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11)화 (211/340)

(211)

난 열사암후 체사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남서부의 후작이자 일대 귀족들의 맹주, 약탈자 유목민족들과 그 배후의 아미르들을 막아서는 방패.

사막의 태양에 그을린 갈색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 깊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노인.

그리고 그 주름살보다 많은 사람을 죽인 최고위 암살자.

검술 실력이 기사급인데다 움직임이 너무나 은밀해서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와 그가 키운 암살자들은 회귀 전에도 한참 동안 정벌군을 괴롭혔고, 견디다 못한 제이릴리스가 그가 머물고 있다고 알려진 도시에 운석을 떨궈 완전히 멸망시키고 나서야 조금 잠잠해졌다.

그러나 끝내 그의 시체는 확인하지 못했고, 수도에서 궁정 귀족들의 의문사가 일어날 때마다 열사암후의 복수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번 삶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게 둘 수는 없었다.

그게 내가 루디 발등을 찌른 이 괘씸한 노인에게 펄펄 끓는 찻물을 뿌리는 정도로 감정을 갈무리한 이유였다.

체사르가 뜨겁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입 안에 금을 씌운 이빨이 듬성듬성 보였다.

“아무도 안 죽였으니 되지 않나?”

“입 다무십시오. 샌드웜 칼날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요즘 수도 쪽에서는 일단 쳐들어가서 쓸어버리고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게 인기라더군. 서쪽에서도 그랬고 중앙에서도 그랬지. 나도 그렇게 했을 뿐인데, 왜 이리 퉁명스럽게 구나?”

웃는 노인이 의뭉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가운데, 보라색 눈만 서늘히 번뜩였다.

“…….”

난 그 눈빛을 보고 지금껏 내가 저질러 온 패악질을 몇 개 떠올렸다.

이건 내 이야기였다.

플라니티에스, 프로이하이트, 그레모리우스, 그리고 그들의 봉신과 가신들, 또는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하는 다른 대귀족.

그들 모두 나나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할 당위성이 충분했다.

즉, 방금 이 노인이 한 말은 여기저기서 내 암살 청부가 들어왔다는 뜻이고.

그걸 내게 말해준다는 건, 본인이 그것을 거절했다는 뜻이며.

내가 노인에게 빚이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저 쓰게 웃었다.

“……소문대로라면 폐하의 궁을 찾아갈 줄 알았는데, 왜 제게 오셨습니까?”

체사르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원래는 그리하려고 했네. 밤에 칼 들고 찾아가서 협박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수도에 들어오자마자 느껴지더군. 절대 안 돼.”

“하하하하.”

“음. 쌍둥이 오빠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야.”

체사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암살자는 사람을 은밀히 죽이는 업을 타고난 사람이지, 신인지 괴물인지도 모를 존재를 토벌하려 나서는 업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네. 그건 영웅이나 용사의 일이지. 그래. 속된 말로 쫄았네. 이 나이 먹고 두려움을 느낄 줄은 몰랐어.”

그는 과장된 손동작으로 양손을 들며 느물느물 웃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유목민족 대족장을 죽였다는 전설의 암살자답지 않았다.

터번을 쓴 그 모습은 그저 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부 상인 같았다.

그 태도가 썩 마음에 들어서,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칼 들고 뭘 요구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체사르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 * *

“요즘 시국에 대영주들이 바라는 게 뭐 있겠나? 난 암살자이기 전에 수백만 영민을 거느린 영주일세. 내 가문과 영민들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지.”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고 싶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강을 막아서 저수지도 만들고 싶고. 그것 때문에 물길이 끊어진 유목 민족들이 몰려와서 발광하면, 전면전 벌인 다음에 아미르 토후국 국경 너머까지 추격해서 쓸어버리고 싶고?”

“잘 아는군. 혹시 남서부 여인을 첩으로 두기라도 했나? 아니면 남첩?”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시오. 황족 대숙청이 2년도 안 지났습니다. 여하간, 그럼…….”

나는 잠시 회귀 전 아미르 토후국의 행보를 떠올렸다.

그놈들은 광명신 대신 사막 잡신과 악신과 온갖 옛것을 섬겼다.

가장 부흥한 교단은 ‘데몬 술탄’이라 불리는 강력한 옛것을 최고신으로 섬기는 교단이었다.

이전 삶에서 세베릭을 토벌하겠다고 북부로 원정 갔을 때, 제국 남서부로 치고 들어와서 우리 밀밭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새끼들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도저히 상종 못 할 놈들이고, 미래의 침식자 소굴이었다.

