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12)화 (212/340)

(212)

루디는 ‘콘세크라투스’ 라는 새 성을 입 안에서 몇 번 발음해 보았다.

‘헌신’이라는 뜻의 단어였다.

……수도 궁정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름에 의미를 담고자 많은 단어를 가문의 미들네임으로 등록해놓는 게 유행이었다.

헌신, 영원, 충성, 결의, 등 시쳇말로 ‘있어 보이는’ 단어는 이미 많은 가문에서 등록해놓았고, 사용하려면 미리 허락받거나, 비싼 값에 그 권리를 사와야 했다.

즉, ‘콘세크라투스’ 정도 되면 듣기만 해도 그녀가 황제와 대공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성이었다.

발렌시아누스가 세레라지에의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상자를, 그 상자에서 테 얇은 안경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마커스가 만든 사점 안경이야. 단순한 추적 기능을 넘어서 밤에도 낮처럼 보게 해 주는 마법이 깃들어 있지. 네게 어울리는 걸 찾고 싶었는데, 어찌어찌 성공한 듯해서 다행이네.”

원래 쓰던 사점 안경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루디는 조심스럽게 새 안경을 받아 들고 써 보았다.

“아.”

조금 더 선량해 보이는 인상에, 확실히 시야가 매끄러워진 게 느껴졌고, 바깥이 한밤중임에도 초저녁처럼 훤히 보였다.

“감사합니다. 발렌 님.”

“앞으로도 잘 부탁해. 루디 백작.”

루디는 애써 웃었지만, 손이 후들후들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세상에나. 저. 출세했네요.’

제국의 봉건제는 종의 헌신에 주인의 보답으로, 주인의 보답에 종의 헌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루디는 자신이 더 거대한 고리에 올라탔음을 느끼며, 더한 헌신으로 보답하겠다 다짐했다.

“예. 발렌 님.”

세레라지에가 싱긋 웃었다.

“축하한다. 루디 백작.”

텐티아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오랫동안 기억될 듯하군요.”

그녀가 즐겨 읽는 기사 소설의 한 페이지를 본 듯했다.

루디가 다시 발렌시아누스 옆에 앉자,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에게 눈을 돌렸다.

“경. 벌써 그런 표정 지으면 곤란하네. 경에게도 기억할 만한 걸 줄 생각이었는데.”

“예?”

그 금빛 눈을 보며, 텐티아는 역시 기사가 되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무릎을 꿇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씩 웃었다.

“지금 경은 폐하의 기사지. 제이릴리스 폐하께 충성맹세를 하고 봉신이 되었고, 황실을 수호하는 백금기사단 소속으로서 나를 지키고 있어.”

근엄하니 내리깐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욕심 많은 망나니 대공이라, 경을 재물로 꼬드기려 하네.”

물론 텐티아를 제이릴리스에게서 빼 오겠다는 뜻은 아니었고, 넷 모두 그걸 알고 있었다.

‘저택을 사주시려는 걸까요?’

‘새 마법 검이라도 얻은 거니?’

‘전하라면 금화를 직접 내리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

텐티아는 내심 황금을 예상하며 멋진 감사의 말을 떠올렸고, 발렌시아누스는 그녀의 예상을 좋은 의미로 산산조각냈다.

“텐티아 경. 경에게 루베르스타늄 장원을 내리네. 훗날 은퇴한 후 경이 원한다면 그곳으로 내려가 영지를 꾸리고 새로운 가문을 만들게.”

“!”

늠름한 기사가 한 대 거하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큰 호수와 강을 낀 인구 5천의 도시가 핵심이야. 장원에 속한 크고 작은 마을과 촌락은 약 25개일세. 호수에 빼어난 약효를 가진 수초가 있어, 영지의 특산물이라더군.”

기사에게 땅과 영민을 받는다는 건,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당장은 황제 폐하의 행정관들이 대신 운영해주시겠지만, 매년 경에게 최종 순수입이 들어올 테야. 상속, 양도, 매매, 증여가 가능한 경의 땅일세.”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살지만, 결국 살육과 전쟁을 업 삼고 있고, 가진 건 단련된 몸뚱이 하나뿐인 삶이다.

“전하!”

언젠가 찾아올 은퇴 이후의 삶까지 보장받는다는 건, 기사 중에서도 선택받았다는 뜻이었고.

텐티아처럼 시골 영주 기사의 둘째들에게 자기 영지가 생겼다는 건, 집 떠나 출세하고자 나온 청춘의 설움을 완전히 지워주는 일이었다.

“경은 분명 최고의 기사가 되겠지. 앞으로도 나와 황실을 위해 분투해 주기 바라네. 마커스의 주술 회로로 경의 갑옷을 보강 중이야. 그래. 경이 그렇게 해 줄 수 있게끔 내가 챙겨주겠어.”

텐티아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망나니 황형은 기사가 충성을 바치게 하고 싶어 하는 법을 알았다.

“이 텐티아! 발렌시아누스 전하와 솔레타라스 황실에 변치 않을 충정을 맹세하겠습니다!”

