“후작.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그는 두통을 느끼며 물었고, 암살자들의 후작은 보라색 눈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열심히 걸어왔다네.”
“황궁 전투마법사들의 탐지 마법과 경계 마법을 죄다 피하면서 말입니까? 백금기사단과 근위병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요즘 같은 시국에?”
“그럼 기어 왔겠나?”
발렌시아누스는 노인의 주름 많은 갈색 얼굴에 마시던 차를 뿌렸다.
촤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