이미 제이릴리스의 서랍과 마테오스의 책장에 성전 계획이 들어있을 거고.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준비되기도 전에 체사르가 전쟁을 일으켜 버리는 것이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놓고 선제공격할 생각은 없으시지요? 국경 넘은 걸로 외교적으로 욕 좀 먹었다고 그쪽 토호를 담근다거나.”

“아무리 내가 남서부의 맹주라도, 제국 간 대전쟁을 내 멋대로 일으킬 수는 없지. 거듭 말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내 신민들의 안정이야.”

“그럼 되었습니다.”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게 말씀 전해 두겠습니다. 충성맹세 후 칙령에서 원하시는 말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

체사르가 일순 눈을 부릅떴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끝까지 버텼다면 다시 칼을 뽑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대영주이자 국경의 후작이 유목 민족들을 막는 소임을 다하려 하는데, 그걸 돕지는 못할지언정 막는 건 못 할 짓입니다. 이 발렌시아누스가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암살자들의 후작이 크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고맙군. 발렌시아누스 대공. 이 은혜 잊지 않겠네.”

저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노인네가 다시 칼 들고 찾아올 일은 없을 듯했다.

* * *

루디가 새로 얻은 칼을 허벅지 안쪽 칼집에 숨기며 말했다.

“생각보다는 잘 풀렸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영주들이 패악질 부리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니까. 바꿔 말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냥 짊어진 게 많은 사람일 뿐이야.”

“신기해요.”

“사실 워낙 쉬운 일이기도 했어. 이번에는 황실이 뭘 해 줄 필요가 없었잖아. 그냥 자기네가 성이랑 요새 쌓는 거 오해하지 말아 달라. 아미르 토후국이랑 조금 분쟁이 생겨도 이해해 달라. 그 정도였으니까.”

“그것도 그러네요.”

“그 노인이랑 매일같이 목숨 건 숨바꼭질을 하느니, 과감하게 허락해주고 유목민족들 토벌하게 하는 게 백 배 나아. 사실 언젠가 다 토벌해야 하는 애들이었고.”

루디가 눈빛으로 왜요? 하고 물었다.

나는 루디가 후작에게 받은 유리질 칼날을 가리켰다.

“그게 샌드웜이라는 마수의 이빨로 만든 거거든.”

“네.”

“그 마수가 완전히 자라면 몸길이가 500m 정도 돼. 모래 속을 바다처럼 헤엄치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커진다고.”

루디가 입을 쩍 벌렸다.

텐티아 경도 놀랍다는 눈빛이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유목 민족들이 황무지랑 사막을 달리면서 발굽 소리를 내면 걔들이 소리 듣고 땅으로 올라온단 말이야?”

“네.”

“당연히 도망쳐야지. 문제는 그 방법이라는 게, 그놈을 뒤에 달고 사람 많은 도시 쪽으로 가는 거야. 딴 먹이를 보여 주는 거지. 그리고 그 도시가 죄다 제국 도시들이고.”

“!”

“?!”

루디과 텐티아 경이 기겁했고, 나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물론 마수 한 마리 때문에 도시가 망하지는 않아.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대비는 잘 되어 있거든. 하지만 유목민족 전체에 대한 원한은 생길 수밖에 없지.”

상상만 해도 다시 피곤해지는 놈들이었다.

“땅을 줄 테니 제국에 와서 정착하라고 해도, 우리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곳을 버릴 수 없다고 나와.”

“신성한 장소라는 건가요?”

“아니. 걔들 주 수입이 아미르 토후국이랑 근처 부족들이랑 제국 사이에서 삼각 무역하는 거거든. 황무지를 떠나서 정착하면 농사짓고 살아야 하는데, 그럼 지금처럼 떵떵거릴 수가 없다는 거지. 아주 개자식들이야.”

내가 이를 갈자 루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텐티아 경이 따라서 이를 갈았다.

“씨를 말려 버려야겠습니다.”

루디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 이것들 주고 가실 때 되게 아쉬워하시던데, 귀한 물건인가요?”

그녀는 샌드웜 이빨로 만든 유리질 단검과 소검을 여기저기 찬 칼집에 숨기고 있었다.

내가 체사르에게 몇 자루 받아낸 ‘우정의 표시’였다.

이걸 다른 말로는 ‘친구비’라고 하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귀한 물건이기는 하지.”

“얼마나요?”

“발등을 꿰뚫린 걸 보상받을 수 있을 정도? 괜찮은 마법 검이라고 생각하면 돼.”