* * *

술자리는 그 뒤로도 이어졌다.

“발렌. 신문 봤니? 텐티아 경을 ‘적기사’라고 부르더구나.”

세레라지에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멋있는 별칭이군.”

발렌시아누스가 불콰하니 달아오른 얼굴에 호쾌한 웃음을 띠었고.

“예. 전하. 제가 좀 멋있습니다. 누구의 기사인데 당연히 멋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텐티아가 고개를 들며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이 멍청한 칼잡이들아! 이거 욕이잖니. 좀 핵심을 파악하려무나!”

세레라지에가 목덜미를 잡았고.

“전하! 기사에게는 악명도 무명이옵니다.”

텐티아는 반박했으며.

“발렌시아누스에게는 그렇게 정정당당해라, 신실해라 하고 잔소리하더니, 결국 너도 나처럼 성기사들과 싸웠잖니! 이제 순순히 인정하려무나. 교회 놈들은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취한 세레라지에는 평소에 하고 싶던 이야기를 모두 중구난방으로 쏟아냈다.

“저는 정정당당하게 싸웠고, 교회 역시 그랬습니다. 교회가 교리에 타협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고, 제가 주군을 넘기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며, 타협하지 못하는 둘이 충돌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말이 안 통한다고 할 것 없습니다. 저희는 검으로 주장을 펼쳤고, 저는 제 뜻을 관철했으니까요.”

그러나 텐티아는 의외로 말이 되는 듯한 논리를 꺼내 들었고.

“아니. 검을 맞대는 게 왜 대화니!? 기사들과도 말이 안 통하는구나.”

세레라지에는 다시 목덜미를 잡았다.

루디는 그 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의 장갑 안쪽이 언 듯 비칠 때면, 새삼 그에게서 비인간적인 기운이 강해지고 있다는 게 실감 나서.

‘저주에 걸린 저의 전하.’

절로 올라오는 서글픈 기분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감췄다.

쿵, 쿵.

그때 별궁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루디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현관으로 나갔다.

집주인과 신분이 맞지 않는 사람은, 함께 들어올 때가 아니라면, 옆문이나 뒷문을 써야 했다.

실제로 사용인들은 모두 뒷문을 이용했고, 별궁에 온 본궁의 시종들은 옆문을 사용했다.

발렌시아누스가 사람을 많이 초대하는 편도 아니었으니, 이 궁에 정문으로 들어올 만한 사람은 같은 황족인 세레라지에나 헬레나, 기사 텐티아 정도였다.

‘누구죠? 혹시…… 카리오사 공작이나 세베릭 대공은 아니겠지요?’

루디는 문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술병이 든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본궁의 하인인가 보네요. 경고해야겠어요. 기사님께서 무례하다며 매질할지도 모르니까요.’

상식적으로, 하인 따위가 황형 발렌시아누스과 같은 문을 사용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문을 여는 루디의 손짓은 거칠했고, 말투 역시 다소 뾰족했다.

“누가 이 시간에 현관을 두드리는 겁니까?”

텐티아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현관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불과 한두 시간 전 열사암후의 습격을 받았으니, 불청객에게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짐이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던 건 황제 제이릴리스였다.

백발 금안이 달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

루디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텐티아와 발렌시아누스가 술잔을 내려놓고 달려 나와 현관 앞에 머리를 조아렸으며, 세레라지에는 창문 밖으로 도망치려다 제이릴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루디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걸 느끼며, 궁의 관리인으로서 귀한 손님을 안내했다.

“폐하. 이, 이, 이쪽으로 드십시오.”

황제는 태양 같은 존재감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그녀가 온몸을 떨게 했다.

“이, 이, 이쪽은 어디인가? 하하하하.”

루디는 기절할 듯한 기분으로 새 잔을 가져왔다.

하녀들 중에는 진짜 기절한 자도 여럿이었다.

‘아무 일 없겠죠?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아무 일도 없어라.’

지금 제이릴리스는 어느 날 아침에 발렌시아누스와 함께 집무실 책상 앞에서 마주 자고 있던 제이릴리스가 아니었다.

후광이 너무 강해서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고, 시선과 손짓 하나가 그녀의 몸을 얼어붙게 했으며, 발렌시아누스에게 느껴지던 비인간적인 기운도 수십 배로 강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루디가 정신을 놓아버리지 않은 건, 발렌시아누스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발렌시아누스.”

온 세상과 빛과 어둠을 한 몸에 담은 듯한 분위기를 두르고 들어온 황제가 그녀의 대공과 마주 앉았다.

루디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만에 하나 발렌시아누스가 문책당하는 분위기가 된다면, 재주넘기라도 해서 시선을 돌려야 했다.

황제가 붉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방금 열사암후가 왔다 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지 않고 협상을 잘 해냈더구나.”

“아.”

루디는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이 시시각각 바뀌는 걸 보았다.

굳어있던 소년 대공의 얼굴에 회색이 돌았다.

“폐하! 그럼-”.

황금색 눈동자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그래. 성공이도다! 놈이 이끌고 온 남서부 대영주들도 모두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느니라!”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같은 분을 섬기는 게 지고의 복임을 그 역시 알아보았을-”.

황제의 숨 막히던 존재감이 빠르게 옅어졌다.

“그 아부는 너무 심하구나. 그대 덕이다. 그대 덕.”

“아니옵니다.”

“기분이다. 발렌시아누스. 그대에게 기사총감의 자리도 주겠다. 앞으로도 짐을 도와 제국에 역사(役事)하도록 해라.”

“매일 질투하고 싸우는 네 기사단을 한데 묶어 조율하는 피로한 자리가 아닙니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십사-”.

“대신 각종 마도구와 영약의 배분을 총괄할 수 있지. 이참에 몸을 더 챙기도록 해라. 짐이 할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본래 황족이 맡는 게 관례인 자리니라. 순순히 따르도록!”

발렌시아누스가 결국 머리 숙여 명령을 받들고,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고 나른하게 웃었다.

루디는 그 모습을 보고 발렌시아누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영주들이 패악질 부리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니까. 바꿔 말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냥 짊어진 거 많은 사람일 뿐이야.’

저 신 같은 제이릴리스가 사실 발렌시아누스와 동갑이고, 그녀 자신보다도 어리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오늘은 축배를 들겠다. 따르라!”

“예. 폐하!”

어느새 제이릴리스와 발렌시아누스는 마주 보고 하하 호호 웃으며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길었느니라.”

“예. 폐하. 길었습니다.”

독한 술병이 순식간에 쌓이고, 세레라지에가 쓰러지고, 끝끝내 텐티아마저 드러누운 테이블에 쌍둥이만이 남았다.

집무실 책상에 마주 보고 앉아 잠들어 있었을 때처럼, 세상 사랑스러운 어린 천사 같지는 않았다.

둘의 황금색 눈동자는 제국 황족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숨겨진 칼날처럼 번들거렸고, 둘의 붉은 입술은 그 행보와 같이 어딘가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둘의 뺨은 짊어진 것의 무게를 증명하듯 핼쑥하게 들어가 있었다.

황제의 몸과 대공의 손끝에서는 비인간적인 기운이 풀풀 피어올랐다.

그러나 루디는 둘이 서로를 아끼고 지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짐에게 찾아올 모든 내일이 설레는구나.”

“예. 폐하. 저도 폐하와 함께할 모든 내일이 설레옵니다.”

그녀는 서로만 보인다는 듯 웃는 둘을 보며 생각했다.

황족과 왕공 귀족은 모두 이종족 혼혈이니, 점점 비인간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로를 아끼고 가진 것에 책임을 다한다면.

인간이 아니라 한들 사람이리라고.

“짐이…… 이 세상을 구원해 주겠노라. 그대와…… 오빠와 살아갈…….”

“제가 폐하의 이름에 영광을 가져다드리겠사옵니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널…….”

* * *

포로라고 해서 다 같은 포로가 아니었다.

마커스는 무장만 해제한 다음 본궁 호화로운 방에서 시녀 열둘의 섬김을 받으며 영지 헌납 협상에 임했다.

반대로 이름조차 없는 백발적안의 소년은 온갖 마법과 주술이 새겨진 수갑에 몸이 묶인 채로 황궁 지하 감옥에서 신음했다.

“아.”

소년은 소년의 창조자들이 소년에게 비밀리에 심어둔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소년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정한 상황에 몰리면 발동되는 주술이 있었다.

‘알고 있어. 난 만들어진 인형일 뿐이라는 거. 그래도 생을 받은 이상 살고 싶었어. 그게 전부였는데.’

그러나 소년은 기꺼이 그 주술을 받아들였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혈통 상의 삼촌을 떠올리면서.

‘발렌시아누스. 네가 바라는 건 안 될 거야. 제이릴리스는 영원히 폭군일 거라고.’

툭.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고,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그 순간 황족의 혈통으로 치장되고 옛것의 기운으로 물들어 찬란하면서도 불길하게 빛나는 영혼이 그 몸을 떠났다.

영혼의 존재를 명확히 느낄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의 주술사와 마테오스를 비롯한 최고위급 성직자뿐이었지만, 옛것들로 범위를 확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영혼에 새겨진 주술은 생전에 심어진 대로 그 달콤한 향기를 널리 퍼트렸고.

“……!”

어떠한 존재가 저 너머에서 그 향기를 맡고 이 세상에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그리하여 깊은 밤, 가장 어두운 새벽.

솔레타라스 제국의 수도 솔레타라온.

운하 중앙 선착장으로부터 1.8km 상공.

어느새 몰려온 여름 비구름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하늘에.

우웅.

두 개의 달이 뜬 듯 보일 정도로 강한 청록색 빛을 뿜는 핵이 생겼다.

쩌저저적!

핵은 창백한 물결 같은 청록빛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상공에 지름 500m의 마경을 형성했고.

핵을 만든 옛것은 제 일부를 보내 달콤한 영혼을 가져오려 했다.

그렇게 옛것이 보내는 일부를.

인간들은 이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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