거짓말이었다.

반사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걸 애써 버텼다.

……샌드웜은 죽는 순간 사후 경직의 충격으로 이빨이 죄다 가루처럼 깨져 버린다.

즉, 저 검을 만들려면 살아있는 샌드웜에게서 이빨을 뽑아야 했다.

그리고 미쳐 날뛰는 500m급 괴수의 아가리에서 이빨을 뽑는 일의 난이도와 내 손바닥을 관통할 수 있을 정도의 예기를 고려하면, 저 단검은 돈을 떠나서 당대의 시카리우스 후작 본인이나 쓸 수 있을 물건이었다.

어쩌면 저 중 한두 자루는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의 보물일지도 몰랐다.

나는 체사르를, 그 보라색 눈의 암살자를 떠올랐다.

내가 루디를 보통 시녀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그 짧은 시간 동안 파악하고, 저 귀한 무기를 내놓고 떠난 그 후작은.

그 험한 남서부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피 값을 잘 받았네요. 감사히 쓰겠습니다.”

루디가 머리를 숙였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 * *

밤은 착실하게 깊어 갔다.

“이 내가 왔잖니!”

세레라지에가 한 손에 지팡이를,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아이고. 누나. 왔구나.”

발렌시아누스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환영했다.

세레라지에가 지친 얼굴에 신비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 앉았다.

“압수품 보고 잘 끝났단다. 오늘은 제자 놈들도 다 퇴근시켰잖니. 아. 정말 나같이 착한 공방주도 없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녀의 잔을 채워 주며 히죽거렸고.

“술도 안 마셨는데 취했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세레라지에는 손가락에 전격을 모아 발렌시아누스의 목을 지졌다.

“넌 술을 마셔서 취했구나. 누나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아악, 아악!”

그녀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계속 이를 갈았고.

“그래! 폐하가 이상한 말씀을 하셨잖니. 황립마도궁방 소속 마도 공학 전공 수석 마법사 세레라지에. 차석은 마커스. 이게 무슨 말이니?”

발렌시아누스는 진정한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아까 낮에 말했잖아? 그 자랑하던 기억력 어디 갔어? 순수 연구는 상아탑에게 맡기고, 궁정 마법사들은 연구와 제품화의 조율을 맡게 될 거라 했잖아. 왜 그리 울상이야. 연구비 올려줄 거야.”

“닥치렴! 아직은 내가 너보다 부자란다. 내가 돈 때문에 마법 하는 줄 아니? 점점 마법이 일이 되고 있잖니!”

“켈켈켈켈! 운명을 받아들여라. 제국과 폐하를 위해 불철주야 일해라!”

“이익!”

세레라지에가 새된 신음성을 내고, 텐티아와 루디는 몰래몰래 웃었다.

그것도 잠시, 세레라지에는 이내 평소의 새침함을 되찾고 발렌시아누스에게 마도구가 든 가방을 내밀었다.

“네가 찾던 거 있더라.”

“……고마워.”

발렌시아누스는 불콰했던 얼굴을 순식간에 진중하니 가라앉혔다.

그는 들고 왔던 서류 가방을 열었고, 루디가 아니라 다른 시녀를 시켜서 고급 잉크와 펜을 가져오게 했다.

텐티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고, 루디는 이유 모를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전하?”

발렌시아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샹들리에 빛을 받은 백발이 찬란하게 달아오르고, 황금빛 눈동자가 신성하면서도 야만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루디. 무릎을 꿇어라.”

황족다운 기백이 어린 목소리였다.

“전, 전하?”

“어서.”

거부할 수 없는 그 음성에, 루디는 가볍게 전율하며 그녀의 망나니 대공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지극한 감정을 담아 입을 열었다.

“그대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섬겼지.”

“내가 수많은 황족 중 한 명일 때도, 황제의 경계 받는 쌍둥이일 때도, 총애받는 신하일 때도 말이야.”

“내가 아팠을 때 찬 수건을 대어 줬고,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진귀한 서적을 구해주었으며,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검과 마총을 들었어.”

한때 끼니를 챙기고 방을 청소하던 시녀는 소드 유저가 되어 상아탑의 마총과 열사암후의 보검을 다루게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발렌시아누스의 시녀였다.

“그 한결같은 헌신에 나 역시 보답하고자 해.”

발렌시아누스는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와 궁무 대신, 제이릴리스의 최종 인가까지 모두 된 서류에는, 루디를 궁정 귀족으로 봉한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루디 콘세크라투스 백작.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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